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화
별것 아니라는 듯 얼버무리는 세이란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알기론 붉은 띠가 붙여진 서류는 한시바삐 처리해야 할 긴급 서류였다. 그런데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니. 키안은 그의 그런 행동이 마치 놀러가고 싶어 숙제를 미루는 카이우스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에 완벽을 추구하는 세이란에게 이런 귀여운 면이 있었다니.’
의외였다. 그래서인지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왜 웃는 거지?”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키안을 보았다. 그러자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만약 카이우스와 닮았다고 한다면, 그가 말도 안 된다며 버럭 소릴 지를 것 같아서였다.
“전하께서도 일을 미루실 때가 다 있구나, 해서요.”
“대부분은 일이 우선이지만 가끔은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기기도 하니까.”
그 말이 마치 자신과 함께 있는 일이 업무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키안은 세이란의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얼마나 일이 힘드셨으면, 나와 함께 도망칠 생각을 하시다니.’
키안은 그런 그가 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처리하지 않고 미룬다면, 분명 모든 게 엉망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세이란의 무능으로 연결될 게 불 보듯 뻔했다.
“저에게 할 얘기가 있으신 것이라면, 업무가 끝난 저녁이 좋겠습니다.”
“아니, 네가 먼저다. 그 후에 밀린 업무를 처리하면 돼.”
그 말은 저 많은 서류를 보느라, 오늘 밤도 꼴딱 새울 것이란 뜻이었다. 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잠을 못 자 눈가에 그늘까지 생겼는데 이렇게 계속 잠을 자지 못한다면 가까운 시일 안에 큰일이 터질 것 같았다.
“밤늦게까지 주무시지 않고 일을 하시는 건 건강에 좋지 못한 습관이십니다. 바꾸셔야 합니다.”
키안의 지적에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아주 미묘하긴 했지만, 미소가 분명했다.
“벌써 날 걱정하는 것이냐?”
순간 키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은 약혼녀가 되더니, 벌써부터 자신을 걱정하느냐는 의미였다.
‘날 또 놀리시려는 게 분명해.’
키안은 그의 놀림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자릴 뜨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용무가 아니시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키텐 공작부인과 만나기로 했거든요.”
세이란은 벨라와 약속이 있다는 말에 고갤 돌려 책상을 흘끗 보았다. 사실 책상 위엔 당장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대부분이었다.
“좋아. 대신 밤엔 날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는 것 잊지 마.”
키안이 고갤 끄덕인 후,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뭔가 생각난 듯 뒤따라왔다.
“키안, 기다려.”
손이 문손잡이에 닿기 직전, 그가 키안의 팔을 붙잡곤 돌려 세웠다. 그러곤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오늘 밤, 자정이다. 여기서 기다려.”
손을 펴자, 손 위에 열쇠가 놓여 있었다.
‘화이트가 23번지라고. 집 열쇠인 건가?’
이 열쇠가 뭔지 묻기 위해 고갤 들었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어느새 의자에 앉은 그는 서류에 손을 뻗고 있었다. 정말 집중력 하나는 끝내주는 것 같았다.
집무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세이란이 고갤 들었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고갤 숙인 그는 무서운 속도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빨리 끝낼수록 키안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빨라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군.”
**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키안이 아키텐 공작가의 응접실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벨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이내 우아한 태도로 거드름을 피우듯 부채를 살랑거리며 말했다.
“레녹스 공작님, 어서 오세요.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키안은 벨라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저것이 레이디들의 일반적인 모습인 듯했다.
“방문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공작님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여기 차 좀 가져다주겠어?”
“네, 공작부인.”
하녀와 집사가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자 벨라는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들고 있던 부채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재빨리 키안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키안을 끌고 가 소파에 앉힌 다음 숨이 넘어갈 정도로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별일 없었어?”
“별일?”
“그래.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그날 화장실에서 돌아오는데, 그 꽉 막힌 거만한 공부벌레 공작에게 붙잡혔잖아. 다짜고짜 마차에 태워진 후 집에 끌려오다시피 했다니까.”
“혹시 꽉 막힌 거만한 공부벌레 공작이 리치문트 공작을 말하는 거야?”
“맞아. 이번에 새로 임명된 법무대신. 정말 내가 얼마가 그 남자 때문에 화가 났는지 너는 모를 거야. 나를 완전히 몸이나 함부로 굴리는 천박한 여자처럼 생각했다니까. 키안, 미안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널 그런 곳에 데려가서. 하지만 절대 남자를 만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어. 가면을 쓰면 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단순한 생각만 했거든. 내가 너무 경솔했어.”
벨라가 미안한 얼굴로 키안을 보았다. 하지만 키안의 머릿속은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까지 왜 파튬의 가면무도회에 있었냐는 것이다.
‘혹시 세이란 님께서 만나려고 했던 사람이 패트리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던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키안은 어쩌면 패트리샤가 세이란이 만나는 여인이 아니라, 다른 사이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정보원이라던가?
“벨라, 혹시 리치문트 공작님께선 다른 말은 없었어?”
“다른 말? 아니, 없었어. 하지만 분명한 건, 네가 여장을 한 건 모르는 눈치였어. 내가 너에 대해 묻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거든. 널 알아본 건, 전하뿐이었다는 거야. 그날 전하께서 널 데려다주신 것 맞지?”
벨라의 질문에 키안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자신이 벨라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음료를 마셨고 그 음료에 수면제가 들어 있어서 잠이 들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벨라는 자신의 잘못이라며 자책할 게 분명했다.
“전하께서 패트리샤라는 분께 날 부탁했어. 내가 여인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날 저택까지 데려다줄 순 없었거든.”
키안의 설명에 벨라는 납득했는지 고갤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눈까지 빛내며 키안 쪽으로 고갤 숙여왔다.
“그런데 전하께선 널 어떻게 알아본 걸까? 드레스 차림인데다, 가면까지 쓰고 있었는데 말이야.”
“나도 궁금해, 어떻게 단번에 알아보셨는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 역시 가면을 쓰고 있는 그를 한 번에 알아봤던 것이다.
“아무튼 정말 다행이야. 나는 네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레녹스 저택으로 찾아가 볼까 하던 참이었거든.”
“바로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 어제부터 황실 기사단에 출근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오늘도 황궁에 갔다 오던 길이었거든.”
“아니야. 이렇게 와줬으니 됐어.”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벨라가 서둘러 몸을 바로 하곤,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내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하녀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벨라가 탁자 위에 내려놓았던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리곤 거만한 표정을 했다.
“공작부인, 차를 내왔습니다.”
“놓고 나가.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녀가 쟁반을 내려놓은 후, 곁눈으로 키안을 흘끗 보았다. 그러다 키안과 눈이 마주치자 하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하녀가 얼굴을 붉히며 응접실을 나가자, 벨라가 피식 웃었다.
“너에게 반한 모양이야.”
“흰소리 그만해. 그나저나 그 부채는 뭐야? 덥기라도 한 거야?”
키안이 벨라의 손에 들려 있는 부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벨라가 깔깔깔 웃으며 고갤 가로저었다.
“덥기는. 절대 그런 게 아니야. 이건 이번 사교 시즌에 핫 아이템이거든. 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곤 마음에 드는 귀족에게 신호를 보내는 거야. 그게 기술이거든.”
“기술? 그런 것도 있어?”
키안의 물음에 벨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알려줄까?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 말이야?”
“농담 그만해.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고 배워둬서 나쁠 건 없는 것 같은데, 어때? 알려줘?”
벨라의 장난에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그러자 벨라는 실망한 표정을 했다. 내심 키안에게 가르쳐 주고 싶던 모양이다.
“대신, 완벽한 레이디가 되는 방법을 알려줘.”
“지금 뭐라고 했어? 분명 완벽한 레이디가 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 것 같은데, 맞아?”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다시 물어왔다.
“응. 그러니 벨라, 내가 완벽한 레이디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줘. 내가 곧 황태자 전하의 가짜 약혼녀가 되어야 할 것 같거든.”
놀라 부채까지 떨어뜨린 벨라에게 키안은 세이란이 했던 제안을 말하기 시작했다. 키안의 말을 듣는 동안 벨라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
말에서 내린 세이란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은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제길, 너무 늦어버렸어. 벌써 돌아갔겠지?”
세이란은 말을 기둥에 묶자마자, 불이 꺼져 있는 저택의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저택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택의 방을 모두 확인했지만 키안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돌아간 모양이었다.
“하아.”
세이란은 응접실에 놓여 있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안이 없는 걸 확인하자, 힘이 쭉 빠졌다. 세이란은 다시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새벽 1시. 이 시각에 레녹스 저택으로 쳐들어가는 것 역시 무리였다.
하지만 세이란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키안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저택까지 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현관을 나온 세이란이 묶어놓았던 말고삐를 풀었다.
“전하? 전하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키안의 목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정말 키안이었다.
“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아, 그게 창고에 갔었습니다. 불을 켤 수가 없었거든요.”
그제야 세이란은 저택이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 사람 시켜 손보라고 해야겠군.”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된 겁니까? 와보고 놀랐습니다.”
“내 약혼녀가 되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급히 구한 거야. 열쇠는 네게 줬으니 마음대로 써도 돼.”
세이란의 설명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을 하신 겁니까?”
키안이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서야 이곳에 오다니. 세이란 성격에 일을 하다 그만 약속 시간을 놓친 게 분명했다.
“자정이 되기 전까지 끝내려고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까지 된 걸 모르고 있었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의 사과에 키안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자신이 뭐라고, 이 늦은 시간에 자신을 만나기 위해 달려오다니.
“그러셨군요.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세이란이 뭔가 굉장히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급기야 자신을 와락 끌어안더니,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네가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아, 그게. 갈까도 했지만, 전하께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 기다렸습니다.”
세이란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의 몸이 더욱 가까워졌다.
“저는 오늘 여장을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 주십시오.”
조심스럽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언급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 알고 있으니까. 그저 늦게까지 기다려 준 네가 고마워서 그러는 것뿐이야. 혹시 피곤하지 않다면, 뭐라도 먹을까?”
“이 시각에 연 음식점이 있을까요?”
키안이 은근슬쩍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음식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라와. 내가 잘 아는 식당이 있거든.”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붙잡곤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러곤 자신 역시 뒤에 탄 후 키안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내게 기대.”
“제 말을 타고 가겠습니다.”
“함께 움직이는 게 더 빨라. 늦으면 자리가 없거든. 이럇!”
키안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말고삐를 당겼다. 그러곤 어둠 속으로 재빨리 말을 몰았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