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었다. 만약 그 부분이 걱정이 된다면, 아키텐 공작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때? 어차피 이번 계획에 아키텐 공작부인의 기여도 아주 크니 말이야.”
세이란의 지적에 키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계획은 벨라가 자신을 파튬의 가면무도회에 데리고 가면서 시작되었다.
“에취!”
그 순간 키안이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시트를 끌어당겨 키안의 몸에 돌돌 감아주기 시작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에취- 감기 옮으십니다.”
“감기가 그냥 옮을 리 있겠어? 너와 다시 키스를 한다면 모를까.”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잔뜩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절대 싫습니다.”
키안이 정색을 하며 거부하자 세이란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심하게 거부를 하다니. 심술이 나는군.”
이내 세이란의 눈빛이 장난기로 반짝이는가 싶더니, 피할 새도 없이 키안을 침대로 밀쳤다. 그러곤 그대로 자신의 몸 위로 올라왔다. 순식간에 그의 몸에 깔린 키안이 당황한 얼굴로 버둥거렸다.
“세이란 님, 대체 무슨? 비켜주십시오.”
키안이 그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키안의 두 손을 붙잡은 다음, 머리 위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꼼짝없이 그의 몸에 깔린 채 두 손까지 결박당하자, 키안은 긴장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두 사람의 자세가 몹시도 난처한 모양새였다. 뭔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장난치지 마십시오.”
“누가 장난을 쳤다는 거지?”
“절 놀리려던 게 아니셨습니까? 아니면 이번에도 또 시험하시려는 겁니까?”
순식간에 세이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러곤 정말 이번에도 키스하려는 듯 그가 고갤 숙여왔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짙어진 녹색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췄다.
“키안…….”
낮게 가라앉은 세이란의 목소리가 왠지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가 아니라 떨리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전 나눴던 키스가 떠올랐다.
‘하아, 어떡해. 숨이 막혀. 이러다간 정말…….’
키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만들어낸 날 선 긴장감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서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입술에 닿으려는 찰나, 키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키스는 여장을 했을 때만 하겠습니다.”
아, 미쳤어. 아무리 급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해버리다니. 키안은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약속했다, 키안. 이젠 되돌릴 수 없다.”
세이란이 키안을 놓아주었다.
자신을 내리누르던 힘이 사라지자, 키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세이란의 평소의 서늘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만 그런 건가? 세이란 님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잔뜩 설레고 긴장해서는……. 이상한 모습을 보여 버렸어.’
그런 자신이 한심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키안이 냉정함을 되찾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전,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너는 내일부터 완벽한 레이디가 되면 된다.”
완벽한 레이디가 된다고? 키안은 뭔가 복잡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키안은 세이란이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완벽한 레이디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붙잡았다. 키안이 고갤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키안은 불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마치 덫에 걸린 느낌이야.’
키안은 애써 머릿속에 든 생각을 지웠다.
“키안, 난 너에게 어울리는 훌륭한 약혼자가 되겠다.”
별 뜻 없이 하는 말이 분명했다. 그런데 키안의 심장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뛰고 있었다.
3장. 황태자의 가짜 약혼녀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인 도미니크는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냈다. 이틀 전 아센 공작의 요청을 받은 직후, 그는 신탁을 받기 위해 대신전의 지하에 있는 기도실로 향했다.
의식을 위해 성수로 몸을 깨끗이 닦은 후 의복까지 갖춰 입은 다음 바로 기도에 들어갔다. 황태자비를 맞이하기 위한 신탁이었기 때문에 하루 한시가 급했다.
‘폐하께서 위독한 상황이니, 서둘러야 해.’
도미니크는 경건한 자세로 성심을 다해 기도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치 뭔가가 신탁을 받는 걸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야. 왜 자꾸만 다른 게 보이는 거지?”
결국 신탁을 받기 위해 기도실에 들어간 지 이틀 만에 도미니크는 기도실을 나와야 했다.
하지만 지하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도미니크는 불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대체 뭘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야.”
분명 기도하는 내내 눈앞에 보였던 빛은 징조였다. 그것도 곧 일어날 일에 대한 징조. 하지만 그것이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길, 폐하께서 위독하신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다니.”
대신관인 도미니크는 초조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도미니크가 창문으로 걸어갔다. 곧 아침이 되려는지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새벽의 여명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 그의 회백색의 눈동자가 홀린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몹시 충격을 받은 듯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닐 테지?”
도미니크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푸른빛이 도는 새벽의 여명 아래, 은빛으로 빛나는 형상이 유스타나의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은빛 안개라니. 저 빛은 분명 폐하께서 쓰러지셨던 때와 같아.”
도미니크는 너무도 놀랐다. 똑같은 징조가 두 번이나 나타나다니. 그렇다는 건 황제 폐하가 독에 중독되었듯 유스타나 제국에 큰 위험이 닥쳐온다는 의미였다. 도미니크는 너무 놀라 숨을 삼켰다.
“전하께 알려야 해. 곧 위험이 닥칠 것이란 걸, 어서 말씀드려야 해.”
그 길로 대신전을 나온 도미니크는 황궁으로 향했다. 셀서스 궁에 도착하자,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급히 서두른 탓인지 도미니크는 숨이 찼다. 한숨 돌리기 위해 걸음을 멈춘 도미니크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러다 황궁의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황실 근위 제복을 입은 귀족을 보았다. 아침 햇살 아래 눈부신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도미니크는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봤다. 황실 기사단에서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단 한 명뿐인 것이다. 황태자의 측근이자,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레녹스 공작.
“레녹스가의 젊은 공작이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인 모양이군.”
도미니크는 땀을 닦은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으며, 황태자에게 함께 가기 위해 키안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대신관 님.”
“전쟁터에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레녹스 공작님.”
도미니크 역시 인사를 건네며, 눈앞에 서 있는 잘생긴 젊은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키안에게 느껴지는 낯선 기운을 느끼곤 눈을 가늘게 떴다.
“레녹스 공작님, 혹시 최근에 뭔가를 집 안에 들이셨습니까?”
도미니크의 질문에 키안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러곤 솔직하게 대답했다.
“국경 지대의 숲에서 어미를 잃은 어린 늑대를 주웠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작님 곁에서 어린 늑대의 기운이 보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운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군요.”
도미니크의 말에 키안은 숲에서 새끼 늑대를 구했던 때를 떠올렸다. 아마 대신관이 말하는 특별한 운명이란 게 그것인 모양이었다.
“어엇-”
“대신관님!”
놀란 키안이 재빨리 도미니크를 부축했다.
“감사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도미니크는 현기증을 느끼며 키안의 팔을 붙잡았다. 이틀 동안 기도실에 있던 탓인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모양이다.
“얼굴이 창백합니다. 몸이 불편하신 것이라면 제가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키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미니크를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사람을 부르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도미니크가 키안의 팔을 붙잡았다.
“사람을 불러올 정도는 아닙니다. 잠시만 이렇게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키안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도미니크의 주름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좋지 않은지 도미니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키안은 말없이 도미니크 옆에 서서 그가 괜찮아지길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새파랗게 질렸던 도미니크의 얼굴이 본래의 색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곤 무겁게 내려앉았던 눈꺼풀이 위로 밀려 올라가더니, 투명한 은백색의 눈동자가 키안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은백색 눈동자라…….’
키안은 놀랐다. 처음으로 대신관 도미니크의 눈동자 색깔이 은백색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뭔가 텅 빈 듯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대신관의 눈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키안은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도미니크의 은백색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췄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레녹스 공작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힘드시면 제가 대신전까지 모시겠습니다.”
키안의 제의에 도미니크가 고갤 가로저었다. 그러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저 같은 사람에겐 간혹 이런 때가 있답니다.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경우가요.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눈을 뜬 채 꿈을 꾼다고? 아마 그것이 대신관이 갖고 있는 영적인 힘인 모양이라고 키안은 생각했다.
“아, 그렇군요.”
키안은 그제야 도미니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도미니크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대신전으로 돌아가려는 듯 발길을 돌리는 게 보였다.
“전하께 가시는 길이 아니셨습니까?”
“저는 다음에 찾아뵙는 게 좋겠습니다.”
도미니크의 태도는 흠잡을 것 없이 차분했다. 하지만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었다.
“어서 가보십시오. 지금 전하께서 공작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벌써 문 앞까지 나오셨군요.”
“전하께서요?”
키안이 세이란이 있을 집무실 쪽으로 고갤 돌렸다. 하지만 이내 바보 같은 생각이란 걸 깨달았다. 세이란의 집무실은 앞에 보이는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서야 볼 수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키안이 도미니크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한 후, 재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안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도미니크의 시선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결국 키안은 도미니크를 돌아보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레녹스 공작, 늦었군.”
그때 세이란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키안은 세이란이 있는 곳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오는 길에 대신관을 만났습니다.”
“대신관을? 이상하군. 그는 지금 신탁을 받기 위해 대신전의 기도실에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세이란이 정원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서둘러 돌아가는 대신관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상했다. 자신을 만나러 온 것 같은데, 그냥 돌아가 버리다니. 하지만 세이란은 ‘뭐 급한 일이 생각나서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신탁이라면 혹시…….”
“통과의례일 뿐이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내 계획은 그대로다.”
세이란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듯 무시하라고 했지만, 키안은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다. 세이란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의 가짜 약혼녀 노릇을 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 귀족들은 물론, 유스타나 제국민들을 상대로 사기극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전하…….”
“만약 지금 네가 생각했던 말을 그대로 뱉어낸다면, 키스를 하겠다.”
세이란이 키안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그러곤 자신의 협박을 바로 실행하려는 듯 키안을 향해 한 발짝 성큼 다가서더니, 고갤 숙여왔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놀란 키안이 주위를 의식한 채 말했다. 하지만 세이란은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볼 뿐이었다. 그의 말처럼 키안이 입이라도 뻥긋했다간, 황제 궁에 있는 시녀들과 시종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키스를 할 기세였다.
“레녹스 공작, 선택은 그대의 몫이다. 뭘 원하든지 말이다.”
여기서 좀 더 세이란이 키안에게 다가온다면, 황궁 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게 분명했다.
“알았으니, 제발 떨어져 주십시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겁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몸을 바로 하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이제 됐나, 레녹스 공작?”
정말 얄밉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키안은 세이란에게 이젠 되었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하아, 그의 제안을 너무 쉽게만 생각한 모양이야.’
키안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세이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그에게 속은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세이란과 키안이 집무실 안으로 함께 나란히 들어서자, 서류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뜨곤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께선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벌써, 14년인가요? 두 분께서 로열 아카데미에서 만났던 게 말입니다.”
“그렇지. 레녹스 공작은 다른 입학생들과는 달리 일곱 살 때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니까. 만약 그 당시에 지금처럼 까다로운 성격으로 자랄 줄 알았다면,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을 거야.”
그 말에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마디로 성격 더러운 자신을 참아주는 건 세이란 본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지금까지 그 까칠하고 완벽주의 성격을 꾹 참고 인내해 온 사람이 누군데?’
키안이 턱을 살짝 치켜들고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 역시 전하께선 굉장히 이성적이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키안을 보며 말했다.
“키안 레녹스 공작, 지금 나한테 속았다고 말하는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황태자 전하께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키안의 표정이며 태도에선 속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때 에드윈이 들고 있던 서류를 세이란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분의 닭살 돋는 부부싸움이 시작된 것 같으니까요.”
“부부싸움이라니.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에드윈의 경악스러운 농담에 키안이 발끈하며 에드윈을 쏘아보았다.
“맞다, 리치문트 공작. 이건 의견 대립이다. 건전하고 발전적인 대립 말이다.”
세이란의 억지에 에드윈은 의욕을 상실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두 분,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말다툼을 하다가도 공통의 적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태세를 바꾸는 것 말입니다.”
에드윈의 지적에 세이란은 새삼스러운 말을 한다는 얼굴을 했다.
“나야 변할 리가 없지. 그건 그렇고 지금 나가려던 것 아니었나, 리치문트 공작?”
뻔뻔하게도 세이란은 에드윈을 대놓고 내쫓았다.
“그럼 전 내일 귀족회의에서 뵙겠습니다. 레녹스 공작, 이번엔 참석할 거지?”
“저는…….”
“아니, 레녹스 공작은 당분간 귀족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거야.”
에드윈이 고갤 끄덕인 후, 서둘러 집무실을 나갔다.
“그럼, 우리도 나가볼까?”
나가자고? 어딜? 이란 의문과 함께 키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의 책상 위엔 처리해야 할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는 것 아니셨습니까?”
키안의 시선이 책상에 가 있는 것을 보곤, 그가 몸으로 책상을 가렸다. 그러곤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서류다. 그러니 신경 쓸 것 없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