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화
“죄송합니다, 저는…….”
“그러지 말고 앉으십시오. 전쟁터에 나가 계시는 1년 동안 뵙지 못해 안부가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제임스 에버콘이 환하게 웃으며 키안을 위해 테이블에 있는 의자까지 빼주었다. 티룸에 앉아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향했다. 이 상태에서 키안은 더 이상 제임스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제길!’
키안은 제임스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침착한 태도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러자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데칸 후작이 키안에게 고갤 숙여 인사를 했다.
“데칸 후작입니다. 레녹스 공작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개인적으로 만나 뵙고 싶군요. 언제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데칸 후작의 말에 키안은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런데 레녹스 공작님, 몸이 아프셨다고 하던데. 귀족회의엔 참석해도 되는 건가요?”
마치 제임스 에버콘이 걱정이라도 했다는 얼굴이었다. 키안은 유난히 친절한 척 행동하는 그를 보며,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친절이란 가식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건가?’
키안은 그가 졸업식이 있기 직전 벌였던 잔혹한 사건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이렇게 뻔뻔하게 신사인 척하고 앉아 있다니. 키안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사실 전하께서 정신을 잃은 레녹스 공작을 금원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답니다. 아, 이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당연히 전하께선 이 일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실 텐데 말입니다. 황실의 혈족이 아닌 자가 금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황제 폐하의 허락이 필요한데 지금 황제께선…….”
말끝까지 흐려가며 연기를 하는 제임스 에버콘의 모습에 진저리가 났다. 그는 분명 실수라고 했지만, 키안은 일부러 그 일을 꼬집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치가 떨리도록 가시적인 자였다.
“그 부분에 있어선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그러니 신경 써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키안은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그러자 제임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고갤 끄덕였다. 셀서스 궁에 떠돌던 소문이 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럼, 모두 온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해야겠군.”
세이란의 목소리에 키안은 제임스에게서 시선을 뗀 후, 중앙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와 시선이 마주쳤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걸로 보아 자신이 그의 명령을 어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하,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의 의중을 말입니다.”
아센 공작이 귀족들을 대신해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아센 공작은 귀족회의가 열리는 티룸으로 오기 전, 황태자인 세이란과 잠시 얘길 나눴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랑하는 레이디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전하께 그런 순정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있으셨다니.’
정말 충격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냉혹한 황제는 정복 전쟁을 통해 유스타나 제국에게 부와 명예를 줄 수 있지만, 인간적인 황제는 제국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그래야 제국민이 행복했다. 오늘에서야 아센 공작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이란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를 도울 생각이었다. 그때 세이란이 기다렸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뜸 들일 필요 없이 바로 말하는 게 좋겠군. 어차피 시간낭비일 테니까.”
세이란의 말에 귀족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대체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곳에 자신들을 불러 모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초대장을 받은 후부턴, 밤잠까지 설쳤었다.
“황태자비를 맞아들일 생각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현재 대신전에서는 국혼 준비에 돌입한 상태다. 대신관이 신탁을 받은 후, 약혼식을 먼저 할 생각이다.”
결혼이 아니라 약혼을 하는 이유는 티룸에 모여 있는 귀족들 역시 다 알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현 황제인 윈슬러는 원인불명의 병으로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가 깨어난 후에 결혼식을 치르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황태자 전하, 그럼 황태자비로 누굴 생각하고 계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이 질문을 할 사람은 렌스터 공작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세이란에게 황태자비에 대해 물어온 사람은 제임스 에버콘이었다.
“에버콘 공작, 나는 이번 사교 시즌에서 내 신붓감을 정할 생각이다.”
세이란의 대답에 티룸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들은 당연히 귀족회의에서 천거했던 다섯 명의 후보 중에서 한 명을 신붓감을 정할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말씀은 저희가 올린 신붓감 후보가 아니라, 다른 영애가 황태자 전하의 신붓감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렌스터 공작을 대신해 그 옆에 앉아 있던 해링턴 백작이 질문을 했다.
“그렇다. 다섯 명의 후보를 포함해서, 사교계의 모든 레이디가 그 후보가 될 것이다.”
세이란의 대답에 티룸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태자인 세이란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혼을 하겠다는 건 좋은 현상이었다. 그런데 황태자인 세이란이 직접 신붓감을 고르겠다니.
설마, 이미 마음에 둔 레이디라도 있는 걸까?
티룸 안에 있는 귀족들 중 키안과 에드윈을 제외하곤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혹시 전하께선 마음에 두시고 계시는 레이디라도 있으시는 겁니까?”
드디어 렌스터 공작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그의 얼굴엔 기대감과 함께 불안감이 혼재되어 있었다.
“있다.”
세이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키안은 세이란의 대답에 긴장했다. 손바닥에 땀에 배어 나오자, 재빨리 옷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세이란의 선언으로 자신은 빼도 박도 못하고 그의 가짜 약혼녀 역할을 해내야 했다.
‘내가 모두를 속일 수 있을까?’
키안은 귀족들 앞에서 자신이 연극을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벌써부터 이렇게 긴장이 되는데, 본격적인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난감하고 위험한 상황이 많아질 게 분명했다.
“레녹스 공작,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전하께서 마음에 두고 있는 레이디 말입니다.”
은근슬쩍 물어오는 제임스 에버콘의 질문을 키안은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행동으로 그에게 괜한 의심의 싹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에버콘 공작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전하께선 사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시거든요. 저라도 예외일 순 없습니다.”
키안은 단호한 표정으로 아는 게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제임스 역시 수궁을 한 듯 고갤 끄덕이는 게 보였다.
사실 유스타나의 귀족들이라면, 세이란이 얼마나 냉혹하고 지독한 완벽주의자인지 알고 있었다. 또한 절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역시. 그래서 그를 두려워했다.
“혹시 다른 레이디들에게도 기회는 있는 겁니까?”
해링턴 공작이 렌스터 공작의 눈치를 보며, 슬쩍 질문을 했다. 그러고 보니 해링턴 백작가에도 사교계에 데뷔한 딸들이 있었다.
“당연히 있다. 해링턴 백작, 그대의 가문에도 공평한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세이란의 대답에 또다시 티룸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운이 좋다면 이번 시즌에 사교계에 진출한 모든 레이디가 황태자비의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때 제임스 에버콘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곳에 모여 계신 귀족 앞에서 할 말이 있습니다.”
“말해도 좋다, 에버콘 공작.”
세이란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임스는 침착한 태도로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사실 저희 에버콘 공작가 역시 이번 사교 시즌 동안 공작부인을 맞아들일 생각이었다는 걸 알려 드립니다. 공교롭게도 전하와 경쟁 아닌 경쟁의 형태가 되긴 했지만, 전혀 의도된 바는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사교 시즌 동안, 에버콘 공작가 역시 안주인을 찾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에드윈이 눈살을 찌푸리며, 제임스의 의중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럴 생각입니다, 리치문트 공작.”
제임스가 자신의 생각이 확고함을 피력하자, 귀족들은 잠시 침묵했다. 유스타나의 황태자와 에버콘 공작은 황실의 유일한 혈족이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은 황위 계승 서열 1, 2위의 가장 높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중 누구와 결혼하더라도 행운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제임스 에버콘 공작까지 합세하다니. 올해 사교계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경쟁이 치열하겠군요.”
아센 공작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임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웃는 얼굴과는 달리 서늘했다. 평소 제임스 에버콘 공작이 심보가 비틀려 있다는 걸, 아센 공작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 근심이 커지시겠어. 이러다 전하께서 마음에 두고 있는 레이디를 에버콘 공작이 빼앗아 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야.’
아센 공작은 보지 않아도 제임스 에버콘이 어떤 짓을 벌일지 짐작이 됐다. 그는 황족이긴 했지만, 에버콘의 피 역시 흐르고 있는 자였다. 지금까지 에버콘 공작가는 끊임없이 황제의 자릴 욕심냈다. 질투와 시기심, 그리고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죽었지만 에버콘 공작이 현 황제의 이복누이인 샤론과 결혼을 한 이유 역시 자신의 가문에 황족의 피를 잇게 할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번 사교 시즌이 기대되는군. 사실 테란 국에서 승전국의 예를 표하기 위해 사신단을 보낸다고 하더군. 아마 그 시기 역시 공교롭게도 사교 시즌이 될 것 같아.”
“폐전국의 사신단까지 오면, 그야말로 축제겠군요.”
아센 공작이 즐거운 듯 말했다. 그 역시 아쉬웠었다. 황제가 병석이 누워 있다는 게 주요 이유이긴 했지만, 세이란이 1년간의 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도 황태자에 대한 승전 퍼레이드나 축하 파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에 걸맞은 이벤트를 해야겠군. 이번 사교 시즌의 첫 무도회는 셀서스 궁에서 열기로 하겠다.”
세이란의 선언에 귀족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 이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은 눈치였다.
분명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집으로 가기 전에 의상실과 보석가게에 들러 최대한 빠른 시간으로 예약 날짜를 잡을 터였다. 레이디들에겐 드레스와 장신구를 선점하는 것이야말로, 사교 시즌을 시작하는 첫 단계였다.
“내 얘긴 끝났으니, 돌아가도 좋다. 경들에게 갑자기 아주 바쁜 일이 생긴 것 같으니 말이다.”
세이란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임스 에버콘과 데칸 후작, 그리고 아센 공작을 제외한 귀족들이 재빨리 티룸을 나갔다. 체면 따윈 잊은 듯 문을 나가다 어깨를 부딪쳤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전하, 그럼 전 다시 한 번 대신전에 가봐야겠습니다. 신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부탁하겠습니다, 아센 공작.”
아센 공작이 티룸을 나가자, 제임스와 데칸 후작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세이란에게 고갤 숙였다. 그러곤 옆에 앉아 있는 키안을 보며 말했다.
“레녹스 공작, 이번 사교 시즌엔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에버콘 공작님.”
키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흠잡을 곳 없이 예의 바른 태도였지만, 키안의 표정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제임스 에버콘은 아키데미 시절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데칸 후작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녹스 공작, 그대 자린 여기다.”
그때 세이란이 키안을 불렀다. 그러자 키안이 두 사람에게 목례를 하고는 서둘러 세이란과 에드윈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레녹스 공작, 가브리엘이 말하지 않았나? 몸이 회복될 때까지 침실 밖으론 절대 나와선 안 된다는 명령 말이다.”
“그 얘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귀족회의의 초대장을 받은 이상,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이란은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키안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었다.
“쳇, 내 잘못이다. 초대장을 보내라고 명령했을 때, 레녹스 공작가로는 보내지 말라고 했어야 했거든.”
세이란의 말에 에드윈이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제 생각엔 오늘 이 자리에 레녹스 공작이 참석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난 1년 동안은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 것이지만, 키엘체로 돌아온 이상 회의에 참석하는 게 의무입니다. 무엇보다 귀족회의 규칙상 다섯 번 이상 참석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의결권이 정지됩니다.”
한마디로 세이란에게 표를 몰아줘야 할 경우, 키안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레녹스 공작이 금원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셀서스 궁은 물론 사교계에 돌고 있습니다. 분명 로열페이퍼에서도 이 내용을 다루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처벌을 면하진 못할 겁니다.”
“금원에 들어간 건, 키안의 선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내 결정이었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은 법입니다.”
법무대신답게 에드윈은 냉정하게 말했다. 세이란은 뭐라고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에드윈의 올곧은 성격을 알기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렇다고 키안을 금원으로 데려간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키안의 비밀을 지키는 동시에 열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처벌 역시 그리 중하지 않을 테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리치문트 공작님?”
키안이 법무대신인 에드윈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에드윈이 고갤 끄덕였다.
“이번 사교 시즌 동안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정도일 겁니다. 뭐, 어차피 레녹스 공작은 파티엔 관심도 없으니 문제 될 건 없다고 봅니다.”
에드윈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금원을 출입한 벌이 그 정도라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세이란은 작은 벌이라도 키안이 받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녹스 공작,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
세이란이 당연하다는 듯 키안의 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키안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혼자 돌아가겠습니다. 리치문트 공작님, 전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레녹스 공작, 기다려.”
세이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키안은 서둘러 티룸을 나왔다. 분명 두 사람이 자신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게 뻔했지만, 세이란이 팔을 붙잡는 순간 온몸이 달아올라 도무지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젯밤 일로 인해 아직까지 세이란을 보는 게 껄끄러웠다. 그가 당장에라도 남자인 자신에게 육체적인 욕망을 느낀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얘길 듣고 나면,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신 역시 세이란을 원한다는 사실을. 지금은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피하는 게 상책인 것 같았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키안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신, 황실 기사단의 연병장으로 향했다. 이왕 온 김에 기사단의 훈련 모습을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단장님, 여긴 어떻게?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전하께서 그렇게 모시고 가신 후로 갑자기 휴가라고 하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연병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레오가 키안을 발견하곤 헐레벌떡 뛰어와 걱정의 말을 쏟아냈다. 키안은 그의 말을 들으며 아무도 없는 연병장을 살폈다. 하지만 아레오의 손엔 창이 한 아름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기사들의 훈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드레이크 경은 어디에 있지?”
“아, 훈련하시느라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셔서, 지금 연병장 뒤에 있는 우물가에 계십니다.”
아레오의 말에 키안이 서둘러 우물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드레이크에게 신입 기사들의 훈련 결과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기사단의 임명식이 있던 날, 제대로 식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다.
첨벙, 첨벙.
우물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갈수록 물소리 역시 들려왔다. 훈련했다고 하더니 땀을 씻어내는 모양이었다.
“드레이크 경, 훈련을 했다는…….”
키안은 코너를 돌아선 순간 걸음을 멈췄다. 우물가는 그야말로 노천 목욕탕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훈련으로 땀을 흘린 기사들은 웃옷은 물론 바지까지 벗어던지고 몸을 씻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몇몇은 바가지로 상대에게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이 자릴 비운 동안, 기사들의 기강이 조금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단장님!”
그때 드레이크가 키안을 발견하고 재빨리 수건을 들고 뛰어왔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