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화
‘이 느낌은 뭘까? 뭔가 익숙한 기분이야. 전에도 와본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다니. 키안은 재빨리 고갤 가로저었다.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 와봤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익숙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좁은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던 세이란이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비밀의 방 입구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키안, 이 등 좀 들고 있어.”
키안이 재빨리 등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두 손으로 앞에 놓여 있는 벽을 힘껏 밀기 시작했다. 덜컹 소리와 함께 벽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키안은 밖에서 들어온 공기로 인해 들고 있던 등의 불꽃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
키안이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몇 발짝 들어가지 못한 채, 걸음을 멈췄다.
“맙소사, 전하. 여기 좀 보세요. 동굴입니다. 그것도 나무의 뿌리 아래 자리를 잡은 천연 동굴 말입니다.”
키안은 들고 있던 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동굴 안은 마치 이른 아침처럼 환했다. 키안이 고갤 들자, 동굴의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야광석입니다.”
그제야 키안은 왜 새벽 3시인지 알 것 같았다. 새벽 3시가 바로 유리창을 통해 달빛이 온전히 들어오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그로 인해 동굴 벽에 섞여 있는 야광석이 일제히 빛을 뿜어내는 구조였다.
“이런 걸 황실 사냥터의 건물 아래에 만들어놓다니. 구스타프 1세도 굉장히 독특한 분이셨던 모양이야.”
어느새 키안의 옆에 선 세이란이 고갤 들어 천장에 설치된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달빛이 동굴 안을 비추고 있었다.
“괴짜가 아니라, 낭만적인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낭만이라고? 말도 안 돼. 고서의 기록엔 구스타프 1세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황제라고 쓰여 있었다.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마법사는 물론, 여섯 가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을 죽인 인물이었거든.”
키안 역시 로열 아카데미 시절, 제국 역사 수업을 통해 유스타나 제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배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스타프 1세가 만든 비밀의 방을 보자, 어쩌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터에선 악마처럼 잔혹한 기사였을지 몰라도, 연인에겐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연인이라고? 하지만 고서의 기록을 보면, 구스타프 1세에겐 황후가 없었다. 다음 황제가 되신 구스타프 2세는 친혈육이 아니라,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 것이었거든.”
“이상합니다. 황제가 되셨는데도 황후를 맞아들이지 않다니 말입니다. 전하께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키안의 지적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구스타프 1세가 황제가 된 나이는 불과 서른 살이었다. 그런데 30년 동안 황후는 물론, 황비도 들이지 않았다니.
“네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군. 지금처럼 귀족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어쩌면 이 비밀의 방은 구스타프 1세께서 연인을 위해 만든 곳일 겁니다. 보세요, 전하. 천 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이곳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나무뿌리가 동굴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이곳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면에서 넌,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니까. 그럼 왜 자신의 연인을 황후로 들이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있겠어?”
“글쎄요. 저 역시 그게 가장 궁금합니다. 대체 왜 자신의 연인을 황후로 맞아들일 수 없었는지 말입니다. 전하, 저기에 뭐가 있습니다.”
동굴을 살피던 키안이 손으로 안쪽 벽을 가리켰다. 그러자 세이란 역시 키안이 가리킨 쪽으로 고갤 돌렸다.
“저게 뭐지? 돌계단 위에 뭔가 있어.”
돌계단은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듯 나무의 단단한 뿌리로 뒤덮여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려면, 나무뿌리를 피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키안이 툭툭 돌계단을 감싸고 있는 나무뿌리를 발로 찼다. 그러다 뭔가를 발견하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으로 나무뿌리를 떼어내던 키안이 흥분한 얼굴로 세이란을 돌아보았다.
“여기 돌계단에 유스타나 제국의 상징이 새겨져 있습니다.”
키안의 말대로 돌계단의 가장 아래엔 금빛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 달이 위치를 바꾼 듯 유리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돌계단의 꼭대기를 비췄다. 그러자 조금 전까진 나무뿌리가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던 곳에서 신비롭고 찬란한 푸른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걸 본 키안과 세이란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뭘까요?”
대답 대신 세이란이 성큼성큼 돌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곤 계단 맨 위에 도착한 그는 단검을 꺼내 나무뿌리를 잘라냈다. 나무뿌리를 다 잘라내자, 그곳엔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진 상자가 놓여 있었다.
키안과 세이란이 본 푸른빛은 상자의 중앙을 장식한 보석이 달빛을 받아 뿜어져 나온 빛인 모양이었다.
“이건, 마법사의 빛이다.”
마법사의 빛이라고? 하지만 그 빛은 천 년 전 유스타나 제국이 세워지면서 소멸된 금기의 힘이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마법사의 빛은 천 년 전 모두 사라졌다고 고서에 적혀 있습니다. 구스타프 1세께서 힘을 봉인한 순간, 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렸다고 역사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득, 키안은 그 역사서의 기록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있다, 키안. 하지만 이 빛을 무엇으로 설명할 거지?”
세이란이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달빛을 받지 않는 보석에선 순식간에 푸른빛이 사라졌다. 그러곤 다시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상자를 내밀자, 거짓말처럼 보석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달빛에 반응하는 마법이다.”
세이란이 상자에 새겨진 문자와 문양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상자에 새겨진 문자는 마법을 극대화시키는 주술이 분명했다.
“유스타나의 별입니까? 상자에 새겨진 이 문자 말입니다.”
키안 역시 아주 어렸을 적 레녹스가의 고문서 기록실에서 달빛에 반응하는 마법의 힘에 대한 책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땐 어려서 잘 알지 못했지만, 그 고서엔 제국 이전의 세계에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유스타나의 별’이 존재했다고 적혀 있었다.
“구스타프 1세께선 괴짜셨던 게 분명해. 이런 곳에 고대어인, 유스타나의 별을 새겨놓다니 말이야.”
“이것이 유스타나의 별이었군요.”
“그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자신이 파괴한 고대 마법의 힘을, 이런 곳에 남겨놓다니 말이야.”
세이란은 상자를 요리조리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상자를 열 수 있는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도 비밀 장치를 숨겨놓은 모양이군.”
세이란이 흥미를 잃은 듯 상자를 키안에게 건넸다. 그러곤 방으로 돌아가려는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번엔 계단 가장 마지막 부근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그사이 또, 달빛이 위치를 바꾼 모양이었다.
“보물찾기도 아니고 여기저기 많이도 숨겨놓으셨군.”
세이란이 단검으로 나무뿌리를 잘라낸 다음 붉은빛의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위로 올려 유리병 안에 든 붉은 액체를 흔들어보았지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뭘까요?”
“나도 궁금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만든 지 천 년이나 돼서 먹으면 탈이 날지도 모른다는 거야.”
“풋, 정말 전하께선 낭만이란 게 없다니까요. 이런 분이신데, 어떻게 유스타나의 레이디들께 인기가 많을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할 뿐입니다.”
“난 한 번도 날 좋아해 달라고 한 적 없다. 오히려 귀찮거든.”
“하지만 레이디들 앞에선 그런 표정 지으시면 안 됩니다. 실망할 겁니다.”
키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할 생각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키안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꾼 그를 보자, 덩달아 긴장했다. 아니, 어색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도 강렬해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어, 저기. 그런데 이 유리병에도 조금 전 보았던 문양이 새겨져 있네요. 여기 보십시오.”
키안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유리병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똑같았다. 키안이 유리병에 새겨진 문양을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갤 숙였다. 하지만 그 순간 세이란이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말릴 틈도 없이 입으로 가져가더니 액체를 마시기 시작했다.
“잠깐만, 전하. 지금 뭘 하시려고…….”
놀란 키안이 재빨리 세이란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유리병 안에 있던 붉은 액체의 반이 세이란의 목구멍 속으로 흘러들어 간 후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세이란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액체를 마셨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키안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세이란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다행히 몸에 반점이 나타난다거나, 두드러기가 나진 않았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제 쪽으로 고갤 숙여보십시오. 열이 나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키안이 그의 무모한 행동을 지적하며, 고갤 숙일 것을 명했다. 그러자 세이란은 순순히 고갤 숙여왔다. 키안은 재빨리 그의 이마에 손을 뻗어 열이 나는지 확인했다. 걱정한 것과는 달리 열은 없었다.
“열이 없어 다행입…….”
그 순간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는 키안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저 미소는 뭐지?’
라고 생각한 순간 세이란이 고갤 숙여왔다. 그러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아. 하지만 그렇게 걱정되면, 너도 함께 마시면 되겠군.”
뭐? 라고 생각한 순간, 세이란이 손에 들고 있던 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유리병에 들어 있는 액체를 입안에 모두 머금었다.
“잠깐만, 전하. 그건……. 윽.”
세이란이 키안의 턱을 붙잡곤 고갤 숙여왔다. 입술이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살짝 벌어진 키안의 입술 새로 미지근한 액체를 흘려보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키안이 그가 흘려보낸 액체를 입안 가득 물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는 키안을 보자, 세이란이 픽 웃는 게 보였다. 그러곤 매끄럽고 말캉한 혀로 키안의 입술 밖으로 흘러내린 액체를 핥아 먹었다.
“전…….”
키안이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자, 입안 가득 물고 있던 액체가 다시 흘러내렸다. 그러자 세이란의 입술이 다시 키안의 입술을 진득하게 핥았다. 그러곤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삼켜.”
그의 한 마디에 키안이 액체를 삼켰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맛이었다. 달콤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세이란의 혀가 다시 키안의 입술을 핥았다.
“지금 뭐하시는…….”
키안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려 하자, 세이란이 키안의 턱을 붙잡곤 다시 깊숙이 입술을 겹쳐 왔다.
“아깝잖아. 천 년이나 전에 만든 건데, 한 방울까지 다 먹어야지.”
“…….”
순간 키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진 천 년이나 지나서 탈이 날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아깝다며 핥아 먹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만하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습니다. 뱉어내십시오.”
“뭐?”
“너무 무모합니다. 뭔지도 알지 못하는데 함부로 마시다니. 만약 전하의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큰일입니다.”
키안은 불안했다. 자신이야 뭐, 상관없었지만 그는 유스타나의 황태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 폐하께서 위독한 상황에서 세이란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건 비상사태였다.
“왜 이렇게 무모하십니까? 전하의 몸은 전하만의 것이 아니라, 유스타나 제국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서 삼킨 액체를 뱉어내십시오.”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걱정으로 흔들렸다. 표정 역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찌푸려져 있었다. 세이란은 이렇게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키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똑같이 약을 마셔놓고는 제 몸보다 지금 나를 더 걱정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세이란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장에라도 키안을 품에 꼭 끌어안고는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맞추는 대신, 손을 뻗어 키안의 볼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걱정으로 화가 나 있는 키안을 달래기 시작했다.
“걱정 마. 별일 없을 테니까.”
“그럼, 이 액체가 뭔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알고 있다.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이 났다. 황실 비서에 구스타프 1세의 보물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거든. 위험한 건 아니니 안심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다신 그런 무모한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습니다.”
키안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자 세이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슬쩍 물어왔다.
“날 걱정한 것이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이란은 당연하다는 말이 이렇게 달콤한 말이란 걸, 처음 알았다.
“맞아, 당연해. 키안, 너 역시 내게는 당연한 존재다.”
키안은 대체 세이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걱정으로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인데, 세이란은 기쁜 듯 웃고 있었다.
‘그럼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날 놀렸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키안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리병에 든 액체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은 기뻤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채 바보처럼 군 걸 생각하자,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다.
표정에서 티가 난 걸까? 웃고 있던 세이란이 키안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가 난 건 아니지?”
“제가 감히 어떻게 전하께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그저 기운이 빠진 것뿐입니다.”
기분이 상한 게 분명한데도 키안은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었다. 세이란은 굳은 표정의 키안을 보며, 처음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 신경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인지, 더 난감했다. 그때 키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시간이 늦었습니다.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키안이 발걸음을 돌려, 비밀 통로의 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그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
두 사람은 서둘러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을 나왔다. 동굴의 문이 닫히자, 천장의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던 달빛이 사라졌다. 동굴 안은 다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