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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26화 (26/139)

제 26 화

‘어떡하지? 자릴 뜰 기회마저 놓쳐 버렸군.’

키안은 드레이크가 다가오길 기다리며, 우물가에서 몸을 씻는 기사들을 보았다. 키안과 눈이 마주친 기사들은 서둘러 고갤 숙였다. 키안 역시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지만, 몹시도 이 상황이 거북스러웠다.

사실 기사들이 몸을 씻는 장면은 자주 봐왔다. 하지만 어젯밤 진이 운영하는 펫숍에서 남자들의 물건을 본떠 만든 모형을 봐서인지, 다리 사이에 달려 있는 것들이 모두 모형 같았다.

‘참 이상하지? 남자들의 물건을 봐도 부끄럽다는 감정은 물론,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다니 말이야.’

키안은 자신의 무덤덤한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 어쩔 수 없는 건가?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왔으니까. 그때 대충 수건으로 몸을 닦고 겉옷을 걸친 드레이크가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다가왔다. 상사 앞이라 예를 갖추려는 모양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오셔서 놀랐습니다.”

“귀족회의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에 잠깐 들른 것뿐이다. 훈련이 끝나고 씻고 있던 모양이군.”

키안의 지적에 드레이크가 머릴 긁적이며 말했다.

“날씨가 덥다 보니. 이제 그만 끝내고, 모두 옷들 입도록 해!”

드레이크의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몸을 씻고 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키안의 시선이 사무엘 스텐호프에게 향했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그의 어깨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역시 검을 잘 다루는 이유가 있었어.’

키안은 사무엘 스텐호프의 근육을 보며, 휴가가 끝나면 창술 훈련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물에 젖은 바지를 벗던 사무엘 스텐호프와 눈이 마주쳤다. 사무엘은 키안과 눈이 마주치자, 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내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갤 숙였다.

‘흐흠, 사무엘이 제법이군. 지금까지 보았던 물건들 중 단연 으뜸이야. 기사들이 다 부러워하겠어.’

키안은 사무엘의 남성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참, 신기한 일이야. 다른 사람은 안 되고, 오직 세이란 님께만 반응하다니 말이야.’

키안은 사무엘의 물건에서 시선을 거둬들인 후 드레이크에게 남은 훈련 계획을 묻기 위해 고갤 돌렸다. 그 순간 연병장으로 들어서던 세이란과 눈이 마주쳤다.

두근! 잠잠하던 키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전하, 여긴 어떻게?”

제길, 심장만 뛰는 게 아니었다. 세이란의 시선이 얼굴에 닿자, 온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에 아랫배가 아릿했다. 나른하고 짙은 열기였다. 허리가 야릇하게 비틀리는 걸 참아내기 위해 키안은 숨을 삼켜야 했다. 그 확연한 반응의 차이에 키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레녹스 공작,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휴가 동안 기사단의 훈련 상태를 확인하지 못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해 들렀습니다.”

“훈련 계획을 확인하려면, 사무실에 가면 될 텐데. 여긴 왜 온 거지?”

세이란의 서늘한 말투에 키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투며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마치 자신이 오면 안 되는 곳에 왔다는 듯 질책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드레이크 경을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단, 최대한 빨리 훈련 계획서를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확인이 끝났으면, 서둘러 돌아가도록 해. 몸도 성치 않으면서, 돌아다니지 말고. 아레오, 단장님을 마구간까지 모셔라.”

분명 키안이 걱정돼 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묘하게 그의 말속에 가시가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뭐지? 나에게 화난 일이라도 있는 건가?’

키안이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 고갤 들었다.

“제게 화가 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왜 그런 말을 하지, 레녹스 공작?”

“조금 다르셔서 그렇습니다.”

“뭐가 다른지 난 전혀 모르겠군.”

세이란은 말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며, 퉁명스럽게 말씀하시는 것부터 다릅니다, 전하.’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키안은 고갤 숙였다.

“제가 잘못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때, 아레오가 키안에게 다가왔다.

“단장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키안은 혼자 가겠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삼켰다. 이럴 땐, 그의 신경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키안은 세이란의 명령에 따랐다. 하지만 아레오와 함께 마구간으로 가는 내내,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하께선 단장님이 걱정이 되시는 모양입니다. 사실 단장님께서 쓰러지시던 날, 저희도 놀랐지만 전하께서 가장 놀라셨거든요. 전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사색이 되시더니, 단장님을 직접 품에 안으시곤 연병장을 빠져나가셨습니다.”

“전하께서 정말 그러셨어?”

“네에, 저희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니까요.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전하께서 그런 얼굴을 하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아마, 그 정도로 전하께선 단장님을 아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레오의 말에 키안은 얼떨떨했다. 당연히 세이란이 자신을 안고 금원에 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색이 될 정도로 표정이 변했다니. 키안이 14년 동안 세이란 곁에 있었지만, 아레오가 말한 것처럼 행동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주책없이 왜 또 심장은 뛰는 건지.’

하지만 자신을 걱정해 이성을 잃은 세이란의 모습을 떠올리자, 얼굴에 열이 났다.

키안은 연병장은 나가기 전, 이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어, 날 보고 계셨던 건가?”

키안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갤 숙였다. 얼굴이 붉어진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키안은 서둘러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뭐야? 왜 또 돌아보는 건데?”

세이란은 멀어져 가는 키안의 등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별 뜻 없는 행동이었을 테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가 연병장으로 들어선 순간, 키안의 시선이 스텐호프에게 고정되어 있는 걸 본 순간 본능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처음엔 키안이 뭘 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물가에 가까워지는 동안 키안이 스텐호프의 다리 사이의 남성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 순간, 기분이 엿 같았다.

세이란은 고갤 들어 사무엘 스텐호프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저런 사내가 취향이었나?”

세이란은 집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우물가에 서 있던 키안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불쾌한 감정은 분명 질투였다. 하지만 문제는 세이란의 질투의 상대인 키안은, 자신이 질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길! 도저히 안 되겠군. 당분간은 우물가에서 몸을 씻는 걸 금지시켜야겠어.”

**

키안은 발밑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새끼 늑대를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날카롭지 않은 이빨로 키안의 신발을 물어뜯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신발을 물어뜯어선 안 돼.”

키안의 꾸지람에 새끼 늑대가 눈치라도 보듯 키안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비볐다.

“전하께도 어리광이더니, 나에게도 그러는 거야? 버릇이 나빠졌어.”

키안이 허리를 구부려 새끼 늑대의 목덜미를 쓸어주었다. 그러자 새끼 늑대가 분홍빛 혀로 키안의 손바닥을 핥았다.

“신기해. 숲에서 널 만났을 땐 내가 주인이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키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손바닥을 핥던 새끼 늑대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곤 고갤 갸웃하더니, 갑자기 문 쪽으로 뛰어갔다.

“헝님, 접니다. 카이우쯔입니다.”

발음이 서툰 카이우스의 목소리에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키안이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이미 문 앞에서 자릴 잡고 있던 새끼 늑대가 강아지처럼 꼬릴 흔들었다.

“영리하네. 벌써 카이우스의 발자국 소릴 알아채다니.”

키안이 새끼 늑대에게 칭찬을 한 후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잠옷 차림의 카이우스가 서 있었다.

“카이우스, 밤이 늦었는데 자는 것 아니었어?”

“내일이 되기 전에 꼭 헝님께 드릴 마뜸이 있떠서 와쯥미다.”

“저녁 식사 내내 종달새처럼 떠들어놓고선 또 할 말이 남았다는 거야?”

키안의 지적에 카이우스가 부끄러운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키안이 무릎을 꿇고는 카이우스의 작은 발에 손을 올려놓았다.

“차갑잖아.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빨리 뛰어오느라.”

급히 서두르느라 신발은 물론 양말도 신지 않은 모양이었다. 키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카이우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카이우스의 방으로 향했다.

“방까지 데려다줄게. 그때까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끝내야 할 거야.”

키안의 말에 카이우스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카이우쯔는 헝님과 사냥을 가고 시쯤미다.”

“사냥?”

“쯔증님께서 사냥이 승마에 도움미 된다고 하셔쯥미다.”

“마침 잘됐다. 휴가 동안 다녀오자. 그래, 이번 주말이 좋겠어.”

“정말이요? 정말 카이우쯔와 함께 사냥을 가는 검미까?”

“약속할게. 그러니 이제 침대에서 나오지 말고, 푹 자도록 해. 에리스, 카이우스를 부탁할게.”

키안이 방문 앞에 서 있던 에리스에게 카이우스를 건넸다.

“네, 주인님. 작은 도련님, 이젠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감기에라도 걸리시면 사냥은 물 건너간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치, 에리쯔는 단소리쟁이라니까.”

“작은 도련님께선 못 말리는 수다쟁이시죠.”

“그래도 헝님께서 사냥에 데려가 주신다고 했으니 괜차나.”

키안은 문을 닫기 전 에리스에게 고갤 끄덕여 보였다. 그러곤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새끼 늑대가 키안의 옆에서 걸었다. 그 모습에 키안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 내 호위기사라도 된 듯 행동하는군.”

“누가? 이 젖비린내 나는 어린 늑대가?”

키안이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문 앞에 세이란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 순간 키안의 다리에서 배회 중이던 새끼 늑대가 세이란에게 다가가 통통한 얼굴을 그의 다리에 비비는 게 보였다.

“젖을 뗀 지는 좀 됐습니다. 그리고 너, 네 주인은 나다. 잊지 마.”

키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새끼 늑대는 세이란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누굴 닮았는지, 눈치라곤 전혀 없는 늑대라니까.’

키안이 세이란과 새끼 늑대를 복도에 남겨두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젠 담을 넘고, 벽을 타고 제 방에 들어오시는 게 습관이 되신 모양입니다.”

자신의 지적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카이우스와 사냥을 간다고?”

키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 들어왔던 거지? 그런데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다니.

“저택 경계를 강화해야겠습니다.”

“그 말은 내가 허락도 없이 네 방에 오는 게 싫다는 뜻이군.”

키안은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저택엔 저 말고도 카이우스도 있습니다.”

“쳇, 변명도 마음에 들지 않게 한다니까.”

세이란이 뻔뻔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곤 의자에 앉더니, 키안의 손을 끌어당겨 맞은편에 앉혔다.

“그래서, 언제 갈 건데? 만약 간다면, 주말이 좋겠다.”

키안은 지금 세이란이 사냥에 대한 얘길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마침 키엘체 근교에 레녹스 소유의 사냥터가 있습니다. 주말에 카이우스와 함께 다녀올 생각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 황실 소유의 사냥터로 해, 내가 준비해 놓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한 달 넘게 집무실에만 앉아 있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거든.”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려고요?”

“당연하지. 널 혼자 보낼 순 없지 않겠어? 몸도 성치 않는데 말이야.”

세이란은 자신의 동행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7년 만인가? 우리 둘이 사냥터에 가는 것 말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부모님인 레녹스 공작 부처가 돌아가시기 전, 방학을 이용해 세이란과 함께 사냥터에 갔었다. 그 후론 방학 때마다 동생인 카이우스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사냥터에서 돌아오면서 세이란과 꼭 다시 오자며 약속을 했었다. 결국은 지키지 못했지만.

“기대돼.”

키안 역시 기대가 됐다. 7년 전 가보았던 황실 사냥터는 굉장히 신비한 곳이었다. 그리고 찾지 못한 구스타프 1세의 보물도 아직 그곳에 있을 터였다.

“이번에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을 찾을 수 있을까요?”

키안이 눈을 빛내며 처음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세이란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원한다면, 이번엔 꼭 찾도록 하지.”

자신만만한 표정의 그를 보며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발견한 게 분명했다.

“혹시 지도를 찾으셨습니까?”

“글쎄, 넌 어떨 것 같은데?”

당연히 찾은 게 분명했다. 평소의 서늘한 눈빛이 아니라, 모험을 떠나기 직전의 소년처럼 녹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금까진 잊고 있었거든요.”

“쳇, 괜히 찾았다니까. 넌 네 동생에게 붙잡혀서 우리가 했던 약속 같은 건 깡그리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너에게 보여주겠다고, 미친 듯이 사냥터를 헤매고 다니다니. 정말 억울하군.”

세이란의 말에 키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됐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사냥터를 헤매고 다녔을지. 그리고 지도를 발견했을 때, 자신에게 얼마나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하지만…….

‘난, 모두 잊고 있었어. 머릿속은 온통 카이우스와 내 어깨를 짓누르는 의무만이 가득했으니까.’

키안은 자신이 없는 방학을 세이란이 어떻게 보냈을지 궁금해졌다. 두 가지는 알았다. 사냥터에서 구스타프 1세의 지도를 찾은 것과 바레나 거리의 사람들과 친해진 것.

‘그다음엔 또 뭐가 있을까? 나 없이 혼자 한 일은.’

키안은 자신이 모르는 세이란을 진심으로 더 알고 싶어졌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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