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화
5장. 용병, 블랙
“잘 있었나, 로베르트?”
키안이 대장간에 딸린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며 로베르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레녹스 공작님.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전쟁터에서 돌아오셨다고 하더니,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로베르트가 손질하던 검을 내려놓으며 키안을 반갑게 맞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로베르트.”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로베르트의 질문에 키안이 들고 있던 검을 그에게 건넸다.
“손 좀 봐줘. 손잡이 부분과 검의 결합부가 헐거워진 것 같아.”
키안의 말에 로베르트가 재빨리 검을 검집에서 빼내 조심스럽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도는 검날은 물론 섬세하게 조각된 검의 손잡이를 꼼꼼히 살피는 로베르트의 눈빛엔 찬탄이 서려 있었다.
“다시 봐도 명검입니다. 만들어진 지 천 년이 넘었는데도 이런 빛을 아직도 머금고 있다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니까요.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로베르트가 이번엔 검을 들어 햇빛에 비춰봤다. 그러자 햇빛을 흡수한 검날이 요요한 빛을 뿜어냈다.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로베르트는 다시 한 번 감탄을 한 후, 키안이 말한 대로 검과 손잡이의 결합 부분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손본 후에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레녹스 공작님.”
“부탁할게. 그리고 로베르트, 검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검이요? 공작님께서 쓰시게요?”
“카이우스가 곧 여덟 살이 돼. 생일 선물로 레녹스가의 문장이 새겨진 검을 선물하고 싶어.”
“카이우스 도련님께서 벌써 여덟 살이 되시는군요. 정말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모양입니다. 공작님의 아버님이신 전 공작님께서 레녹스가에 아들이 태어나셨다면서 절 찾아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찾아오셨었어?”
“네, 오셔서는 연신 웃으시면서 제게 검을 만들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나! 제가 정말 미쳤나 봅니다. 이러니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요. 그게 이제야 생각이 나다니. 공작님, 잠시만 여기 기다리십시오. 제가 공작님께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로베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더니, 레녹스가의 보검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후 작업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키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로베르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카이우스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께서 이곳을 찾으셨다니.”
키안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왜 이곳에 왔는지 짐작은 됐다. 레녹스가엔 사내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검을 만드는 게 전통이었다. 당연히 카이우스를 위해 검을 만들러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공작님. 여기 아버님께서 7년 전에 주문하신 검입니다.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서 제가 깜빡 있고 있었지 뭡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로베르트가 레녹스 공작가의 문장인 은빛 늑대가 새겨진 상자를 키안에게 건넸다.
“열어보십시오. 제 대장장이 인생을 건 역작입니다. 사실 검을 장식한 보석은 전 공작님께서 직접 가져오신 것입니다. 레녹스 공작가에서 가장 아끼시는 귀한 보석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베르트가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하지만 상자를 받아 든 키안의 얼굴은 전혀 기쁜 기색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카이우스에게 남겨주신 검인데 내가 먼저 확인할 순 없지. 생일날 직접 건네야겠어.”
키안의 말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실망으로 흐려졌다. 하지만 이내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저야 너무 늦게 전해 드려 죄송할 따름입지요.”
“로베르트, 잊지 않고 전해줘서 고마워. 얼마지?”
키안이 값을 치르기 위해 주머니에서 동전 주머니를 꺼냈다.
“이 검에 대한 가격은 이미 전 공작님께서 주문하시던 날 미리 치르셨습니다. 최고의 검을 만들어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로베르트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레녹스가의 보석까지 가져와 검에 장식을 해달라고 했다는데, 값을 치르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런데 카이우스 도련님의 검은 어떻게 할까요?”
로베르트의 물음에 키안은 손에 들려 있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여덟 살 생일에 줄 선물이 있는데 또 검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하다 말했다.
“만들어줘. 그건 내가 카이우스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완성이 되는 대로 공작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로베르트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후 대장간을 나왔다. 마차에 탄 키안은 손에 든 상자를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상자엔 레녹스 공작가의 상징인 은빛 늑대가 조각되어 있었다. 키안은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껏 잊고 있던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공작님, 공작저로 모시겠습니다.”
“부탁할게.”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 앉아 있는 키안의 표정이 복잡했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품인 건가?’
하지만 그 유품은 자신이 아니라, 카이우스를 위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은 없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함께 태어났지만, 축복을 받은 오빠와는 달리, 키안의 존재는 처음부터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으니까.
불길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조차 존재를 부정당하는 건, 가장 큰 상처였다. 그래서인지 자신은 삶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죽음 역시 두렵지 않았다.
무엇 하나, 자신의 것은 없는 삶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키안 레녹스의 삶은 내 것이 아니야. 오빠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뿐이야.’
서둘러 상자에서 시선을 거둬들인 키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말의 키엘체의 거리는 조금 한산한 느낌이었다.
“전하께서 사냥터에 더 있으라고 했던 말을 들을 걸 그랬어. 너무 조용하니,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
키안은 의미 없는 거리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모두 키엘체의 외곽에 있는 호수로 피크닉을 나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벨라 역시 오늘 호수에서 선상 파티에 초대받았다고 했었다.
무심히 키엘체의 거리를 바라보던 키안이 갑자기 마차를 멈춰 세웠다.
“공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키안이 마차에서 내리며, 마부에게 말했다.
“조금 늦을 거야. 가브리엘에게 마차 안에 있는 상자를 내 서재에 가져다 놓으라고 해.”
그 말과 함께 키안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사무엘 스텐호프, 오늘이 비번인 모양이군.”
“단장님?”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던 사무엘 스텐호프가 자신을 부르는 키안의 목소리에 놀라 휙 몸을 돌렸다. 그러다 뒤에 서 있던 키안의 팔을 툭 쳤다.
“어엇?”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갑자기 부르시는 바람에 너무 놀라…….”
“괜찮다, 스텐호프. 내가 너무 가까이 서 있었던 거니까.”
키안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사무엘 스텐호프가 키안의 팔을 놓아주었다. 조금 전 자신 때문에 넘어지려던 키안의 팔을 붙잡았었다. 그런데 너무 가늘었다. 분명 수년간 검술 훈련으로 근육이 붙었어야 할 팔은 여인의 팔처럼 말랑했다.
“죄송합니다, 평소엔 이렇게 서툴지 않는데.”
정말 놀랐는지, 평소 차분해 보이던 사무엘 스텐호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날 만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다.”
키안의 사무적인 말투에 사무엘이 머릴 긁적이며 고갤 들었다. 황실 기사단의 제복이 아니라, 튜닉에 코트를 입은 사무엘은 무척이나 어려 보였다.
“스텐호프, 올해 나이가 몇 살이지?”
“스물셋이 되었습니다.”
“전하와 같은 나이였군.”
하지만 세이란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다. 얼굴 나이가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세이란에겐 남들에게 없는 기품과 위엄이 있었다.
“그런데 단장님께선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셨습니까?”
사무엘이 마차도 없이 혼자 있는 키안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로베르트의 대장간에 다녀오던 길에 널 발견하고 내렸다. 조금 걸을까 하고 마차는 돌려보냈고.”
그제야 사무엘이 이 상황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럼, 이 시간 이후의 계획은 없으시다는 거네요.”
“뭐, 그렇지.”
키안의 대답에 사무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이 웃으니 더 눈에 띄는 얼굴이 되었다.
“사실 제가 가려던 곳이 있었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가려던 곳? 난 상관없지만, 폐가 되지 않을까? 미리 연락한 것도 아니라, 갑작스럽게 가는 건데 말이야.”
키안의 말에 사무엘이 고갤 가로저었다. 그러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평소라면 절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키안이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사무엘을 발견하고,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조금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로베르트의 대장간에서 나온 이후 자신을 내리누르는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동행하기로 하지.”
**
“사냥터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절 찾으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있었지. 하지만 오늘은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다.”
에드윈이 앞서 걸어가는 세이란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사냥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절대 말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비밀이란 건가?
“너무하십니다. 제 황금 같은 휴일을 방해하셨으면서,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다니 말입니다.”
에드윈의 지적에 세이란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키안 레녹스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에드윈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곳엔 왜 오신 건지나 말씀해 주십시오.”
에드윈의 요구에 그제야 세이란이 걸음을 멈췄다. 사실 에드윈은 세이란이 갈 때가 있다고 했을 때, 당연히 루칸 백작은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이곳은 번화가인 로체 거리에서 조금 빗겨난 주택가였다. 대체 왜 이런 곳에 세이란이 왔는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쓸 만한 용병을 살 생각이다. 오늘이 한 달에 딱 한 번 있는 경매 날이거든.”
세이란의 설명에 에드윈은 더 미궁에 빠진 느낌이었다. 용병에, 경매라니.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말들이었다.
“따라와. 내 설명을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이해가 더 빠를 테니까.”
세이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에드윈을 남겨둔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에드윈은 그런 세이란을 놓칠세라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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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있는 경기장 안을 둘러보았다. 내부는 규모 면에서 훨씬 작긴 했지만 로마 시대의 원형 경기장을 연상시키는 구조였다.
한마디로 검투사의 경기를 관전하듯, 1층에 있는 원형의 시합장에서 누군가 경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볼 모양이었다.
“놀라셨습니까?”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유스타나 제국에 용병들이 많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다. 유스타나에선 봉신을 비롯해 용병들을 뽑아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니까.”
사무엘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키안과 함께 원형 시합장이 가장 잘 보이는 2층 난간에 자릴 잡고 앉았다.
“곧 저기 밑에 보이는 원형 시합장에서 경기가 시작될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여 있는 중계업자들이 쓸 만한 용병을 뽑아, 귀족들에게 소개를 해주는 형태죠. 한마디로 이곳이 바로, 용병이 거래되는 경매시장인 겁니다.”
사무엘의 설명에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용병 시장이라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집 공고를 내서 뽑는 게 아니었나?”
“일반 용병이라면, 당연히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거래되는 용병들은 비밀 사병입니다. 그래서 직접 실력을 확인한 후에 가격을 책정하는 형태인 겁니다. 우리들은 그걸, 용병 경매라고 부르죠.”
“비밀 사병을 뽑는 용병 경매라는 것이군.”
“네. 잠시 후 경매에 나서는 용병 두 명이 원형 시합장 안으로 들어서면,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이 경기의 규칙은 딱 하나, 그 어떤 무기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분이고 뭐고 상관없이 오직 실력만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거죠.”
“굉장히 흥미롭군.”
키안이 처음으로 호기심을 드러내자, 사무엘이 조금 흥분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사실 오늘이 바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블랙의 경기가 있는 날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시합이라, 기대가 됩니다.”
“블랙?”
“네. 제가 블랙을 알게 된 건 용병이 되기 위해 이 무대에 섰던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땐 인정사정없이 패배했었죠.”
“뭐야, 너도 비밀 사병이었던 거야?”
“아니요. 전 블랙과 처음 시합을 한 후, 비밀 사병이 되는 건 포기했습니다. 제 목표는 오직 다시 한 번 블랙과 맞붙어 일방적으로 깨지는 경기가 아니라, 동등한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이기는 게 아니라, 동등한 경기였다니. 아마, 블랙이란 자의 실력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시합은 했고?”
키안의 질문에 사무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마치 세상이라도 다 끝난 얼굴이었다.
“제가 어느 정도 실력이 되었을 땐, 블랙은 경기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시합에 나오는 것 역시 1년 만입니다.”
“1년이라고? 그럼 그동안은 어디에 있었던 건데?”
“소문에 타국의 용병으로 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 기간이 끝나서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사무엘은 다시 블랙이란 용병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자,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사무엘의 모습이 마치 영웅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는 생각이 들자, 키안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단 말이지? 그럼, 황실 기사단에 들어오도록 설득해 봐야겠군.”
“진심이십니까?”
“당연하지. 네가 극찬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라면, 전하께서도 만족하실 거야.”
“하지만 문제는 블랙의 신분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블랙이 적국의 밀정이라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전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키안의 말에 사무엘이 고갤 끄덕였다. 그때 경기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시합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키안은 시합이 진행되는 동안 원형 시합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주먹만으로 실력을 겨루는 용병들의 경기는 거칠고 또 힘이 넘쳤다. 키안 역시 흥분으로 잔뜩 고무되기 시작했다.
“기술이 무척 다양하군.”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규칙과 목 위론 공격할 수 없다는 것 외엔 다른 제재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사무엘의 설명에 키안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시합을 지켜봤다. 그러는 동안 사무엘은 경기에 나온 용병들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이제 블랙의 차례입니다.”
사무엘이 몸을 바로 세운 후, 원형 시합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키안 역시 덩달아 긴장했다. 대체 블랙이란 자가 어떤 자인데, 시합장 안에 모인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그를 기다리는지 궁금했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시합장 안으로 들어왔다. 특이하게도 블랙이란 자는 입술을 제외하곤 검은색 가면으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몸 역시 검은 옷차림이어서인지, 그가 누구인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왜 블랙만 가면을 쓴 거지?”
“저도 소문만 들었는데, 얼굴에 큰 흉터를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흉터라고?”
“네. 단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유스타나 제국에선 흉터는 죄악이죠. 그래서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고용하려는 귀족들이 별로 없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블랙을 존경하는 용병들에겐 반가운 얘깁니다. 그를 이 시합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기회인 거니까요.”
한마디로 이 세계에선 블랙이란 자는 영웅인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어둠을 지배하는 어둠, 블랙.
그때 원형 시합장으로 올라선 블랙이 고갤 들었다. 그러곤 그의 시선이 이끌리듯 키안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단장님. 블랙이 저희 쪽을 보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잔뜩 흥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키안은 이상하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동자가 붉은색이야.”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