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화
“키안, 이 붉은 흔적은 뭐야?”
키안이 드레스를 입는 걸 돕던 벨라가 쇄골 부근에 난 붉은 흔적을 발견하곤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딜 말하는 거야?”
“여기 쇄골 부근 말이야.”
벨라가 손끝으로 키안의 쇄골 부근을 가리켰다. 고갤 숙여 벨라의 손을 따라 움직이던 키안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 바로 위를 가리키고 있는 벨라의 손에 멈췄다. 순간 키안의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으로 흔들렸다.
“어, 이건…….”
“뭔지 모르는 거야?”
“그게, 전하와 함께 사냥에 갔을 때 벌레가 문 모양이야.”
키안이 서둘러 손끝으로 붉은 흔적을 긁었다, 마치 벌레가 물어 간지럽다는 듯이.
“그래? 난 또 이상한 상상을 했잖아.”
“상상이라고?”
키안의 물음에 벨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곤 고갤 숙여 비밀 얘기라도 하듯 낮게 속삭였다.
“키스 마크 말이야,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 몸에 생긴다는 그것.”
“절대 아니야.”
키안이 다급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벨라가 피식 웃더니, 고갤 끄덕였다.
“그렇게 부정하지 않아도 돼. 당연히 알고 있으니까.”
키안은 벨라를 속이는 것 같아 뜨끔했다. 사실 몸을 씻으면서 확인한 것인데, 키안의 몸엔 목에 있는 붉은 흔적과 똑같은 게 몸 여기저기에 있었다. 처음에 키안은 그 흔적이 뭔지 알지 못했다. 정말 벌레라도 물렸나 하는 생각에 손끝으로 붉은 흔적들을 긁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이 유독 가슴과 아랫배 아래쪽에 몰려 있는 걸로 보아, 세이란이 만든 키스 마크란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또다시 키안의 아랫배가 움찔 떨려왔다.
‘하아, 음란한 건 나야.’
육체의 쾌락을 알게 된 이후 키안은 세이란을 생각할 때마다 몸이 뜨거워졌다. 정말 걱정이 될 정도였다.
“휴우, 사실 키안, 내가 요즘 음란마귀가 씌었나 봐. 자꾸만 야한 상상을 하게 돼. 나도 본격적으로 애인을 찾아야 할까 봐.”
“진심이야?”
“응.”
“벨라, 차리라 남편감을 찾는 건 어때?”
키안의 제안에 벨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갤 가로저었다.
“내가 미쳤어? 결혼을 다시 하게? 난 애인이 필요해. 지금도 충분히 자유롭고 좋지만, 가끔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뭔지 알고 싶기도 하거든. 그건 연애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벨라의 대답에 키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키안 역시 벨라의 남편이었던 아키텐 공작에 대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늙은 아키텐 공작은 여성 편력은 물론, 여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휘두르는 잔혹한 자였다. 벨라가 돈에 팔리듯 아키텐 공작과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키안은 로열 아카데미 기숙사를 빠져나와 아키텐 공작을 죽일까도 생각했었다.
“그럼, 네가 갈래? 록시의 가면무도회 말이야.”
키안의 제안에 벨라가 조금은 마음이 동한 듯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사실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비밀 관계는 싫어. 난 의외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집착하게 되거든. 그래서 상대와 합의하에 평생 애인으로 지내고 싶어.”
“합의하에 평생 애인으로 지낸다라…… 굉장히 이상적인 것 같아.”
“맞아. 그리고 난 남자는 자고로 근육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왕 애인을 만들 건데, 그쪽으로 날 기쁘게 해준다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벨라는 이젠 거리낌 없이 키안 앞에서 자신의 남자 취향을 얘기했다. 처음엔 얼굴을 붉히며 당혹스러워하던 벨라를 떠올리자, 키안은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벨라, 좋은 애인을 만들도록 해. 그럼, 난 다녀올게. 넌 저택으로 먼저 돌아가 있어. 늦을 거야.”
“아니야, 함께 갈 거야.”
벨라의 말에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벨라에게 세이란이 진이 건넨 편지를 봤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세이란에겐 가지 않겠다고 얘긴 했지만, 만에 하나 그가 록시의 가면무도회에 나타난다면 벨라와 함께 있다가 들킬 확률이 컸다.
당연히 거절을 위해 록시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지만, 그것 역시 용납하지 못할 성격이었다.
“키안, 미안해. 내가 진에게 전갈만 보내지 않았다면, 금방 끝났을 텐데 말이야.”
벨라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사실 세이란이 진에게서 온 편지를 불태워 버린 다음 날, 키안은 벨라에게 전갈을 보냈다.
진의 제안을 거절하는 편지를 보내달라고. 하지만 벨라는 이미 약속장소에 가겠다는 전갈을 진에게 보낸 후였다.
“아니야. 처음부터 진이 내게 한 제안이었어. 내가 직접 진에게 연락했어야 맞아.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
키안의 말에 안심이 된 듯 벨라가 고갤 끄덕였다.
“그런데 키안, 훈련은 언제부터 가능해? 사교 시즌이 시작되려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사실 완벽한 숙녀가 되기 위해선 차를 마시는 예법과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것쯤은 숙지해야 하거든.”
벨라의 말에 키안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실 드레스 아래 수많은 속옷을 입고 걷는 건,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묶고 훈련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부담감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미소를 지어야 한다는 건 고역이었다. 특히 요즘 레이디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부채 사용법은 정말, 고개가 절로 흔들어질 정도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시간을 내볼게. 기사단의 근무가 없는 날이 될 것 같아. 그래야 대부분 밤 시간이겠지만. 나 때문에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그건 걱정 마. 어차피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질리도록 가야 하는 게 파티니까.”
벨라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장을 하고 혼자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이 됐다.
“키안, 이제 가야 해.”
벨라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키안은 벨라가 건네는 망토를 입고는 머리에 뒤집어썼다. 손에 든 가면의 깃털이 손등을 간질였다.
“다녀올게, 벨라.”
**
세이란이 대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신전에 있던 신관들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 허릴 굽혔다.
“대신관은 어디에 있지?”
“지금 기도실에 계십니다. 일주일 전, 신탁을 받기 위해 기도실에 들어가신 후 지금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허릴 숙이고 있던 신관 중 하나가 재빨리 말했다.
“모셔 올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세이란이 방문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일주일 동안 기도실에 있었다던 대신관 도미니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이군. 만나지 못하고 가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참이었거든.”
세이란의 말에 대신관 도미니크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황제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 게 바로 대신관이었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세이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갤 숙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전하의 명령이 먼저입니다.”
도미니크의 대답에 만족한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도미니크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위에 있던 신관들과 신녀들을 물렸다.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하문하실 것이 있으면 하십시오, 전하.”
“그대가 대신관이 된 지 얼마나 됐지?”
“전 대신관께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신 후였으니, 올해로 21년이 되었습니다.”
“그럼 내가 태어났을 당시, 나에 관련된 신탁은 전 대신관에 의해 내려진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도미니크가 천천히 고갤 들었다. 세이란이 갑자기 전 대신관에 대해 궁금해하다니, 의외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 대신관에 대해 자신에게 물어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전 대신관의 행방은 당연히 모를 테지?”
“5년 전 사막의 오솔길에서 봤다던 자가 있었습니다. 초라한 행색이라 전 대신관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리에 매고 있던 매듭이 대신전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쳤다고 하던데, 아니었나?”
세이란이 떠도는 소문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도미니크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잠시 침묵했다. 그 역시 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 대신관께선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들 중 가장 뛰어나신 신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분에 비해 아주 미약한 능력을 갖춘 미천한 자입니다.”
“굉장히 겸손하군.”
세이란의 지적에 도미니크가 쓰게 웃었다. 사실 전 대신관이 갑자기 미쳐서 대신전을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절대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이 될 수 없는 자였다.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미 전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전 대신관의 행방을 찾고 계시는 것이구요.”
도미니크가 심각한 표정으로 세이란을 보았다.
“너도 본 건가? 아니, 신탁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세이란의 물음에 도미니크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제가 본 건, 유스타나 제국의 하늘에 뜬 낯선 별이었습니다. 천 년 전에 사라진 자의 별이더군요.”
도미니크의 말에 세이란이 한 발짝 그에게 다가왔다.
“대신관 도니미크, 그대에게 명한다. 네가 신탁으로 받은 것들은 내 명이 있을 때까지 함구한다. 만약 이것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면, 난 너를 맹세코 죽일 생각이다.”
세이란의 겁박에 가까운 명령에 도미니크가 고갤 숙였다. 두려웠다. 하지만 도미니크에게 더 두려운 건, 자신이 본 신탁의 내용이었다. 곧, 잠들어 있던 힘이 깨어날 터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유스타나 제국엔 천 년 전처럼 혼돈과 암흑의 시대가 올지도 몰랐다.
도미니크는 두려움을 감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맹세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대신전의 정보망을 가동해 전 대신관의 행방을 은밀히 찾도록 해.”
**
록시의 가면무도회에 도착한 키안은 진이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의 종소리가 멈추는 그 시각, 푸른 방의 문을 열어주세요. 라고 쓰여 있었어.’
키안은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푸른색의 문을 찾았다.
“푸른 문이라…….”
하지만,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은유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키안은 처음으로 참석한 파튬의 가면무도회와는 다른 록시의 가면무도회의 분위기에 놀라는 중이었다. 이곳은 너무 조용했다. 짙은 향수 냄새와 부채 너머로 들리던 레이디들의 교태가 가득 담긴 웃음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술에 취해 금방이라도 몸을 섞을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던 진득한 분위기가 없었다. 그때 음료를 든 하인이 복도를 따라 걸어왔다.
“혹시, 푸른 방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키안의 질문에 음료를 든 하인이 눈을 가늘게 뜨곤 키안을 바라보았다.
‘뭐가 잘못된 건가? 왜 날 바라보는 거지?’
키안은 순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 참석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그래서 굉장히 낯설군요.”
하인의 물음에 키안이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사실 이곳은 다른 가면무도회와는 다릅니다.”
“다르다면?”
“이곳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신분을 숨긴다는 면에서 가면무도회와 비슷하지만, 성격은 정반대입니다. 애인을 찾는 게 아니라, 비슷한 뜻을 가진 정치적, 문학적, 사상적 친구를 찾는 모임이거든요.”
하인의 설명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어쩐지 록시의 가면무도회에 들어선 순간부터, 파튬과는 다르다고 느꼈던 묘한 이질감이 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마치 로열 아카데미의 학술 동아리를 연상케 했었던 것이다.
“그럼 푸른 방은 뭘 의미하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푸른 방은 진실을 고백하는 방입니다. 각자 마음에 담아두었던 죄나 비밀을 고백하는 곳으로, 일종의 고해성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곳은 2층 맨 끝 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푸른 방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시작된 순간부터, 끝나기 전까지만 개방되는 곳입니다.”
하인이 키안을 향해 고갤 끄덕여 보인 후 재빨리 복도를 걸어갔다.
그제야 키안은 진이 보냈던 편지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춰 열렸다가, 닫히는 방이라니.
그 의미는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거절하고 푸른 방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키안은 고갤 들어 벽에 걸린 회중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되려면, 딱 1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서둘러야겠어.”
키안은 하인이 알려준 대로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따라 오르는 동안 키안은 긴장이 됐다.
다행스러운 건 세이란이 록시의 가면무도회에 온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계단 끝까지 올라간 키안은 중간에 서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난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끝 방이라고만 듣고 어느 쪽인지 듣지 못했다.
“제길, 서둘러야겠어.”
키안이 재빨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얄궂게도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키안이 뛰듯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곤 마지막 방의 문손잡이를 붙잡고 돌렸다.
“제길, 이쪽이 아니야.”
그때 또다시 종소리가 들려왔다. 키안이 드레스 자락을 붙잡곤 빠르게 왼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땡, 땡!
벌써, 여섯 번째 종소리였다. 키안은 마음이 급해졌다. 순간 말하지 않고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키안은 책임감이 너무 강했다. 약속을 깨뜨릴 순 없었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종소리가 들린 순간 키안은 끝 방 앞에 섰다.
숨을 돌릴 시간도 없이 키안은 방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 순간 열 번째 종소리가 들렸고, 키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열한 번째 종소리가 들렸다.
땡!
그리고 푸른 방의 문이 닫힌 순간, 자정을 알리는 열두 번째 종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