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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45화 (45/139)

제 45 화

“오셨습니까, 주인님.”

“가브리엘, 카이우스는 이미 잠들었겠지?”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니, 그러셨을 겁니다.”

키안은 외투를 가브리엘에게 넘기곤 2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방으로 가는 대신, 카이우스의 방으로 향했다.

“에리스, 나야. 들어가도 될까?”

노크 대신 키안은 작은 목소리로 에리스를 불렀다. 잠시 후 인기척이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주인님, 돌아오셨군요.”

“카이우스를 보러 왔어.”

“한 시간 전에 잠이 드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에리스가 옆으로 비켜서자, 키안이 발소리를 죽이며 침대로 걸어갔다. 깊이 잠이 들었는지, 카이우스는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키안은 손을 뻗어 카이우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뭘 하며 지냈지?”

“오전엔 역사 수업을 하셨고, 점심 식사 후엔 검술 훈련을 하셨습니다.”

“에리스가 보기에 검술 실력은 어땠어?”

“역사 수업보단 훨씬 좋은 것 같았습니다.”

에리스의 대답에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또 뭘 했지?”

“저녁 시간 내내, 새끼 늑대와 노셨습니다.”

“나 대신 카이우스와 놀아준 모양이군.”

키안이 카이우스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갈색으로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꺼내 에리스에게 건넸다. 그러자 에리스가 상자 위에 쓰인 브랜드를 알아보곤, 눈을 빛냈다.

“이건 로체 거리에 새로 생긴 초콜릿 가게의 것이네요.”

“로이스톤 자작의 저택이 그쪽이라 오던 길에 사 왔어, 문을 닫지 않아서.”

키안의 말에 에리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작은 도련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에리스, 조만간 키엘체를 떠나 영지로 갈 생각이야.”

“네? 영지로 말입니까? 하지만 기사단은 어떻게?”

“전하께도 이미 허락을 받은 일이야. 하지만 이 얘긴 당분간 에리스와 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 적당한 때를 봐서 내가 가브리엘에게 말할 테니까.”

에리스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걱정 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머니께서 네게 맡겨놓았던, 그 열쇠 말이야. 아직 쓸 만한지 살펴봐 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제가 손을 봐두었습니다.”

에리스의 대답에 키안은 안심한 듯 고갤 끄덕였다.

“에리스, 전에 네가 해줬던 그 이야기 말이야. 내가 태어나던 날 왔다던 그 노파.”

“네, 말씀하십시오.”

“다시 저택에 찾아온 적 있어? 내가 로열 아카데미로 떠난 뒤에 말이야.”

키안의 질문에 에리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게 정확히 그 노파인지는 모르지만, 공작부인께서 딱 한 번 몰래 외출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공작님께도 알리지 말라고 하시면서요.”

“어머님께서? 누굴 만나러 갔는지 기억나?”

키안의 물음에 에리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갤 가로저었다.

“비밀로 하셨습니다. 저에게도 알리지 않으셨거든요. 다만 공작부인을 모시고 갔던 마부가 바레나 거리 쪽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땐 공작부인이 바레나 거리 같은 곳에 갈 이유가 없어 무시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바레나 거리란 말이지?”

“네,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마워, 에리스. 이제 그만 쉬도록 해.”

키안이 카이우스의 방을 나왔다. 그러자 문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은빛 늑대가 키안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키안은 앞서 걷는 은빛 늑대를 따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아름답고 신비로운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왜 이 상자가 여기에…….”

키안이 재빨리 침대로 걸어가 베개 바로 아래 놓여 있는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건 황실 사냥터의 비밀의 방에서 가져온 구스타프 1세의 상자였다.

“이건 분명 벽장 안에 숨겨놓았었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키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레녹스가엔 자신의 허락 없이 벽장에 손을 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이우슨가?”

키안이 고갤 갸웃하며, 상자를 살폈다. 분명 상자를 발견한 첫날 이후 상자를 장식한 푸른 수정에서 더는 빛이 나오지 않았다. 달빛에 비춰보았지만, 그저 거울처럼 자신의 얼굴을 비출 뿐이었다.

“대체 이 빛은 어떻게 된 거지?”

키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비밀의 방에서처럼 푸른 수정엔 달빛이 비치고 있지 않았다.

“그럼 달빛이 아닌 건가?”

키안은 손을 뻗어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수정을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은빛 늑대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러곤 붉은 혀로 상자를 핥았다. 그러자 상자에 새겨져 있던 고대어가 한순간이었지만, 금빛으로 빛났다.

키안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자신이 뭔가 잘못 본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설마 네가 이걸 꺼내 온 거야?”

키안이 은빛 새끼 늑대를 내려다보았다. 본능적으로 키안은 구스타프 1세의 방에서 발견된 유스타나의 별과 은빛 늑대가 뭔가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

키안은 처음으로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끊임없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키안은 손에 들려 있는 구스타프 1세의 상자를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되뇌었다.

“유스타나의 별, 은빛 늑대, 그리고…… 저주받은 레녹스가의 쌍둥이.”

**

이른 아침,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 기사단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출근 후, 막 차를 마시려던 키안은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의아했지만, 평소처럼 서늘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함께 차를 드시겠습니까?”

키안의 권유에 에드윈이 슬쩍 자릴 잡고 앉았다. 평소와는 달리 고분고분한 에드윈의 태도에 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은 아닌지 에드윈은 아레오가 따라주는 차를 마실 뿐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특별한 용건 없이 이른 아침부터 날 찾아오다니, 이상해.’

키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에드윈을 보았다.

“곧 아침 훈련이 있습니다.”

그 말은 급한 용건이 없다면, 그만 돌아가 달라는 뜻이었다.

“아, 그렇군.”

에드윈이 당황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찻잔을 놓았다. 그 모습에 키안은 더더욱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대체 뭐지?

“아레오, 잠시 자리 좀 비켜줄래? 리치문트 공작님께서 네가 있어 말을 꺼내지 못하시는 모양이야.”

키안이 에드윈에게 들으라는 듯 꼬집어 말했다. 그러자 아레오가 재빨리 사무실을 나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키안이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에드윈을 향해 말했다.

“이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특별한 건 아니고, 혹시 드레이크 경을 볼 수 있을까 해서.”

“드레이크 경이라면, 지금 훈련을 위해 연병장에 있을 겁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래도 될까?”

순순히 대답하는 에드윈을 보며, 키안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이유를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작님 성격에 결투를 신청하실 것 같진 않고, 왜 드레이크 경을 보려 하시는지 말입니다.”

분명 키안 식의 농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키안의 그 한마디가 에드윈의 정곡을 쿡 찌른 듯 거북했다.

“검술을 배워볼까 해서. 누가 그러는데, 굉장히 검을 잘 쓴다고 하더군. 근육도 멋지고, 얼굴도 잘생겼다고 말이야.”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에드윈이 한 말을 자신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그건, 벨라에게서였다.

설마 벨라의 말을 들은 건가?

“아키텐 공작부인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레녹스 공작에게도 같은 말을 한 모양이군. 맞다, 어제 로이스톤 자작의 파티에서 그러더군. 얼굴까지 붉혀가면서 말이야.”

키안은 에드윈이 불쾌해하는 것을 보며,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표정은 세이란에게서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키텐 공작부인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키안의 질문에 에드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 역시 구체적으로 아키텐 공작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오해를 했고, 그걸 사과했지만 여전히 자신에겐 쌀쌀맞았다.

하지만 자꾸 호기심이 생겼다. 눈이 갔고, 다른 남자 얘길 하니 화가 났다.

책을 찾아봐도 이런 내용을 기록한 건 없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그냥 신경이 쓰인다 정도라면 안 될까?”

“안 됩니다.”

키안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안 되지? 두 사람이 애인 사이가 아니라고 한 것 같은데?”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제게 아키텐 공작부인은 누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쉬운 마음으로 접근하시는 것이라면, 포기해 주십시오.”

“그럼 쉬운 마음이 아니면 된다는 건가, 레녹스 공작?”

에드윈이 조금은 화가 난 듯 성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그것도 안 됩니다. 아키텐 공작부인께서 드레이크 경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관심이 있으시더라도, 접어주십시오. 곧 드레이크 경과 만날 약속을 잡을 생각입니다.”

키안이 단호한 태도로 딱 잘라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에드윈을 향해 말했다.

“저는 훈련이 있어서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배웅은 못해 드릴 것 같습니다.”

그 말과 함께 키안이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에드윈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자신이 드레이크보다 못한 게 뭔지 궁금했다.

키안의 말처럼 신경 끄고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법무부 건물로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의 발걸음이 저절로 연병장으로 향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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