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화
4장. 황실 기사단
세이란이 셀서스 궁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 아이크가 벌떡 일어섰다. 늙은 시종장은 졸고 있었던 듯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하지만 서둘러 정신을 차린 아이크가 재빨리 세이란에게 다가오다, 놀란 눈을 했다.
“전하, 옷이…….”
“갈아입어야겠다. 아니, 그전에 목욕부터 해야겠군.”
“목욕물이라면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이크의 말에 세이란은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욕조 안을 가득 채운 뜨거운 물을 보자, 세이란이 아이크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차가운 물이 필요할 것 같군.”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이크가 재빨리 욕실 밖으로 나가려 하자, 세이란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니, 금원으로 가는 게 더 빠르겠어.”
세이란은 금원으로 가기 위해 욕실을 나갔다. 그러자 아이크는 급한 대로 욕실에 놓여 있는 타월을 집어 들고는 세이란의 뒤를 따랐다. 아이크는 금원으로 가는 동안 서둘러 세이란이 참석해야 할 오전 일정을 말했다.
“전하, 오전에 황실 기사단의 임명식이 있습니다.”
사실 세이란이 새벽 4시가 다 된 시각에 환궁했기 때문에 자칫했다간 10시에 있을 기사단 임명식에 늦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 참석하기 힘들다면, 행사 시간을 늦춰야 했다.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해. 참석할 테니까.”
“그럼 기사단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어느새 금원에 있는 호수에 도착한 세이란은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비에 젖어 있던 옷을 벗자 오히려 한결 기분이 좋았다. 차가운 호수 안으로 들어간 세이란은 등골까지 서늘한 차가움에 몸을 맡겼다.
“하아-”
세이란은 거친 숨을 뱉어내며 눈을 감았다. 밤이었기 망정이지 벌건 대낮이었다면 난처할 뻔했다. 키안과의 키스로 인해 아랫배가 뻐근해 아플 지경이었다. 이미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단단해진 하체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자 뜨겁게 날뛰던 열기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제길, 큰일이군.”
키안을 만날 때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분명 이상한 소문이 돌 터였다. 자신이 남자에게 발정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키안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설마, 내가 남자에게 욕망을 느낀다는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건 아닐 테지?’
그런 생각이 들자, 세이란은 걱정이 됐다. 이러다가 조만간 장소에 상관없이 욕망을 참지 못하고 가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한다?”
세이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자신의 계획에 이런 복병이 숨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성적 욕망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한 번 맛봐 버린 쾌락은 시도 때도 없이 세이란을 괴롭혔다.
마음 같아선 키안의 사정 따윈 봐줄 것도 없이 귀족들 앞에서 키안 레녹스와의 결혼을 선언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이란은 그 행동이 가져올 엄청난 파장을 알기에 마음을 돌렸다.
“아이크, 지금까지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제국법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찾아봐 줘.”
마른 수건을 들고 대기 중이던 아이크가 갑작스러운 명령에 세이란을 보았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세이란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아이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쌍둥이 중 남녀 쌍둥이에 대한 판결도 있습니다. 그것까지 함께 알아볼까요?”
“그래. 그리고 제국법을 어긴 경우, 그 가문과 대상자에게 어떤 처벌이 내려졌는지 중점적으로 알아봐.”
“알겠습니다, 전하.”
아이크의 대답에 세이란은 차가운 물속에 몸을 묻었다. 사실 세이란은 귀족가에서 쌍둥이가 태어난 경우 벌어지는 끔찍한 일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스타나 제국에선 쌍둥이의 출생을 불길한 징조로 간주했다.
“지독한 법이야.”
세이란은 키안이 남녀 쌍둥이란 사실을 알고 난 후에야 제국법으로 정해놓은 그 법률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마음대로 법률을 바꿀 수는 없었다. 거기다 키안은 여인의 몸으로 레녹스 공작이란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것 역시 제국법을 어긴 행위였다.
“제길.”
세이란은 키안과 레녹스 공작이 제국법을 어겼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키안이 지금껏 느꼈을 두려움과 절망감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첨벙, 첨벙. 세이란이 물속에서 나왔다. 그러자 아이크가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넸다.
“아이크, 귀족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에게 빠짐없이 초대장을 보내야겠다.”
“내용은 뭐라고 쓸까요?”
“사흘 후 11시. 황실 티룸에서 귀족회의가 있으니 참석하라고 해.”
아센 공작이 이미 귀족들에게 티룸에서 귀족회의가 있을 것이란 운은 떼어놓은 상태라, 귀족들은 황실에서 초대장이 오길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귀족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아레오의 물음에 황실 기사단의 임명식을 위해 제복을 갖춰 입고 있던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황실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휘장을 들고 서 있던 아레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난 괜찮은데.”
“하지만 얼굴이 창백합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잠시 앉아계십시오. 제가 차를 좀 가져오겠습니다.”
아레오는 키안이 붙잡기 전에 들고 있던 휘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키안은 닫힌 문을 보며, 의자에 앉았다. 아레오에게 걱정을 끼칠 정도로 감정을 숨기지 못하다니. 자신이 한심해 눈을 감고는 천천히 호흡을 정리했다.
“이러다 임명식이 엉망이 되겠어.”
사실 키안은 환영식에서 세이란을 만나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서 아레오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은 황실 기사단의 임명식이 있는 날이었고, 황태자가 참석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그런데 지금 키안의 몸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제길, 하필 이런 중요한 날.’
키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환영식에 참석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환영식 중간에 신입 기사단의 기사들 중 가장 역량이 뛰어난 기사와 기사단의 최고 책임자인 자신과의 검술 시합이 예정돼 있었다.
이 시합은 황실 기사단이 창설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관례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취소할 수도 없었다.
“감기약을 먹었어야 했어.”
키안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중요한 행사가 예정돼 있는데도, 약을 챙겨 먹지 않다니. 사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새벽에 비를 맞아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건 십대 이후, 한 번도 앓은 적이 없기 때문에 방심한 것도 있었다. 갑자기 몸에 한기라도 든 듯 오소소 떨려왔다. 그때 밖으로 나갔던 아레오가 찻잔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몬차로 준비했습니다. 감기에 좋을 겁니다.”
“고맙다, 아레오.”
키안은 뜨거운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가 들어가자,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이제 나가셔야 할 시각입니다.”
연병장에서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던 드레이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키안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께선 출발하셨나?”
“조금 전 출발하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
드레이크의 말에 키안은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아레오가 황실 기사단의 상징이 수놓아진 휘장을 어깨에 달아주었다.
“다 되었습니다, 단장님.”
어깨에 붉은색 휘장을 두른 키안이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옆에 놓아두었던 검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준비는 끝이 났다.
아레오는 키안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키안의 모습은 강하고, 또 아름답다는 말에 딱 들어맞았다. 아레오는 자신이 황실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좀 괜찮으십니까?”
아레오가 문을 열어주며, 키안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자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고갤 끄덕여 보였다.
“네가 가져온 차 덕분에 한결 좋아졌어.”
아레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키안은 사무실을 나갔다. 연병장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또다시 긴장이 됐다. 세이란을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키안은 서둘러 마음을 다잡았다. 새벽에 있던 일 같은 건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뗄 생각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키안은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그러곤 기사단의 임명식이 열리는 연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황실 기사단의 임명식이 진행되는 동안 세이란은 키안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신입 기사들의 검술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단단한 껍질 속으로 들어가 버렸군.’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키안의 철벽 방어에도 담담할 수 있었다. 사실 요 며칠 자신에게 휘둘리던 키안의 모습이 오히려 키안 답지 않았었다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 세이란이 걱정하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눈에 띄게 창백해진 얼굴 때문이었다.
‘씻고 나서 또 머릴 말리지 않은 건가?’
키안의 나쁜 습관 중에 하나가 바로, 머릴 말리지 않고 침대에 든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새벽에 비를 맞은 데다 자신처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짐작건대 키안이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감기로 인해 창백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인 듯했다.
“새로 들어온 기사들의 실력이 좋군. 레녹스 공작, 조금 전 승리한 기사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세이란의 물음에 키안이 어쩔 수 없이 고갤 돌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열이 좀 있는지 하늘빛 눈동자 역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사무엘 스텐호프입니다. 스텐호프 백작가의 차남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텐호프 백작가라면 대대로 명망 있는 기사 집안이군. 내 기억엔 그 형이 알렉산더 스텐호프였던 것 같군. 검술이 뛰어났었지.”
세이란의 말에 키안 역시 갈색 머리카락의 알렉산더가 기억이 났다. 그의 말처럼 몸을 쓰는데, 더 두각을 나타냈던 게 떠올랐다. 특히 사냥에 일가견이 있었다.
“동생인 사무엘 스텐호프 역시 검술 실력이 뛰어납니다. 집안 내력인 모양입니다.”
“네가 그렇게 칭찬을 하다니, 신기하군.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데, 전에 본 적이 있는 건가?”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무엘 스텐호프를 바라보았다. 방금 시합을 끝낸 사무엘이 세이란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갤 들더니, 바로 허릴 숙여 예를 갖췄다.
“알렉산더 스텐호프 백작과 닮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키안의 설명에 세이란 역시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왠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키안을 데려다준 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둠 속이었지만, 분명 사무엘 스텐호프였다.
‘쳇, 키안을 저택까지 데려다준 자가 바로 스텐호프였군.’
세이란은 키안이 저택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던 스텐호프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굉장히 불쾌했다.
“검술 시합의 우승자가 결정이 되었으니, 마지막 순서만 남았군요.”
우승자가 결정되었으니, 기사단의 단장인 자신과의 우승자와의 마지막 시합이 남아 있었다. 키안이 검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려 하자, 세이란이 팔을 붙잡았다.
“레녹스 공작, 잠깐 기다려 주겠나?”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넌 앉아 있는 게 좋겠다, 레녹스 공작.”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키안을 끌어다가 그가 의자에 앉혔다.
“전하, 아직 시합이…….”
“네 검 좀 빌리겠다, 레녹스 공작.”
세이란 역시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갤 끄덕여 보인 후, 키안에 손에 들려 있던 검을 가져갔다.
그의 차가운 손이 닿자, 키안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에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상대하겠다.”
“네? 하지만 관례상…….”
“알고 있다, 레녹스 공작. 하지만 이번 기사단 임명식은 나에게 굉장히 특별한 행사다. 황제궁을 지킬 기사들을 맞이하는 자리니까.”
세이란의 말에 키안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사실 급하게 신입 기사를 뽑은 이유가 바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는 황제궁을 호의할 기사를 뽑기 위해서였다.
“내가 직접 상대하고 싶은데, 모두 이의는 없겠지?”
세이란이 시합장으로 걸어가며, 연병장에 모여 있는 황실 기사단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이의는커녕, 모두가 흥분한 모습이었다.
사실 유스타나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황태자의 검술 시합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흔치 않는 기회였다. 기사단의 기사들에겐 영광이었다.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드레이크가 세이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연병장에 있던 기사들 역시 허릴 숙여 드레이크와 생각을 함께했다. 다만 시합에서 우승해 검을 들고 서 있는 사무엘 스텐호프만이 조금 긴장된 얼굴로 세이란을 볼 뿐이었다.
“스텐호프, 잘 부탁한다.”
세이란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정신이 든 듯 사무엘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시합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고갤 숙인 사무엘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은 세이란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유스타나 제국의 최고의 기사와 시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듯 눈을 빛냈다.
“그럼 시작해 볼까?”
키안의 검을 든 세이란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의 변화에 사무엘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무엘 역시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며, 세이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이란은 신입이라고 해서 봐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키안 앞에서 어떤 형태로든 얼쩡거리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었으니까.
챙, 채챙!
이내 날카로운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병장을 울렸다.
**
세이란과 사무엘 스텐호프의 검술 시합을 지켜보던 키안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서늘한 냉기에 몸을 떨었다. 키안은 고갤 들어 햇볕이 내리쬐는 연병장을 보았다.
오히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정도로 더운 날씨인데, 춥다고 느끼다니. 몸이 이상한 게 분명했다.
“단장님, 괜찮으신 겁니까?”
“조금 추운 것 빼곤 괜찮아.”
순식간에 아레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곤 재빨리 드레이크에게 달려가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하는 게 보였다.
“대체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
키안은 자신은 괜찮다는 말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주위가 핑그르르 돌더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 몸이 왜 이러지?’
키안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의자를 꽉 붙잡곤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현기증이 사라지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세이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검술 시합이 벌써 끝이 난 모양이었다.
“너, 왜 그래?”
“별것 아닙니다. 햇빛 때문에 조금 눈이 부셔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키안을 쏘아보았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드레이크 경, 다음 순서는 뭐지?”
키안은 세이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옆에 서 있는 드레이크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드레이크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세이란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게 단장님, 신입 기사들의 요청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요청이라고? 그게 뭔데?”
드레이크가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지, 다시 한 번 세이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드레이크를 대신해 세이란이 대신 대답했다.
“너와 내가 검술 시합을 하길 원하는 것 같아.”
“전하와 저의 검술 시합을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키안이 고갤 들어 황실 기사단을 보았다. 신입 기사들을 비롯해 기사단의 기사들이 기대감에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합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당연히 해야죠. 할 수 있습니다.”
세이란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 역시 자신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길, 전하께서도 아셨어.’
키안은 의지력을 총동원해 아무렇지 않은 듯 그를 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힘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이건 임명식과는 상관없이 치러지는 시합이라 네가 거절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아닙니다. 기사단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겠습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