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화
키안이 드레이크에게 검을 빌렸다. 자신의 검은 이미 세이란에게 빌려준 것이다. 키안이 시합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언제 왔는지 그가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무리할 필요 없다.”
분명 자신을 배려한 행동이었지만 키안은 세이란이 자신을 부서질 것처럼 조심조심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태도가 마치 자신을 여자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신경이 거슬리는지도 몰랐다.
‘삐뚤어진 자격지심이 분명해.’
하지만 한 번 배배 꼬이기 시작한 마음은 세이란이 마음을 쓰면 쓸수록 더 꼬여 땅굴 속으로 파고들어 갈 지경이었다.
키안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못나게 구는 자신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준비되었습니다.”
키안이 검을 들어 올리며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세이란이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순간 키안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눈빛 역시 차갑게 변했다.
챙, 채챙!
평소보다 날카롭게 파고는 키안의 검을 보며, 세이란의 표정 역시 변했다. 걱정이 됐다. 창백한 얼굴은 물론, 이젠 열이 나는지 하늘빛 눈동자가 짙어져 있었다. 하지만 키안이 아프다고 봐줄 순 없었다.
분명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존심이 강한 키안은 더욱 집요하게 공격을 해올 터였다.
‘몸이 아파, 평소보다 더 예민해진 모양이군.’
마음 같아선 키안에게서 검을 빼앗은 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곤 검술 시합 같은 건 당장 취소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연병장에 모여 있는 자들은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였다. 그 말은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키안의 사람이란 뜻이었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기사단장인 키안의 권위를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릴 순 없었다. 세이란은 사무엘 스텐호프 때와는 달리 진심으로 상대했다.
키안의 검술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 대충대충 할 수도 없었지만, 상대가 진심일 땐 진심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챙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허점을 찾아 빠르게 움직이는 키안의 검술은 상대를 뒷걸음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기사들에 해당되는 말일 뿐, 자신보다 뛰어난 세이란을 상대론 무리였다.
“하아, 하아.”
키안이 거친 숨을 내쉬며 세이란을 응시했다. 다른 기사들과의 시합에선 호흡 하나 흩뜨려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의 시합은 차원이 달랐다. 뛰어난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그와 검을 마주한 채 눈을 마주할 때면 순수한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 상대를 두렵게 하는 힘을 그는 갖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키안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마지막 공격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에겐 공격할 빈틈이 없었다.
제길! 키안이 거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숨을 내쉰 순간, 세이란의 검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막을 새도 없었다.
“윽-”
날아든 날카로운 검을 피하기 위해 키안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기증으로 인해 머리가 핑 돌았고, 키안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침내 승부가 난 것이다.
“와아아아!”
“유스타나에게 영광을. 황태자 전하에게 충성을.”
키안의 상태를 모르는 기사들의 입에서 우렁찬 함성을 쏟아냈다. 그 함성 소리를 들으며, 키안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티느라 안간힘을 썼다.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넘어지는 추태를 보일 순 없었다.
그때 강한 손이 자신의 팔을 붙들었다. 고갤 드니, 세이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열이 나잖아.”
세이란이 무섭게 쏘아보며 손을 들어 키안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놓아주십시오. 괜찮…….”
“고집은. 몸 상태가 이런대도 검술 시합을 하겠다고 버티다니. 드레이크, 임명식은 이것으로 끝낸다.”
세이란이 드레이크를 비롯해 황실 기사단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환호하던 기사들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키안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직접 데려가면 돼.”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당연하다는 듯 키안을 두 팔로 들어 올렸다. 놀란 드레이크가 재빨리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됐대도. 내가 해.”
세이란이 차가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드레이크는 세이란의 차가운 서슬에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섰다.
“전하, 내려주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당황한 키안이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무섭도록 서늘한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이 불덩이다. 그러니 제발 입 좀 다물어.”
“죄송합니다.”
키안의 힘없는 목소리에 날카롭던 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쳇, 내가 너 때문에 속이 새까맣게 타는 줄 알았다.”
날 걱정했다는 건가? 키안은 흐려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때문에 임명식이…….”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완벽하게 끝났으니까.”
세이란의 말에 키안은 안도했다. 자신 때문에 황실 기사단의 임명식이 엉망이 될까 봐, 걱정이었던 것이다.
“하아, 하아”
뱉어내는 숨결이 너무도 뜨거웠다. 새벽부터 감기 기운이 있더니, 결국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자꾸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품에 안기자, 안도감 때문인지 가까스로 버티던 힘이 다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죄송…….”
‘합니다’라는 말을 다 뱉어내지도 못한 채, 키안의 머리가 힘없이 세이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정말 고집쟁이라니까.”
세이란은 키안을 품에 안고 서둘러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사무엘 스텐호프는 키안을 품에 안고 연병장을 빠져나가는 세이란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스텐호프, 여기서 뭐해?”
드레이크가 멍하니 서 있는 사무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닙니다. 두 분이 사이가 굉장히 좋은 것 같아서 신기해하던 참이었습니다. 잠깐 검술 대결을 한 것뿐이지만, 전하께서 저렇게 세심한 분이라고 느끼지 못했거든요. 오히려 감정이라곤 없는 것처럼 굉장히 냉정해 보이셨습니다.”
사무엘의 말에 드레이크의 입가가 즐거운 듯 비틀렸다.
“전하에겐 공작님은 언제나 예외인 분이시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형제나 다름없는 관계지. 기사단에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 그리 놀랄 것 없다.”
드레이크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말한 뒤, 자릴 떴다.
사무엘 역시 드레이크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두 사람이 검술 시합을 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실력 면에선 세이란이 더 뛰어났지만, 덩치나 체력을 감안했을 때 키안 역시 절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이상하게도 사무엘은 황태자인 세이란보다 키안이 더 좋았다.
“드레이크 경, 기사단장님 밑에서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무엘의 말에 드레이크가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그런 질문을 하는 기사들이 사무엘 말고도 아주 많았었다.
“꿈 깨. 단장님께선 절대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으시니까. 그리고 스텐호프, 단장님 파가 된 걸 환영한다.”
**
“전하,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하겠다. 너는 가서 황실 소속의 의사를 데려와.”
세이란이 키안을 침대에 내려놓으며 시종장인 아이크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아이크가 재빨리 방을 나갔다. 세이란은 서둘러 키안이 두르고 있던 휘장을 벗겨냈다. 그러곤 황실 근위대의 제복을 벗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전하,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때 침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방 안의 상황을 살피다, 키안의 시중을 들고 있는 세이란을 발견하곤 놀라 들어왔다. 그러곤 세이란을 대신해 키안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아니, 모두 나가 있어. 내가 직접 하겠다.”
“네? 전하께서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나가 있어. 필요하면 내가 부르겠다.”
세이란의 단호한 태도에 시녀들이 눈치를 살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직접 키안의 옷을 벗기며 시중을 드는 것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보는 세이란의 모습에 시녀들은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시녀들은 세이란의 성격을 잘 알기에 재빨리 방을 나갔다. 방을 나가며, 시녀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파 누워 있는 키안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시녀들은 조금 전 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다른 시녀들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세이란은 키안의 제복을 벗기는 데 열중했다.
“셔츠를 벗기는 것보단 단추를 풀어놓는 게 좋겠어.”
사실 몸에서 열이 나는 상황이라 셔츠까지 벗기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키안이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세이란은 키안의 셔츠 단추를 두 개 정도 풀어놓았다.
그때 황실 의사와 함께 아이크가 방으로 들어왔다.
“새벽에 비를 맞았다. 내 생각엔 감기인 것 같아.”
세이란의 설명에 의사가 왕진 가방을 내려놓은 후 침대로 다가왔다. 그러곤 이마에 손을 올려놓더니 그 온도에 놀란 얼굴을 했다. 이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동공을 확인하더니, 다급하게 키안의 셔츠로 손을 뻗었다.
“이렇게 해선 안 됩니다. 서둘러 옷을…….”
“당장 멈춰.”
“네?”
세이란의 서늘한 목소리에 놀란 의사가 키안의 셔츠를 풀려다 말곤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하겠다. 모두 나가.”
“하지만 제가…….”
“진찰은 조금 전 했으니, 필요한 약을 조제하는 데는 별문제 없을 거야. 그러니 이제 나가.”
“하지만 전하, 레녹스 공작님의 상태가 매우 위급한 상황입니다. 제가 직접 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이란의 싸늘한 기세에 의사는 두려움을 느꼈다. 꼬리를 내리고 환자가 어떻게 되든 방을 나가고 싶었지만, 의사로서의 양심상 상태가 심각한 키안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레녹스 공작의 몸에 흉터가 있다. 남이 보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 그래서 내가 하겠다는 것이다.”
“상처라면……?”
순간 의사는 14년 전에 있었던 레녹스 공작가의 납치 사건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된 일이었지만, 레녹스 공작가의 후계자가 납치된 후 가까스로 후계자를 찾았지만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긴 아이는 다행히 살아나긴 했지만, 그 결과 몸에 끔찍한 검상을 갖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지금까진 그것이 단지 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세이란의 태도를 보자, 그 소문이 진짜인 모양이었다.
“너도 유스타나에서 몸에 상처가 있는 귀족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알고 있을 테지?”
세이란의 물음에 의사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갤 끄덕였다. 사실 침대에 누워 있는 레녹스 공작은 여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레녹스 공작이 끔찍한 상처를 갖고 있다니, 왠지 동정심이 생겼다.
아무리 명망 있는 귀족일지라도 유스타나 제국에서 몸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경시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 앞에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우선 공작님의 옷을 벗기신 후 미지근한 수건으로 열이 내릴 때까지 닦아주셔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 힘드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약은 제가 서둘러 조제해 시종장 편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왕진 가방을 열었다.
“우선 이건 해열제입니다. 먼저 먹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열을 내리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의사가 세이란에게 검은색 약병을 건넸다.
“그리고 가장 문제는 체력이 엄청나게 약해지신 상태라는 것입니다. 며칠 동안 쉬셔야 합니다.”
약병을 받아 든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눈치 빠르게 아이크가 방 안에 있던 시종과 시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아이크가 대야에 물을 받아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맙다, 아이크.”
침대 옆에 대야를 내려놓은 아이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키안을 보았다.
“밖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아이크가 밖으로 나가자 세이란은 서둘러 의사가 남기고 간 약병을 열었다. 그러곤 침대로 걸어가 키안을 품에 안아 일으켜 세웠다.
“키안, 눈 좀 떠봐.”
세이란이 열에 들뜬 채 정신을 잃은 키안을 깨웠다.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제길. 어쩌지? 해열제를 먹여야 하는데 말이야.”
세이란은 키안의 턱을 붙잡곤 입을 열었다. 슬쩍 벌어진 입술 안으로 해열제를 흘려보내자, 쓴 맛 때문인지 키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키안, 삼켜야 해.”
세이란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약병을 입에 대어주자, 이번엔 무리 없이 해열제를 꿀꺽 삼켰다.
“잘했다, 키안.”
세이란이 아이를 칭찬하듯 키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곤 다시 침대 위에 눕힌 후 의사가 시킨 대로 옷을 벗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문득 세이란의 손이 멈췄다.
‘내가 자신의 옷을 벗겼다는 걸 안다면, 분명 내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거야.’
세이란은 상식선에서 생각했다. 세이란은 키안이 상처를 가리기 위해 압박붕대를 한다는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뭐, 가슴을 가리는 붕대야 그렇다 치더라도, 키안의 바지를 벗겼을 때 남자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당연히 키안이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제길, 어쩐다?”
세이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키안을 품에 안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그러자 방문 앞에 서 있던 아이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금원으로 간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