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37화 (37/139)

제 37 화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벨라가 아니라 펫숍의 주인인 진에게 온 초대장이었다.

“거절했어야 했는데.”

키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벌써 약속 날짜가 정해져 버린 것이다.

“제길, 직접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거절해야겠어. 아니, 벨라에게 전갈을 보내야겠어, 없던 걸로 하자고.”

키안은 초대장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는 서재를 나왔다. 방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벨라에게 받은 록시의 가면무도회의 초대장도 문제였지만, 키안을 가장 괴롭힌 것은 사무엘 스텐호프와 함께 갔던 용병 경매시장에서 본 블랙이란 자였다.

순간 키안은 불쾌감에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벽에 밀어붙여져, 그가 길을 알려주는 대가로 받아간 키스가 떠올랐던 것이다.

‘정말 불쾌한 자야. 하지만 실력 하나는 정말 뛰어났어.’

키안은 원형 시합장에서 경기를 하던 블랙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대체 누굴까?”

블랙이 누군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자 역시 사무엘 스텐호프처럼 귀족가의 차남일 수도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유스타나 제국에서 붉은색 눈동자가 특징인 귀족가가 있었던가?”

키안은 검은 가면 아래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강력한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전적으로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귀족가는 유스타나 제국에 없었다.

“설마 타국인인 건가?”

키안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타국에서 온 것이라면, 정말 위험한 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평범한 자는 아닌 것 같았어.’

사람을 압도하는 강한 카리스마는 분명 그가 신분이 높은 자임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키안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가 분명했다. 자신을 벽에 밀어붙이곤 입술을 겹쳐 왔을 때, 키안은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키안이 단검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방심했을 때였다.

“방심이라고?”

하지만 왜 그가 방심을 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남장을 한 자신을 여자라고 착각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벽에 밀어붙이곤 깊숙이 혀를 묻어왔다.

처음엔 그가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그건 자신이 그의 공간에 몰래 들어왔다고 생각해서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지? 처음 본 나에게 말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키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유를 생각하던 키안은 문득, 사무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면을 쓰는 이유가 얼굴에 있는 검상 때문이라고 했었다.

‘나에게 물었어, 자신을 고용할 생각으로 왔냐고.’

하지만 키안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태도가 확연히 바뀌었다. 설마 내가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몰래 숨어들었다고 생각했던 건가?

사실 자신 역시 등에 커다란 검상을 갖고 있었다. 유스타나 제국에서 상처를 지닌 자들에게 쏟아지는 멸시와 천대는 지독했다. 자신 역시 등에 있는 검상을 드러내는 일에 유난히 예민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무례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블랙이란 자에게 연민을 느꼈다.

“미쳤군. 이제 얼굴도 모르는 자에게 동정심을 느끼다니.”

키안은 이런 자신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몸에 상처가 있는 자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모두 연민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키안 레녹스, 이젠 내 명령을 어기는 게 습관이 된 모양이군.”

키안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로 인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무심코 고갤 든 순간, 키안은 움찔 몸을 떨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세이란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절대 그럴 리 없었지만, 블랙이란 자와…….

“왜 그래? 꼭 악마라도 본 얼굴이군.”

“아, 아닙니다. 갑자기 나타나시는 바람에 놀라서.”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자신을 쏘아보는 게 느껴졌다. 뭔가에 기분이 상했는지,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어딜 다녀온 거지? 여태까지 로베르트의 대장간에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세이란은 사냥터에서 키엘체에 돌아오면 대장간에 갈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로베르트의 대장간에 갔다가 우연히 스텐호프를 만났습니다.”

“스텐호프라면, 알렉산더 스텐호프의 동생을 말하는 모양이군.”

“네, 전하께서도 기억하고 계셨군요. 뭐, 이번 신입 기사단 중 검술이 가장 뛰어난 자라, 저 역시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의 눈매가 불쾌한 빛을 띠고 날카로워졌다.

“꽤 가까워진 모양이군. 넌 친하지 않으면 함께 있는 것조차 불편해하잖아.”

세이란의 지적에 키안이 얼굴이 어색한 듯 굳어졌다. 친해진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용병 경매에 함께 다녀온 후 그가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키안은 굳이 그 말을 세이란에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세이란은 자신이 사무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불쾌한 얼굴을 했다.

“친하진 않습니다. 그저 기사단의 일원이라 무시할 수 없었던 것뿐입니다.”

세이란은 키안의 변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전히 서늘한 얼굴이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나도 신경을 좀 써야겠군. 네가 무시할 수 없었던 자이니 말이야.”

세이란이 몸을 휙 돌려, 키안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이란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며, 키안은 고갤 갸웃했다.

세이란이 신경을 좀 써야 한다는 쪽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뭐지, 그 말은? 이젠 용건이 없으면 오지 말라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자꾸 황궁을 비우시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건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아버지께서 병석에 누워계시긴 하지만, 셀서스 궁의 주인은 폐하시니까. 한마디로 내가 어딜 가든 문제 될 건 없다는 뜻이야.”

그리고 마음이 내킬 때마다, 이렇게 예고 없이 아무 때나 레녹스 공작가에 오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키안의 대답에 그제야 굳어 있던 세이란의 표정이 풀렸다. 그러곤 키안에게 다가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너,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니요, 없습니다.”

“없는 게 아닌데? 그리고 입술을 왜 이래? 오던 길에 어떤 놈이랑 키스라도 한 거야?”

“네?”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키안이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러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애인이라도 생긴 것이냐?”

“아닙니다. 애인이라니. 절대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이건 대체 뭐지?”

순간 세이란이 키안의 겉옷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서재에서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밀어 넣었던 편지가 세이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도, 돌려주십시오.”

유독 당황하는 키안을 보며, 세이란이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너, 정말 좋아하는 레이디라도 생긴 거냐?”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세이란은 여전히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내 손에 있던 편지를 펼쳐 내용을 바로 확인했다.

“록시의 가면무도회라니. 너, 또?”

“이건 제 것이 아니라, 벨라의 것입니다.”

“그럼 이 밑에 쓰여 있는 진이란 이름은 뭐지? 아키텐 공작부인이 여인이라도 만난다는 거야?”

키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이란은 편지지에서 나는 달콤한 향수 냄새와 진이란 이름을 보고 당연히 여인에게서 온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쩌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세이란 님에게 편지를 보내온 진이 벨라와 함께 갔던 펫숍의 주인이란 사실을 말해야 해.’

아니, 그것보다 왜 펫숍이란 곳을 찾아갔고, 펫숍의 주인인 진이 왜 이런 초대장을 보내왔는지도 말해야 했다.

“왜 말이 없지?”

“나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 이 편지의 주인이 너인 건 맞는 건가?”

“진이란 레이디가 벨라를 통해 보내온 건 맞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건 태워 버려도 상관없겠군.”

세이란이 들고 있던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불꽃이 편지지를 삼켰다. 키안은 편지가 다 탈 때까지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편지를 불에 던져 버리던 세이란의 표정이 마치 질투라도 하는 듯 잔뜩 굳어 있었다.

“키안, 난 독점욕이 강하다.”

세이란의 목소리에 키안이 고갤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본적으로 여인을 좋아하는 건 맞다. 하지만 네가 내 약혼녀로 있는 한, 난 너에게 질투를 느낄 것 같아.”

“제게 질투를 느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유를 묻는다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할 수가 없다. 날 폭군이라고 속으로 욕해도 상관없다, 키안. 하지만 그래. 네가 다른 여인에게 연서를 받았다고 생각하자, 미친 듯이 화가 나. 네가 받은 연서들을 모두 불에 태워 버리고 싶을 만큼.”

그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키안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질투로 짙어져 있었다.

‘내 심장은 또, 왜 이렇게 뛰는 건지 모르겠군.’

키안은 주책없이 뛰는 심장을 꾹꾹 누르며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키안, 너는 어떻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다른 여인을 만난다면, 넌 어떨 것 같은지 궁금해져서.”

당연히 질투가 날 것 같았다. 그의 곁에 다른 여인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그에게 질투할 권리 따윈 없었다. 자신이 그를 속이고 있는 동안엔 절대 소유권 같은 건 주장할 수도 없었다.

“서운은 할 것 같습니다.”

“서운만? 질투가 아니라?”

“아마 질투일 겁니다. 하지만 그건, 남녀의 감정을 떠나 오랜 시간 전하와 함께해 온 친밀함에 대한 질투일 겁니다.”

무엇보다 세이란은 이번 사교 시즌이 끝날 때쯤 황태자비를 맞아들일 터였다. 그는 다른 여인의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키엘체로 돌아오면, 모든 게 끝이 나겠지?’

순간 키안의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쿵쿵 뛰던 심장이 가시가 박힌 듯 아릿했다.

질투라? 이건 질투의 감정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이미 키안은 질투보다 더 지독하게 그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키안은 주먹을 꼭 쥐었다.

‘언제 이렇게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걸까?’

의식하지 못한 사이 이미 세이란은 키안의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다른 여인의 남자가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 정도로.

“쳇, 나만 너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키안.”

세이란은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키안은 목구멍이 꽉 조여오는 아픔을 참아내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한 것 맞아? 네 표정만 보면, 네가 좋아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웬 생색이지? 하는 얼굴이거든.”

“아닙니다. 제가 감히…….”

이번엔 키안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한 발짝 키안에게 다가섰다.

“감히 부탁하건데, 키안. 다른 사람은 안 돼. 나만 봐. 네 눈동자 안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

그만 모르고 있을 뿐, 이미 키안의 눈동자엔 세이란으로 가득했다. 그건 14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다. 키안은 아름답고, 강한 황태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으니까.

“힘들까?”

“전하의 약혼녀로 있는 동안은 전하만 바라보겠습니다.”

당연히 그것만으론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세이란은 키안의 약속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약속했다, 키안.”

세이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키안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했으니, 도장을 찍어야겠군.”

장난스럽게 웃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또다시 미소를 짓더니, 키안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입을 맞췄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평범함 키스였다. 하지만 키안의 몸이 야릇한 열기로 떨려왔다.

좀 더 원한다고 조르고 싶을 만큼, 안타까운 키스였다. 키안은 스스로의 변화에 놀라 고갤 숙였다. 다행히 세이란은 키안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듯 놓아주었다.

“그럼, 내일까지 하루 더 쉬도록 해.”

“아닙니다. 출근할 생각입니다.”

키안의 대답에 세이란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괜찮겠어?”

“전쟁터에서도 멀쩡했던 저입니다. 감기 몸살 같은 건, 벌써 나았고요. 요즘 들어 제 자신이 너무 해이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키안의 표정이 어느새 서늘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입맞춤에 얼굴을 붉히더니, 이젠 그런 수줍은 모습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새 황실 기사단의 단장으로서의 위엄을 되찾고 있었다.

“키안, 곧 검술 시합을 열 생각이다.”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찮을 겁니다. 황실에서 기사의 숫자를 늘리면, 당연히 불안하게 여길 테니까요.”

“명목상 황태자비를 호위할 기사를 뽑는다는 단서가 붙을 테니, 문제는 없을 거야.”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어차피 세이란이 약혼을 하게 된다면, 미래의 황태자비를 호위할 기사단을 새로 꾸려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알고 내일 드레이크 경에게 바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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