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화
세이란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딱 잘라 부정하자, 에드윈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로열 아카데미에 다녔던 귀족이라면, 세이란이 키안 때문에 로이스톤 자작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아니라고 하다니. 황태자만 아니었다면, 로이스톤 자작은 분명 세이란에게 결투를 신청했을지도 몰랐다. 뭐, 당연히 결투의 결과는 세이란이 이겼을 테지만.
“그런데 두 분은 무척이나 친해 보이는군요.”
에드윈이 키안 옆에 서 있는 벨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벨라가 에드윈에게 살짝 고갤 숙여 보인 후, 세이란 쪽으로 고갤 돌렸다.
“전하, 아키텐입니다.”
벨라가 황태자인 세이란에게 우아한 몸짓으로 예를 갖추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황태자인 세이란과 자신을 대하는 온도차가 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에드윈은 아키텐 공작부인인 벨라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부터 두 사람이 애인이란 소문이 있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이렇게 다정하게 파티에 참석하다니 말이야.”
세이란의 단정적인 말투에 벨라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레녹스 공작님과는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습니다. 소문처럼 애인 사이는 아닙니다, 전하.”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가 애인을 빼앗아가는 치정 싸움은 취미가 없어서 말이야. 그럼, 부담 없이 레녹스 공작을 빌려가도 되겠군.”
치정 싸움이라니.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세이란의 뻔뻔한 태도에 키안은 귓불이 뜨거워졌다.
“당연히 데려가십시오. 어차피 레녹스 공작님께선 전하의 것이니까요.”
벨라의 농담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잠깐, 만족이라니.’
키안은 자신이 없는 것처럼, 얘길 하는 두 사람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레녹스 공작, 자릴 옮길까? 할 얘기가 있거든.”
키안이 벨라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고갤 돌렸다.
“전 여기 있겠습니다, 레녹스 공작님.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키안이 세이란을 따라 자릴 뜨자, 벨라는 음료가 놓인 탁자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에드윈 역시 벨라를 따라 이동했다.
“리치문트 공작님, 저에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볼일 보세요.”
“제 파트너가 그대의 파트너를 데려갔으니, 돌아올 때까지 옆에 있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그래서 키안과 세이란이 돌아올 때까지 벨라의 옆에 딱 들러붙어 있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음료는 뭘로 드시겠습니까?”
에드윈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음료 잔 중 시원한 에이드가 든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벨라 앞에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리치문트 공작님. 하지만 지난번에 했던 제 얘기,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벨라가 애인 같은 건,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에드윈에게 상기시켰다.
“남녀가 함께 있는데, 꼭 애인이나 부부여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키텐 공작부인께선 꼭 그런 관계만 원하시는 겁니까? 조금 전 레녹스 공작과는 편한 친구 사이처럼 보였는데 말입니다.”
에드윈의 지적에 벨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키안은 에드윈 리치문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자가 아니라, 여인이다. 그래서 친구일 수 있었다.
하지만 벨라는 한 번도 귀족 남자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레녹스 공작님은 다르십니다.”
벨라의 단호한 태도에 에드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벨라라는 여인이 다른 남자를 입에 담고, 그만 다르다고 말한 것뿐이었는데 불쾌감이 느껴졌다.
“다르다는 건 알겠군요. 하지만 나 역시 레녹스 공작과 같은 걸 원하는 건 아니라서.”
벨라는 에드윈이 건네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경 너머 푸른 눈동자가 투명한 수정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생각이 같아서.”
벨라의 대답에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뜨곤 그녀를 보았다. 정말 생각이 같은 것이냐고 묻는 듯이.
갑자기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어색해졌다. 벨라는 그의 시선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책만 읽는다고 하더니,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흠흠, 저기 혹시 황실 기사단에 계시는 드레이크 경에 대해 아십니까?”
그저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요량으로 입을 뗀 것뿐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드레이크 경에 대해 왜 묻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우연히 몇 번 봤었거든요. 어깨며, 등 근육이 굉장히 멋지더군요. 얼굴 역시 그만하면 잘생겼고요.”
벨라는 드레이크를 생각하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취향이 그쪽이었군.”
“네?”
에드윈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벨라가 다시 반문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전, 기사단과 친하지 않습니다. 잠시 실례해야겠군요, 급한 일이 생각나서.”
불쾌한 표정으로 자릴 뜨는 에드윈을 보며, 벨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전하와 키안이 돌아올 때까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벨라는 어깰 으쓱해 보인 다음, 키안이 돌아올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때울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파티에 참석하다니, 의외야. 혹시 이 파티가 로이스톤 자작의 생일 파티였기 때문에 참석한 건가?”
사람이 없는 테라스에 도착하자마자 세이란이 불만이라는 듯 말했다.
‘순 거짓말쟁이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로이스톤 자작에겐 아무런 감정도 없으시다더니.’
키안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세이란을 향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험 상 여기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간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연습, 아니, 관찰하기 위해서 파티에 참석한 것입니다.”
“연습은 또 뭐고, 관찰은 또 뭐지?”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벨라가 파티에 참석하는 레이디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란 말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교계의 레이디들 사이에서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만큼, 꼴불견은 없다고 했거든요.”
“완벽한 레이디가 되라고 했던 내 말 때문인 모양이군. 키안, 넌 그런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다 알아서 하면 될 일이거든.”
“어차피 한 달도 남지 않은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벨라가 말했습니다.”
“잘됐군.”
“하지만 춤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 되실 때 말씀해 주십시오.”
“춤이라고?”
“무도회에서 전하와 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키안의 설명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사교 시즌이 시작되는 첫 무도회에서 세이란은 키안과 함께 춤을 춰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잊고 있었어. 워낙 무도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서.”
사실 참석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춤을 춰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레이디 베로니카와 춤을 추신 것 아니셨습니까?”
키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키안은 당연히 자신이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인 베로니카와 춤을 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춘 적 없다. 내가 춤을 추게 된다면, 네가 첫 상대일 거야. 그러고 보니, 너와 하는 처음이 아주 많군.”
세이란의 눈빛이 바뀌었다. 서늘하던 녹색 눈동자가 그윽해지더니, 키안 쪽으로 고갤 숙여왔다.
조금 전 비밀 얘길 하기 위해 그에게 바짝 다가가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얼굴은 눈동자가 서로 담길 만큼 가까워졌다.
“키스도, 춤도, 그리고…….”
세이란이 말을 멈췄다. 그러곤 손끝으로 키안의 턱을 건드렸다. 키안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이 불이 날 것처럼 뜨거웠다. 나른한 눈빛의 세이란을 보자, 키안은 그가 삼킨 마지막 말이 자꾸만……. 이상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전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키안은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갤 돌리려 했다. 이곳은 로이스톤 자작가의 파티장의 테라스였고, 누구나 허락 없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만약 이렇게 가깝게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을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이상한 소문이 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키안은 시선조차 피할 수 없었다. 눈빛에 사로잡힌다는 말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눈빛으로 날 보면, 하고 싶어지잖아.”
귓가에 속삭이는 나른한 목소리에 키안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세이란의 손이 키안의 팔에 닿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전에 키안의 몸이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테라스 안쪽,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에 밀어붙여진 키안은 벽과 세이란에 갇힌 채 그를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세이란의 눈동자가 보였다. 뺨에 닿는 그의 숨결도, 그리고 자신의 몸을 내리누르는 단단한 몸 역시.
“세이…….”
그때 테라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눈을 들자, 세이란 역시 들었는지 검지 손가락을 들어 키안의 입술을 눌렀다. 소릴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여기에도 없는 건가?”
벨라의 목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키안은 당혹감에 숨을 삼켰다. 키안이 벨라의 기척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세이란의 입술이 키안의 귓불을 핥았다.
흠칫, 어깰 떨며 올려다보자,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일부러 키안의 귓불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키안이 장난치지 말라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그러자 세이란의 입가가 서서히 비틀리더니, 이번엔 그가 고갤 숙여왔다. 순간 키안은 그가 뭘 하려 하는지 알았다.
“…….”
그때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결국 키안은 그를 밀어내지 못한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걸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청량한 체향이 콧속으로 스몄다. 이내 그의 뜨거운 숨결이 자신의 더움 숨소리와 섞이더니, 세이란의 말캉하고 뜨거운 혀가 입술을 쓸었다.
키안은 새어 나오려는 숨을 삼켰다. 벨라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입술을 부딪쳐 오는 뜨거운 감촉 사이에서 키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입술을 핥던 세이란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그사이 키안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훗-”
그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테라스의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혀 확신할 순 없었다.
“이제 나가야……. 아흣-”
살짝 열린 입술 새로 세이란의 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키스였다. 집요하게 혀를 얽고 빨아 당기는 그 아릿한 아픔과 함께 짙은 열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키안은 나른한 감각을 삼키며,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하아- 전…….”
몸 안에 나른한 열기가 확 퍼졌다. 키안은 무섭게 뛰는 심장 소리가 세이란에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흐흣-”
세이란의 혀가 키안의 안쪽 예민한 부분을 쓸어내렸다. 움찔 몸을 떨며,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세이란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닮았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이란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그의 녹색 눈동자가 키안의 눈과 마주쳤다.
‘그럴 리 없어. 그는 붉은 눈동자였는걸.’
순간 키안의 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블랙의 품에 안겨 쾌락에 몸을 떨던 자신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독한 죄책감에 심장이 타는 듯 아팠다.
“놓아주십시오.”
키안이 고갤 숙이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을 숨기려고 한 탓인지, 평소보다 딱딱하게 들렸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세이란이 키안의 팔을 놓았다. 그러자 키안이 비좁은 틈을 빠져나오며 말했다.
“불편합니다. 다시는 이러지 마십시오.”
싸늘한 눈빛으로 세이란을 올려다본 후, 키안이 자릴 떴다. 세이란은 테라스 문이 닫히는 소릴 들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대체 왜 키안이 자신을 밀어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오두막에서 자신에게 안겼을 때, 분명히 말했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세이란은 그 사람이 자신인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기뻤었다.
그때 또다시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고갤 들자, 이번엔 에드윈이 서 있었다.
“레녹스 공작과 아키텐 공작부인께선 급한 용무가 있다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돌아가는 게 좋겠군.”
세이란이 에드윈을 지나쳐 걸어가다, 걸음을 멈췄다.
“리치문트 공작, 혹시 연애에 대해 잘 아나?”
“연애에 대한 건 몇 권 책으로 읽은 게 다입니다. 하지만 연애를 하는 자들의 심리에 대한 책을 최근에 읽은 적은 있습니다.”
“그럼 이유가 뭘까? 사랑하면서도 거부하는 심리 말이야. 더 냉정하게 거부하고, 밀어내는 심리는 뭘까?”
세이란의 질문에 에드윈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혹시 뭔가를 감추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상대에겐 절대 들켜서는 안 될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고요. 죄책감일 확률이 클 겁니다.”
“죄책감이라고?”
세이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에드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키안이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며칠 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잠깐, 며칠 전이라고? 그렇다면, 설마?’
세이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책으로 읽고 연애 상담을 한 것치곤, 에드윈의 충고는 굉장히 신빙성이 있었다.
“죄책감이란 말이지?”
세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자신은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키안은 자신과 블랙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안의 성격상, 두 사람과 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제길, 복잡하게 꼬였군. 하지만 어쩌면 잘됐는지도 모르지. 죄책감을 떨쳐 내는 방법은 그 비밀을 말하는 것밖엔 없을 테니까.’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