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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42화 (42/139)

제 42 화

“왜 이게 안 되는 거지? 키안, 내가 하는 걸 잘 봐.”

벨라가 의자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아,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를 마시는 벨라의 표정에서 자연스럽게 기품이 묻어 나왔다. 키안은 벨라의 행동을 흉내 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공작새처럼 한껏 우아하게 움직여야 해. 이건 전쟁이야. 네가 기사로서 검을 들고 적과 마주한 것과 같다는 걸 잊지 마.”

“지금 나는 전쟁터에 나간 우아한 공작새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

키안이 한숨을 내쉬며 공작새가 깃털을 새운 것처럼 조금은 과장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벨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뭔가 너무 어색했다. 하지만 벨라는 도대체 뭐가 이상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키안의 행동엔 우아함도 기품도 느껴졌지만, 어딘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벨라는 키안의 행동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마음에 딱 와닿는 설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키안의 어색함을 단번에 날려 버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키안, 이렇게 상상해 봐. 네 손짓 하나에 수백 명의 귀족이 발아래 무릎을 꿇는 모습을 말이야.”

벨라는 찻잔 대신 옆에 놓여 있던 부채를 들어 얼굴의 반을 가리더니 요염한 눈빛을 했다. 그 모습에 키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파티에 참석한 레이디들이 다 그런 상상을 하는 건 아니지?”

키안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왜 아니겠어? 겉으론 우아한 척하느라 말을 하지 않을 뿐, 더한 상상도 한다고. 그러니 너도 한번 해봐.”

키안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벨라의 말이니 틀릴 것 같진 않았다. 키안은 부채를 들고는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대로 눈을 살짝 내리떴다. 그러자 벨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벨라, 어때?”

키안은 불안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벨라가 했던 것처럼 눈을 내리뜨며, 눈꺼풀을 깜빡였다. 하지만 벨라의 얼굴은 이미 절망적으로 변해 있었다.

“키안, 포기하는 건 어때? 전하께 말씀드려서 못하겠다고 해. 그게 좋을 것 같아.”

벨라의 말에 키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이상해?”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야. 난 네가 눈꺼풀에 마비 약이라도 뿌린 줄 알았다니까.”

“부채는 안 되겠어. 더 어색해.”

키안이 부채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벨라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키안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건 부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안 되겠어. 시간이 너무 없어.”

“벨라, 내가 흠 잡히지 않을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연습해야 하는지 말해줘.”

“흐음…….”

벨라는 잠시 생각이 잠긴 듯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고갤 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드레스를 입었을 때의 키안은 유스타나 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키안은 14년 동안 레녹스 공작가의 후계자로 살아왔다.

아무리 아름답고 타고난 기품이 있다고 해도, 이미 기사로서의 절도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이상, 레이디의 섬세함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한마디로 키안에겐 여인만이 갖는 섬세한 우아함이 없었다.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널 위해 냉정하게 말할게. 힘들 것 같아. 한 달이란 짧은 시간으론 14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을 버릴 수 없으니까.”

키안은 긴장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줘.”

“사랑을 해야 해.”

벨라의 대답이 너무도 엉뚱해 키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다짜고짜 사랑을 해야 한다 해서 당황한 건 사실이야.”

키안의 대답에 벨라가 피식 웃었다.

“너, 사랑해 본 적 없지?”

“넌, 있어?”

“당연히……. 없지. 대신 짝사랑은 해봤어.”

벨라가 짝사랑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셨어. 내가 데뷔한 해니까, 벌써 6년 전이었지만.”

“정말이야?”

키안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벨라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키안을 보았다.

“너도 알잖아. 전하께선 비주얼은 정말 최고라는 걸. 성격이 얼음처럼 차갑고 인간미라곤 전혀 없는 냉혈한이란 걸 그땐 몰랐거든. 그리고 유스타나 제국에서 황태자 전하를 짝사랑하지 않은 레이디들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걸?”

“그래서 지금은……?”

“당연히 아니지. 난 다정한 남자가 좋거든. 사랑을 나누다, 온몸이 얼어붙는 불상사는 피하고 싶기도 하고.”

벨라의 농담에 키안이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벨라는 세이란이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라 사랑을 나눌 때도 냉기를 뿜어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황실 기사단에 드레이크 경이라는 분 괜찮은 것 같더라.”

“드레이크 경? 혹시 마음에 있어?”

키안의 질문에 벨라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뭐야, 정말 마음에 있는 거야?”

“우연히 길에서 봤는데,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네가 보기엔 어때?”

드레이크는 모든 면에서 괜찮은 사내였다. 무뚝뚝하긴 하지만, 진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을 만한 사내였다. 생각해 보니, 벨라와 잘 맞을 것도 같았다.

“괜찮은 사내야. 만약 네가 원한다면, 자릴 마련해 줄 수도 있어.”

“싫어하지 않을까? 내 신분이 미망인이라…….”

벨라가 걱정이 된다는 듯 키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어.”

“그럼 부탁할게, 키안.”

벨라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며, 키안은 왜 그녀가 사랑을 해야 한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잔뜩 설레는 표정을 한 벨라는 예뻤다.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왠지 분위기가 한결 사랑스러워졌다.

‘사랑을 한다라…….’

키안의 머릿속엔 세이란이 떠올랐다. 그러자 심장 역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키안? 록시의 가면무도회에 갔던 건 어떻게 됐어? 거절했어?”

벨라의 질문에 키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쿵쿵 뛰던 심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벨라, 마음과 몸은 따로인 걸까?”

“그게 무슨 말이야?”

두서없는 질문에 벨라가 키안을 보았다.

키안은 망설였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답답했다. 그날 새벽 오두막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키안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과는 달리, 다른 사내에게 반응해 버리다니.

자괴감에 키안은 기사단에 출근도 하지 못했다. 세이란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키안 스스로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네 말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몸은 또 다른 사람에게 욕망을 느낀다는 거야?”

“응.”

벨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키안을 보며 말했다.

“키안, 혹시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게 된 거야?”

“뭐?”

“그렇잖아. 네가 전하께 욕망을 느꼈으니,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거잖아. 혹시 사랑을 하게 돼서, 욕망을 느낀 거야?”

“그런 건 아니었어.”

키안의 대답에 벨라가 그러면 뭐가 문제냐는 얼굴을 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어? 네가 계획했던 대로, 전하를 덮치지만 않으면 되잖아.”

벨라의 말에 키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한다면, 벨라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 테지?’

키안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벌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다.

“키안, 너 설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벨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벨라, 난…….”

“안 돼, 키안.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면 안 돼. 그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거야.”

벨라의 목소리에 담긴 두려움에 키안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잊고 있었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라도, 레녹스가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잔뜩 들떠서는.”

아니라고 했지만, 세이란의 진짜 약혼녀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레녹스 가문은 여전히 제국법을 어긴 상태고, 나는 여인의 몸이야.’

키안은 마음을 다잡았다. 세이란에게 향해 가던, 마음을 두꺼운 껍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벨라의 말처럼 자신이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황태자인 세이란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들켜선 안 되는 사람 역시, 세이란이었다.

“키안, 그 남자 만나.”

키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자 벨라는 더욱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키안, 만약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 남자 만나는 게 좋겠어.”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장인 아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법무대신인 리치문트 공작께서 들어계십니다.”

“들여보내.”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에드윈이 안으로 들어왔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세이란이 고갤 끄덕여 보이자, 아이크가 문을 닫고 나갔다.

“무슨 일이지?”

“테란국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사신단의 일부가 일주일 후에 키엘체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쫓기기라도 하는 건가?”

“네?”

“서두르는 이유가 있나 해서.”

무심한 듯 말하는 세이란의 한마디에 에드윈은 놀랐다.

“사실 일찍 키엘체에 도착하는 선발대에 테란국의 두 번째 공주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테란국엔 공주가 두 명이었던가?”

“그렇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테란국의 국왕이 두 번째 공주를 더 아낀다고 하더군요.”

에드윈의 설명에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문이 거짓인 모양이군. 테란국의 국왕이 자신이 아끼는 두 번째 공주를 사신단의 일원으로 유스타나에 보내다니 말이야.”

세이란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곤, 에드윈이 심각한 표정을 했다.

“설마 전하께선 테란국에 내란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두 번째 공주가 도망을 친 것일까요?”

에드윈의 질문에 세이란의 입가가 차갑게 비틀렸다.

“권력이란 언제나 매혹적인 독 같거든. 만약 그 매혹적인 열매의 주인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리치문트 공작, 루시타니아 상단의 루칸 백작에게 전갈을 보내는 게 좋겠다. 테란국에 사람을 보내야 할 것 같거든.”

세이란의 명령에 에드윈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이크가 차를 준비해 가져온 모양이었다.

“전하, 차는 다음에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가봐도 좋다, 리치문트 공작. 차는 나 혼자 마실 테니.”

에드윈이 고갤 숙인 후, 재빨리 문으로 걸어갔다.

“공작님, 차는?”

“나는 다음에 마셔야겠군, 바쁜 일이 생겨서.”

문을 연 에드윈이 아이크에게 말을 건넨 후 재빨리 자릴 떴다.

“공작님께선 바쁜 일이 생기신 모양입니다, 전하.”

“그런 것 같더군. 뜻하지 않은 손님이 키엘체에 도착할 모양이야.”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아이크가 책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폐하의 상태는?”

“여전하십니다. 그런데 전하께선 요즘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차를 마시던 세이란이 아이크의 질문에 고갤 들었다.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눈가의 그늘도 사라지셨고요.”

아이크의 말에 세이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언제나 예리한 검 날처럼 날카롭게만 느껴지던 그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눈매며, 입가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특히 레녹스 공작과 함께 있을 땐, 입꼬리에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그런가? 전쟁이 끝나서겠지.”

세이란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교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키엘체에 각국의 상인들이 들어와 거리 축제 같은 걸 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하지 않는 모양이지?”

“사흘 후입니다. 이번엔 루시타니아 상단과 데칸 상단을 비롯해 각국의 상단들이 최고의 물품을 가지고 로체 거리에 상점을 열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엔 전하께서 황태자비를 맞아들이신다는 공표까지 한 상황이라 그야말로 대규모의 상단이 꾸려질 것이라고 하더군요. 벌써부터 최고급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귀족들은 미리 상단에 들러 예약을 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아이크의 설명에 세이란은 그런 건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이었다.

“볼거리도 많겠지?”

“네? 아, 네. 유랑 극단이 항상 함께였으니, 올해도 왔을 겁니다.”

“그렇다는 거지?”

세이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보실 생각이십니까?”

“응, 올해는 함께 갈 사람이 생겼거든.”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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