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34화 (34/139)

제 34 화

“레녹스 공작은 아직인가?”

식당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던 세이란이 옆에 서 있는 아이크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크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깊이 잠드셨는지,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카이우스는?”

“유모인 에리스와 함께 방에 계십니다.”

세이란이 고갤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올 필요 없다. 곧 식사를 할 수 있게 준비해 놔.”

세이란의 명령에 아이크가 고갤 숙였다. 식당을 나온 그는 키안이 머물고 있는 2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키안의 방문 앞에 도착한 세이란은 문을 두드리기 전 잠시 멈춰 섰다. 세이란은 긴장이 되는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휴우­”

깊이 숨을 내쉬고서야 그는 방문을 노크할 수 있었다.

똑똑,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는 문이 열리더니, 키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막 씻었는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전하.”

당연히 아이크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세이란이 문 앞에 있자 키안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네?”

놀란 키안이 얼굴을 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바보 같은 눈으로 보는 거야? 어젯밤에 늦게 방으로 돌아갔잖아. 그래서 피곤한 건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다.”

키안은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기억하시는 건가? 새벽까지 내가…….’

순간 키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뭐야, 너?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 다녀와서 피곤했던 게 아니었던 거야?”

세이란이 아무렇지 않은 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키안은 세이란의 눈을 피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그는 오늘 새벽에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전하께선 괜찮으신 겁니까?”

“나? 글쎄, 아침에 일어나니 알몸이더군. 뭐, 그거야 평소에도 알몸으로 자니 상관은 없지만, 좋은 꿈을 꾸었는지 온몸이 나른했다.”

“꿈이요?”

“그래. 밤새 꿈을 꾸었거든. 아마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서 먹은 액체 때문인 모양이야, 그런 이상한 꿈을 꾼 걸 보면.”

“무슨 꿈을 꾸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키안이 세이란의 안색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세이란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꿈이었다. 꿈속에 있는 여인이 누군지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날 세이란이라고 부르더군. 아주 다정하게 말이다.”

“딸꾹, 딸꾹.”

당황한 키안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이상하다는 듯 키안을 보았다.

“웬 딸꾹질? 들키기라도 한 것이냐?”

“네? 그게 무슨……. 딸꾹, 딸꾹.”

순간 세이란이 픽 웃었다. 그러곤 키안에게 다가오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해다.

“너 역시 나처럼 야한 꿈을 꾼 것 말이다. 우리 같은 약을 마셨으니, 똑같은 꿈을 꾸었을 것 같았거든. 어때? 내 짐작이 맞은 것이냐?”

심장이 널뛰기를 하듯 뛰었다. 세이란이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이 너무 의미심장하게 들려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역시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심장에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너 이제야 씻은 것이냐?”

세이란이 그제야 키안의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 막 씻고 머릴 말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항상 세이란에게 머릴 말리지 않는 것에 야단을 맞았던 터라, 키안이 재빨리 변명을 했다. 그리고 옆에 놓여 있는 타월을 집어 들었다.

“이리 줘.”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여기에 앉기나 해. 너, 피곤해 보여. 내가 너무 무리를 시킨 모양이야.”

“네?”

또다시 모호한 그의 말에 키안이 긴장했다.

“아픈 널, 사냥터에 데려왔잖아. 좀 더 집에서 쉬게 했어야 했는데, 내 욕심이었다. 키안, 오늘 키엘체로 돌아가면 월요일까지 하루 더 쉬도록 해.”

“아닙니다, 전하.”

“이건 명령이다, 키안 레녹스 공작.”

세이란의 단호한 목소리에 키안은 어쩔 수 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그가 앉으라고 했던 의자로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세이란이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세이란의 농담에 키안이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그런데 우리가 마신 그 액체 말입니다. 대체 뭘까요?”

“뭐긴? 그냥 오래된 물이겠지.”

“정말 그게 다일까요?”

“그럼 넌, 그 액체가 마법의 약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거야? 마신 자의 몸이라도 지켜주는?”

세이란이 어이없다는 듯 지적을 하자, 키안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사실 그런 기대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특별하지 않을까 생각은 했습니다. 그래도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서 발견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문득 어제 발견한 비밀 상자를 생각해 낸 키안이 세이란 쪽으로 고갤 휙 돌렸다. 그러자 키안의 머릴 말려주고 있던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키안은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너무도 매혹적이었던 것이다.

“왜 또 얼굴을 붉히는 건지 모르겠군. 너 설마,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건 아닐 테지?”

“아닙니다. 그게 구스타프 1세의 보물 상자가 떠올라서 그랬습니다. 당분간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그 상자에 어떤 힘이 있는지 모른 상태에서 귀족들에게 알린다는 건 위험 부담이 큰일이니까.”

세이란의 말에 키안 역시 고갤 끄덕였다. 불안했다. 사실 천 년 전 유스타나 제국에 전쟁이 일어난 것 이유 역시 강력한 힘을 가진 유스타나의 별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제가 된 구스타프 1세는 고대어의 주술인 유스타나의 별을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키안, 난 돌아가야 해.”

“그럼 저도 서두르겠습니다.”

“아니야. 넌 좀 더 있다가 오도록 해. 난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거든.”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그가 이곳에 없는데 사냥터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사실 저 역시 오늘 오후쯤, 로베르트의 대장간에 들를 생각이었습니다.”

“로베르트의 대장간에?”

“전쟁터에서 돌아오자마자, 검을 대장간으로 보내 손봤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시간을 놓쳤거든요. 그리고 몇 달 후면 카이우스의 생일입니다. 검을 선물한 생각입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그때 키안이 세이란이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와 있는 것을 보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아얏!”

키안의 손이 다가오자, 세이란이 반사적으로 키안의 손을 쳐냈다. 순간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

“아닙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었습니다.”

키안이 미안한 듯 고갤 숙이자,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서 네 손을 쳐냈던 게 아니다.”

“네?”

“싫어서가 아니라고. 네 얼굴을 보니, 키스가 하고 싶어졌거든. 하지만 넌, 드레스를 입었을 때뿐이라고 말해서 참고 있는 것이다.”

순간 키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세이란이 자신에게 키스하고 싶어 할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키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잠깐, 그런데 언제부터 세이란 님이 그런 걸 신경 쓰셨지?’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키스를 해왔을 때마다 키안은 항상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한 약속은 이미 무용지물이 아닐까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자꾸 그러면 키스한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 얼굴에 뻔히 보이거든.”

키안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에 또다시 픽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게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키안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도저히 안 되겠군. 이건, 네가 먼저 유혹한 것이다.”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키안의 턱을 붙잡곤 입술을 겹쳐 왔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 음란한 몸이 되어버렸나 봐.’

키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 세이란이 입술을 떼며 턱을 놓아주었다. 갑작스럽게 그가 멀어지자 키안이 눈을 번쩍 떴다.

농밀한 키스를 기대하고 있었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모습에 세이란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제 내 키스에 길들여진 모양이군. 눈까지 감다니 말이야.”

세이란의 놀림에 키안은 입술만 달싹였다. 아니라고 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부정할 수 없었다. 키안이 고갤 푹 숙인 채,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책임입니다. 자꾸 키스하시니, 제가 이상해진 겁니다.”

“뭐? 지금 뭐라고…….”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키안을 보았다. 조금 전 키안이 내뱉었던 말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못 들으셨으면 됐습니다. 그럼 전, 카이우스에게 가보겠습니다. 일찍 출발하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거든요.”

키안이 세이란을 남겨둔 채 서둘러 방을 나갔다. 마치 민망해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세이란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곤 조금 전 키안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이상해진 게, 나 때문이라고? 잠깐, 언제부터 키안에게 저런 귀여운 면이 있었던 거지?”

순간 그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눈빛 역시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황제의 독사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