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화
“헉, 헉!”
키안은 재빨리 숨을 골랐다. 그러곤 방 안을 살펴보기 전,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제길! 하인의 말처럼, 방문은 잠겼다.
‘잠깐, 그러고 보니 어떻게 이 방을 나갈 수 있는지는 물어보질 못했잖아?’
키안은 입술을 깨물곤 방 안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방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대신 한쪽 벽이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인지, 달빛이 방 안으로 들어와 어둡지 않았다. 그 순간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은은한 사향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 이 방에 있었다.
“록시의 가면무도회. 자정을 알리는 시계의 종소리가 멈추는 그 시각, 푸른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사람이 약속의 상대라고 쓰여 있더군.”
방 안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의 키는 무척 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그림자가 생겨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발밑까지 닿았다.
“저 역시 같은 내용의 편지를 진에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키안의 말에 남자는 말이 없었다. 침묵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분위기에 키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왜 마음을 바꾼 거지?”
“그땐 절실했던 것이, 한순간에 바뀌기도 하더군요.”
“단지 그것만으로 안 돼. 납득이 되지 않거든.”
남자가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키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남자의 태도가 너무도 거슬렸다.
“진의 말론 당신이 내 펫이 된다면, 내 말에 복종할 것이라더군요. 그런데 당신의 태도, 너무 무례하네요. 처음 보는 내게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키안의 지적에 남자가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역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건 너와 내 계약이 체결되었을 때의 일이다. 만약 내가 너에게 복종하는 걸 보고 싶다면, 계약을 받아들이도록 해. 난 상관없으니까.”
남자의 말에 키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의 거만한 태도에 한순간 계약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례하게 구는 남자를 자신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대체 뭐지? 내 안에 이런, 이상한 정복욕이 있었던 건가?’
키안은 남자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숨을 골랐다.
“당신 말고도 내 발 아래 복종을 맹세하는 남자들은 세고 셌죠. 그러니 그 목록에 당신의 이름까지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순간 남자가 픽하고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면을 쓰고 있다고 허풍을 치면 안 되지.”
그때 남자가 키안의 가면 아래의 얼굴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천천히 다가왔다. 마침내 키안 앞에 선 남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가면 아래, 붉은색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붉은 눈동자.”
키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 남자, 나 알고 있어.’
키안은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숨을 삼켰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의 붉은 눈동자는 사무엘 스텐호프를 따라갔던 용병 경매장에서 본 그 블랙이란 자의 것과 같았다.
‘설마, 약속 상대가 블랙이었던 건가?’
너무 놀라 키안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대체 이런 우연히 있다니. 키안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날 아는 모양이군.”
블랙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블랙. 용병 경매시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여인은 출입금지다. 금녀의 공간이지.”
그러곤 키안의 가슴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키안은 입고 있던 망토로 가슴을 가렸다. 굉장히 무례했지만, 이상하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곳에 들어갈 때, 옷을 벗겨보지 않으니까.”
“남장을 했다는 건가?”
“그건 네가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키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반말을 했다. 그러자 블랙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화가 났군. 혹시 내가 네 비밀을 건드리기라도 한 건가? 발끈한 모습을 보니 말이야.”
키안의 입매가 그대로 굳어졌다.
“그래서 협박이라도 하려고?”
“아니. 어차피 나 역시 비밀이 많은 자라서, 널 협박할 수도 없는 입장이지. 대신 흥미가 생겼다고 해야겠군.”
블랙의 붉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게 보였다. 분명 가면 아래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을 터였다.
“이제 이야긴 끝난 것 같으니, 난 돌아가야겠다. 어떻게 하면 이 방을 나갈 수 있는지나 알려줘.”
순간 블랙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나에게 똑같은 말을 한 귀족이 있었지.”
키안은 블랙의 언급에 긴장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날, 내가 길을 알려준 대가로 귀족나리에게 뭘 받았는지 혹시 아나?”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지. 그날은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무례하게 굴어줄 생각이었거든. 하지만 오늘은 달라.”
“질투라니? 대체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내 말은, 너에게 흥미가 생겼다는 거야, 주인님.”
순간 남자가 태도를 바꿨다.
주인님이라니. 키안은 놀란 눈빛으로 블랙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서늘하던 블랙의 눈동자엔 어느새 느른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아니야. 너와 계약할 생각 같은 건 없다.”
“늦었습니다. 이미 푸른 방에 들어선 순간, 계약은 성립이 되었거든요.”
“너, 뭐야? 갑자기 왜 말투가 바뀐 거지?”
키안이 눈을 가늘게 뜨곤 불쾌한 듯 말했다. 그러자 블랙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것이 규칙입니다. 주인님께 무조건 복종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규칙은 주인님을 만족시키는 것.”
똑똑똑, 똑똑똑!
키안의 시선이 재빨리 문 쪽으로 향했다.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키안은 긴장했다.
“널 찾아올 자가 있는 건가?”
블랙의 질문에 키안이 그를 쏘아보았다.
“없다.”
“그럼 긴장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당연히…….”
똑똑똑, 똑똑똑!
또다시 들려온 노크 소리에 키안은 주먹을 꼭 쥐었다.
덜컹, 덜컹. 이번엔 누군가 밖에서 문손잡이를 잡고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올 기세였다.
‘설마, 세이란 님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낭패였다.
“불안해 보이는군. 뒤쫓아온 애인에게 들키기라도 한 표정이야.”
블랙의 비아냥거림에 키안이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런 게 아냐. 난 애인 따위 없거든.”
“그럼 남편은?”
“남편 역시 없다.”
키안의 대답에 블랙은 만족스러운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럼 문제될 게 전혀 없군. 내가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자, 그럼 주인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또다시 블랙이 키안을 놀리듯 말을 높였다.
“명령을 내리라고?”
“네. 그러면 제가 주인님을 이 방에서 데리고 나가 드리죠.”
“네가 원하는 대가는 뭔데?”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규칙이란 말에 키안이 조금 전 블랙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블랙은 무조건 키안의 말에 복종을 할 것이라고 했었다. 그 정도라면, 별일은 없을 것 같았다.
덜컹덜컹, 다시 한 번 문이 크게 흔들렸다.
제길,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날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줘.”
키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블랙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깊어졌다.
“드디어 계약이 성립되었군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주인님.”
“알았으니, 제발 주인님이란 말은 쓰지 마.”
“알겠습니다. 그럼 뭐라 부를까요?”
“부르지 마. 아무것도. 그리고 말도 높이지 마. 더 기분 나빠.”
키안의 말에 블랙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문이 열릴 듯 덜컹거리는 문을 뒤로하고 블랙이 벽 쪽으로 걸어가더니, 카펫의 한쪽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달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설치되어 있던 작은 문을 들어 올렸다.
“이쪽이다.”
키안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방의 바닥에 비밀의 문을 설치해 놓다니. 키안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달칵 소리와 함께 푸른 방의 문이 열렸다. 열쇠를 들고 서 있던 하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방 안을 살폈다.
“가신 모양이군. 계획은 성공하신 건가? 요청대로 자정이 조금 넘으면, 문을 두드려 드리긴 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방이 텅 빈 걸로 보아, 비밀 통로를 이용해 함께 나간 건 맞는 모양이었다. 하인은 텅 빈 방 안을 다시 한 번 살펴본 후, 방을 나갔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