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화
키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왜 두려움이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블랙이란 자의 붉은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살기를 드러낸 맹수와 눈이 마주친 느낌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야. 그것보다 이 느낌은……. 내가 그를 알고 있어. 절대 그럴 리 없는데, 내가 그를 알아.’
키안은 블랙이 고갤 돌릴 때까지 그의 붉은 눈동자에 사로잡혀 있었다. 만약 옆에 앉아 있던 사무엘 스텐호프가 어깨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자신이 숨도 쉬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정도였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단장님?”
“그래, 굉장하군.”
하지만 시합은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끝이 났다. 블랙이란 자와 시합을 한 용병의 실력이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블랙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날카롭고 정확했다.
주먹으로 복부와 다리를 공격당한 용병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시합을 계속하려는 듯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쉽지 않은 듯 결국 손을 들어 시합 중단을 선언했다. 시합을 지켜보는 동안 키안은 긴장으로 숨을 죽였다. 실력의 차이도 있었지만, 블랙이란 자가 워낙 강해 공격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시합이 끝나 버린 것이다.
키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블랙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무기 하나 없는 그였지만, 키안의 눈엔 온몸이 무기처럼 느껴졌다. 그는 위험한 존재였고, 또한 유스타나 제국의 기사단에 꼭 필요한 자이기도 했다.
“1년 전보다 실력이 월등히 좋아졌습니다. 타국의 비밀 사병으로 갔었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시합이 끝난 후에도 사무엘은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단장님, 블랙을 만나보실 겁니까?”
사무엘의 질문에 키안은 신중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스텐호프, 블랙이란 자가 가면을 쓴 게 마음에 걸려.”
키안의 대답에 사무엘 역시 납득한 모양이었다.
“황실 기사단이 되는 것인데,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건 가장 큰 단점이죠. 사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장님께선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조금 창백하십니다.”
사무엘의 지적에 키안이 별일 아니라는 듯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좀 답답해서. 스텐호프, 네가 괜찮다면 여기서 헤어졌으면 하는데.”
“아, 네. 제가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오랜만에 형과 만나기로 했거든요.”
사무엘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알렉산더 스텐호프를 가리켰다. 그러자 알렉산더 스텐호프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키안에게 허릴 숙여 예를 갖췄다.
“스텐호프 백작과 약속이 있었군. 그럼 내일 기사단에서 보기로 하지. 스텐호프, 오늘 고마웠다. 이런 곳에 데려와 줘서.”
키안이 건넨 감사의 말에 사무엘이 기쁜 듯 눈을 빛냈다.
“기사단에서 뵙겠습니다, 단장님.”
키안은 사무엘을 남겨둔 채,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관람했던 곳이 2층이니, 1층 정문으로 나가기 위해선 복도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키안은 좁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계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용병들의 비밀 경매가 이뤄지는 건물이어서인지 통로의 구조가 매우 복잡했다.
키안은 사무엘과 함께 왔던 길을 되짚으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은 조금 전 보았던, 블랙이란 자에게 향해 있었다.
‘눈동자가 붉었어. 어디서 분명 봤는데…….’
하지만 도무지 그게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어엇, 죄송합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키안은 마주 오던 사람을 보지 못해, 그와 부딪힐 뻔했다.
“조심해.”남자의 서늘한 목소리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검은색 가면 너머로 붉은 눈동자가 키안을 삼킬 듯 쏘아보고 있었다. 온통 검을 옷을 입은 사내에게선 위험한 냄새가 났다.
“블랙?”
무의식적으로 키안의 입에서 블랙이란 이름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블랙의 붉은색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그러곤 가면 아래 유일하게 보이는 입술이 냉소로 비틀리는 게 보였다.
“날 아는 모양이지?”
“조금 전 시합을 보았으니까.”
“그럼, 날 고용할 마음이 든 건가? 그래서 내가 있는 곳까지 친히 납시신 모양이군, 귀족나리께서.”
키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자신은 1층으로 내려갈 계단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었다.
“아니. 난 그저 나갈 길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어딘지 알려줄 수 있을까?”
“알려줄 수는 있지. 하지만 대가가 있는데, 괜찮나?”
대가라고? 순간 키안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그러곤 혼자서 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웬일인지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사람의 그림자라곤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제길, 정말 길을 잃은 모양이야.’
키안이 여러 개로 난 복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미로다. 그러니 괜한 힘 빼지 말고, 부탁해.”
블랙의 거만한 목소리에 키안이 고갤 돌렸다. 그러자 그는 벽에 몸을 기댄 채,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쉽게 길을 알려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좋아, 얼마가 필요하지?”
키안이 당연하다는 듯 동전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러자 블랙의 입가가 싸늘하게 비틀리더니,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했다.
“돈은 필요 없다.”
“돈이 아니면, 뭐지?”
키안의 말에 블랙이 서서히 키안에게 다가왔다.
‘설마, 나보고 한 대 맞으란 건 아니겠지?’
사실 블랙이 시합을 하는 동안 키안은 그가 굉장한 실력을 가진 자란 걸 알 수 있었다. 상대를 제압하는 힘은 물론, 경기장을 압도하는 그의 카리스마는 멀리 떨어져 앉은 키안조차도 숨을 죽이도록 만들었다.
그때 블랙이 키안 앞에 멈춰 섰다. 이상했다.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두려움이 들 정도였지만,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지금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그럼 결국은 돈인 모양이군.”
키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눈앞에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동전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내가 원하는 건, 이것이거든.”
그 순간 블랙이 동전 주머니를 든 키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쳇, 그럴 줄 알았…….’
지만, 아니었다. 순식간에 키안의 몸이 벽으로 밀어붙여지더니, 블랙이 고갤 숙여왔다.
“이 미친…….”
놈이란 말이 블랙의 입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내리누르는 사내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지독한 벽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이거야.”
키안의 입술을 깨문 채로 블랙이 비웃듯 말했다. 그러곤 놀라 벌어진 입술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혀를 얽어오는 농밀한 키스에 키안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키안이 블랙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이용해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블랙의 손이 키안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더니, 키안의 머리 위로 올려 고정시켰다. 체격은 물론, 힘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블랙이 살짝 고갤 숙여 더욱 깊숙이 혀를 얽어왔다.
“흣-”
숨이 막혔다. 뜨겁고 말캉한 혀가 목구멍 끝까지 밀고 들어와 키안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핥았다. 이빨로 그의 혀를 깨물려던 계획은 실행도 해보지 못한 채, 그에게 입술과 혀를 모두 내어주어야 했다.
턱이 경련을 일으켰다.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혀의 감촉에 처음엔 불쾌해 죽을 것 같았다.
낯선 자와 키스라니.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분노와 상관없이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아랫배에 나른한 열기가 확 치밀어 오르자, 키안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이런 자에게…….’
키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한 치의 틈도 없이 입술을 겹쳐 오던 블랙의 키스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른하게 혀를 얽고 빨아 당기는 건 여전했지만, 뭔가 굉장히…… 야릇했다.
처음에 느꼈던 불쾌감이 어느새 다른 감정으로 바뀌려 했다.
너무도 당혹스러운 감정이었다. 그 순간 정신이 든 키안이 발로 블랙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윽-”
소리와 함께 블랙이 키안에게서 떨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키안은 허리에서 단검을 빼 들어 블랙의 목에 겨눴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상황이 바뀌었다.
“실력이 제법이군. 한 달 뒤엔 원형 시합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어.”
블랙은 키안의 검이 목에 겨눠졌는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 상황이 굉장히 흥미로운 듯 붉은 눈동자가 짙어졌다.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태도였다. 아니면 키안의 위협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도 같았다.
‘제길!’
키안은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자신이 그의 목에 단검을 겨눴을 때, 분명 그는 피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속으로 욕설을 뱉어내며, 키안은 블랙의 목에 겨눴던 단검을 거둬들였다. 그러곤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안내해. 대가는 이미 치렀으니까.”
키안의 말에 냉소로 비틀렸던 블랙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경고하는데, 다신 이런 곳에 오지 마. 네가 올 곳이 아니다.”
그 말과 함께 블랙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키안은 웃기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다신 이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키안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그렇게 다짐했다.
**
“전하, 가셨던 일은 잘되신 겁니까?”
문이 열리자,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평소와 달리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오늘 경매에 참석한 용병들 중 한 명과 계약하기로 했다.”
“혹시 블랙이란 자입니까? 마지막에 시합에 나왔던 자인데, 그자의 실력은 그야말로 단연 최고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방을 나가시고 등장한 바람에 보지 못하셨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보신 모양이군요.”
“아니, 블랙이 아니라 블랙과 시합을 했던 자다.”
“그럼, 블랙이란 자는요?”
에드윈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번 용병 경매에 참석한 이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가 있다면, 그건 단연코 블랙이었다.
검술이나 창술 쪽엔 문외한인 에드윈의 눈에도 블랙은 황태자인 세이란과 키안 레녹스만큼이 뛰어나 보였다.
“그자는 신분이 불명확하다. 위험한 자일 수 있다.”
세이란의 지적에 에드윈이 시합장에 나왔던 블랙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더군요. 타국에서 온 자입니까?”
“그것 역시 모른다. 하지만 소문에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다고 하더군. 숨겨야 하는 과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자를 쓸 수는 없지.”
“아쉽습니다. 정말 아까운 실력을 가졌는데 말입니다.”
에드윈이 블랙이란 자의 실력이 굉장히 아까운 모양이었다.
“저기 전하, 그럼 저 블랙이란 자를 양지로 끌어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사실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있는 용병 경매에서 기사를 모집하는 것보단, 대대적으로 기사단을 뽑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대 말은 용병들을 대상으로 특별한 기사단을 뽑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이름을 걸고, 검술 시합을 개최하는 것만으로 수많은 실력자가 구름떼처럼 모여들 겁니다.”
에드윈의 제안에 세이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귀족들의 눈을 피해 비밀 기사단을 모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의 말처럼 공식적인 검술 시합을 통해 능력이 출중한 기사들을 발굴해 내는 방법 역시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비밀 기사단에 들어올 자들과는 은밀해 접촉하면 될 일이었다.
“괜찮은 방법이군. 드레이크에게 시켜 검술 시합을 추진해야겠어.”
**
“주인님, 오셨습니까?”
레녹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집사인 가브리엘이 키안을 맞았다.
코트를 벗어 건네자, 가브리엘은 키안의 코트를 받아 벽에 걸었다.
“카이우스는?”
“저녁 식사 후 유모인 에리스 님과 방에서 휴식 중이십니다.”
가브리엘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후 키안은 서재로 향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생각 없어. 로베르트의 대장간에서 가져온 상자는 받았겠지?”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참, 그리고 조금 전 아키텐 공작가에서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아키텐 공작가에서?”
“네. 그것 역시 서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내일 아침 6시까지 셀서스 궁에 가야 해. 늦지 않게 갈 수 있도록 말을 준비해 줘.”
“네, 주인님.”
키안은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벨라가 이 늦은 시간에 전갈을 보내오다니. 없던 일이어서 그런지 괜스레 걱정이 됐다.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키안의 눈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상자가 보였다. 그 상자를 보자, 키안이 마음이 또다시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키안은 로베르트 대장간에게 가져온 상자를 들어 레녹스 공작가의 비밀 금고 안에 밀어 넣었다. 카이우스의 생일까진 비밀로 할 생각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그 상자를 보자 자꾸만 마음이 답답했다.
비밀 금고 문을 닫은 후, 키안은 벨라가 보내온 편지를 확인했다.
록시의 가면무도회. 자정을 알리는 시계의 종소리가 멈추는 그 시각, 푸른 방의 문을 열어주세요.
-진-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