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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43화 (43/139)

제 43 화

아침 6시. 키안은 셀서스 궁에 도착하자마자 황제궁으로 향했다. 오늘이 바로 신입 기사단의 기사들이 황제궁에 배치되는 날이었다.

“단장님, 나오셨습니까?”

기사단의 교체식을 막 끝낸 드레이크가 키안을 발견하곤 서둘러 다가왔다.

“배치는 끝났나?”

“네. 이젠 개미새끼 하나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키안은 황제궁에 배치된 기사들을 보며, 고갤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무엘 스텐호프는 보이지 않았다.

“스텐호프가 보이지 않는군.”

“아, 스텐호프는 실력이 출중해 따로 빼 훈련 중입니다. 단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최정예부대에 배치해 훈련을 시켜볼 생각입니다.”

드레이크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아, 전하께서 검술 시합을 열 계획이라고 하시더군.”

“그렇지 않아도 유스타나 각 영지에 전갈을 보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두 달 뒤 검술 시합을 열어 기사단을 뽑겠다고 말입니다.”

“이번 시합을 통해 능력 있는 기사들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전하께서 거액의 상금까지 거셨으니, 분명 실력 있는 기사들이 지원할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단장님.”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그때 회랑을 지나 황제궁으로 걸어오는 세이란과 눈이 마주쳤다. 폐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른 시간 들른 모양이었다.

“전하.”

키안과 드레이크가 재빨리 세이란에게 고갤 숙였다.

“출근이 굉장히 빠르군, 레녹스 공작.”

“전하께선 아직도 잠을 주무시지 못하시는 겁니까?”

키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아이크가 대신 답했다.

“아닙니다, 공작님. 요즘 전하께선 편히 주무십니다. 다만, 업무가 과중해 하루에 네 시간밖에 주무시지 못하긴 합니다만.”

한마디로 일을 줄여야 한다고 넌지시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다는군, 레녹스 공작.”

“일을 줄이십시오, 전하.”

“일을 줄이면, 나와 함께 놀아줄 용의는 있고?”

“네?”

키안이 주위의 눈을 의식해 고갤 숙였다. 그러자 세이란이 키안의 옆을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사흘 후 저녁에 시간을 비워두도록 해. 갈 데가 있다.”

“갈 곳이라면, 어디?”

“나와 보면 알아.”

키안이 고갤 끄덕이자, 세이란이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폐하를 뵙는 건 어때, 레녹스 공작?”

“제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거다. 사실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널 꼭 한 번 만나겠다고 하셨거든.”

“절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그러니 어서 날 따라와.”

세이란이 앞서 황제궁 안으로 들어갔다.

“레녹스 공작님, 이쪽입니다.”

뒤에 서 있던 시종장 아이크가 황제궁의 입구를 가리켰다. 키안은 하는 수 없이 옆에 서 있는 드레이크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후, 아이크의 안내를 받으며 황제인 읜슬러를 뵙기 위해 황제궁의 침실로 향했다.

황제의 침실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키안은 자꾸 긴장이 됐다.

“떨 것 없다. 허락도 없이 이곳에 들어왔다고 폐하께서 호통을 치시진 않을 테니까.”

세이란의 농담에 굳어 있던 키안의 입매가 살짝 풀렸다. 사실 어렸을 적 세이란을 따라 몰래 황제궁에 숨어든 적이 있었다.

그때 황제인 윈슬러에게 걸려, 된통 혼쭐이 났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키안은 황제인 윈슬러가 두려웠다.

“전하, 오셨습니까?”

두 사람이 침실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시녀 하나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시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갈색의 눈동자가 굉장히 눈에 익었다.

“엇, 당신은…….”

키안이 엘렌을 알아보곤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 알아?”

세이란의 물음에 오히려 키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설마, 전하께선 잊으신 겁니까?”

“내가 뭘 잊었다는 거지?”

“10년 전 황제궁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 저희를 숨겨준 시녀가 바로 이분이었습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엘렌을 보았다. 하지만 세이란은 특별히 기억나지 않았다.

“레녹스 공작 말이 맞느냐?”

“그땐, 공작님이 아니라 소공자셨습니다. 은빛 머리카락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지요.”

엘렌의 대답에 키안이 거 보라는 듯 세이란을 보았다.

“그런 인연이 있는 줄 몰랐군. 난 그때도 지금도, 단 한 사람밖엔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세이란의 말에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에 세이란이 장난스럽게 웃더니 낮게 속삭였다.

“설마, 그 한 사람이 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아닙니다.”

당황한 키안이 서둘러 부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변명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당혹감에 키안이 고갤 숙이자, 세이란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서 있는 엘렌 쪽으로 고갤 돌렸다. 엘렌은 두 사람의 친근한 대화에도 놀란 기색 없이 서 있었다.

“폐하께선 어떻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엘렌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인 후, 엘렌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키안, 이리 와서 내 옆에 서.”

그의 명령에 키안이 침대로 다가가 세이란의 옆에 섰다. 그러자 그가 키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전하!”

놀라 손을 빼내려 하자, 세이란이 더 힘껏 손을 쥐었다. 그러곤 키안에게 가만있으라는 눈짓을 했다. 키안은 침대에 누워 있는 윈슬러의 눈치를 보며, 얌전히 서 있었다.

“폐하, 제 약혼녀입니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키안은 또다시 침대에 누워 있는 황제 윈슬러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의식을 되찾지 못한 황제는 세이란의 말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키안이 대체 왜 그러느냐는 표정으로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그 단호함에 키안은 입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세이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폐하. 그러니, 이번엔 폐하의 차례십니다. 폐하께서도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약속이라고? 그럼 황제 폐하가 쓰러지기 전에 두 사람은 뭔가를 약속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키안은 떨림을 멈추기 위해 세이란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세이란 역시 손에 힘을 주더니, 그의 옆으로 키안을 끌어당겼다.

“전하!”

“그런 얼굴 할 필요 없다. 폐하껜 우리의 계획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것뿐이니까.”

“아, 네. 폐하는 아셔야 하니까요.”

키안은 그제야 자신이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세이란의 가짜 약혼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말 바보 같아. 그의 말에 진짜로 심장이 두근거리다니.’

키안이 참았던 숨을 천천히 뱉어냈다. 그러자 가슴 가득 차올랐던 어떤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너 혹시 진짜라고 생각한 것이냐?”

“네? 아닙니다.”

키안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세이란이 찬찬히 키안의 얼굴을 살폈다.

“뭐야, 정말 실망이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잖아.”

세이란이 재미있다는 듯 키안을 놀렸다.

“아닙니다. 너무 놀라서 그런 것뿐입니다.”

키안의 변명에 세이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여인이었다면, 난 너를 내 비로 맞아들였을 거야. 지금껏 이렇게까지 날 뒤흔든 사람은 너밖에 없었거든.”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의 속삭임이 가슴에 스며들자 눈물이 날 것처럼 코끝이 찡했다.

대체 왜 그런 거지? 왜 목구멍이 타는 듯 뜨겁고 아릿한 것인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

“넌, 싫으냐? 나와…….”

“행복할 겁니다.”

목이 꽉 조여 키안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다행히도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그래?”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짙어졌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키안의 심장이 아릿했다. 차마 키안은 그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어 고갤 숙였다.

“전하와 결혼하는 레이디께선 말입니다.”

자신이 여인이라고 해도, 그의 옆자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유스타나 제국에서 성별이 다른 쌍둥이로 태어난 이상, 키안은 절대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은 레녹스가의 저주받은 아이일 뿐이었다. 키안의 등에 있는 검상이 욱신욱신 아팠다.

‘또 잊고 있었다, 등에 있는 불행의 흔적을.’

세이란의 시선이 느껴졌다. 따갑고도 강력한 시선이. 그리고 자신의 손을 붙잡은 세이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손이 부러질 정도로 아팠지만, 키안은 비명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견뎠다.

“정말 지독해.”

세이란의 서늘한 목소리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하지만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녹색 눈동자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래서 네가 좋은 모양이다, 키안.”

눈가가 뜨거웠다. 키안은 애써 감정을 억누른 채,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침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여명이 그를 비췄다.

아름다웠다. 손을 뻗어 그를 붙잡고 싶을 만큼.

**

마차에서 내린 키안은 손을 뻗어 벨라가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벨라는 귀족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키안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로이스톤 자작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이 키안과 벨라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레녹스 공작님과 아키텐 공작부인 아닌가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요. 두 분이 애인 사이라는 그 소문 말입니다.”

두 사람의 등장에 귀족들 사이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 귀족들을 보며, 키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귀족들의 화법은 참 이상했다. 몰래 하는 비밀 얘기가 다른 사람의 귀에까지 똑똑히 들리는 걸 보면.

“불편하신 건 없으셨습니까, 아키텐 공작부인?”

키안은 예의 바른 태도로 벨라의 손을 놓았다.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레녹스 공작님. 파티가 벌써 시작된 모양입니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키안이 벨라를 에스코트해 로이스톤 자작가로 들어갔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귀부인을 비롯한 레이디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벨라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멋진 분을 애인으로 두다니. 처음으로 미망인이란 신분이 부럽네요.”

“제 말이요.”

“그런데 그 소문 들으셨어요?”

“소문이라니, 뭔데요?”

“레녹스 공작님 말이에요.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몸에 아주 큰 흉터가 있다고 하더군요.”

“네? 저는 그런 소문은 처음 듣는군요. 자세히 좀 말해봐요.”

“그러니까 그게…….”

키안은 멀어지는 귀부인들의 목소리에 어깨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파티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모두가 잊고 있던 레녹스가의 불행한 사건에 대해 다시 끄집어내, 입방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다.

“신경 쓰지 마.”

키안이 고갤 돌리자, 벨라가 미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켜하지 않는 키안에게 파티에 참석하자고 부득불 우긴 게 후회되는 모양이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야. 다 잊었어.”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아직도 레녹스가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언급될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겉모습은 평소처럼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오래전에 생긴 검상은 자꾸만 욱신거렸다.

떨쳐 낸 척할 뿐, 떨쳐 낼 수 없는 족쇄였다. 키안에겐 검은 그림자였고, 심장을 좀먹는 독이었다.

잊고 싶었지만, 꿈속에서까지 키안의 목을 조르는 지독한 죄책감이기도 했다.

“레녹스 공작, 그댈 여기서 보게 되다니 의외군.”

키안이 고갤 들자, 에드윈 리치무트 공작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 역시 로이스톤 자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된 모양이었다.

“공작님께서도 초대장을 받으신 모양이군요.”

“그랬지. 하지만 파트너가 없어서 참석하지 않으려다…….”

“내가 파트너를 자청했지. 남녀 파트너라는 조항은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때 세이란이 음료 잔을 들고 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참석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키안이 고갤 숙이자, 세이란의 입매가 냉소로 비틀렸다. 그러곤 키안의 옆에 서 있는 벨라 아키텐을 보며 마땅찮은 얼굴을 했다.

“함께 올 사람이 있어서 내게 말도 꺼내지 않은 모양이군, 레녹스 공작.”

“아,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사실 세이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로이스톤 자작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로열 아카데미 시절부터 세이란은 로이스톤 자작에게 유독 차갑게 대했었다.

“그거야 전하께서 로이스톤 자작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배려심이 많은 레녹스 공작이 말도 꺼내지 못했을 겁니다.”

에드윈의 말에 세이란의 눈썹이 위포 치켜 올라갔다.

“나는 로이스톤 자작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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