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화
미친 게 분명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세이란의 명령을 따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으로 밖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절대 눈을 감아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다시 키스를 할 것이란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도 키안은 본능적으로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쿡,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분고분 자신의 말을 듣는 키안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순간 키안이 눈을 뜨려 하자, 이번엔 그가 손으로 가렸다. 그러곤 저항할 틈도 없이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흣-”
키안이 신음을 삼키는 소리에 세이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처음부터 키안에게 키스를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키안과 몸이 닿자 이성을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세이란은 다시 맛보게 된 키안의 입술을 욕심껏 삼켰다. 무엇보다 자신의 명령을 따른 키안이 자신의 키스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자, 심장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하아, 흣-”
젖은 입술 새로 키안의 나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은 키안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 의해 키안의 기억은 모두 봉인된 상태였다. 분명 기억할 리 없었지만, 자신과 몸을 겹칠 때 허릴 뒤틀며 신음을 뱉어내는 건 똑같았다.
그 모습에 세이란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하체를 키안의 아랫배에 강하게 밀어 붙었다.
“흣-”
키안은 아랫배에 닿는 크고 단단한 감촉에 놀라 눈을 떴다. 순식간에 열기로 흐릿하던 머리가 맑아졌다.
‘미친 게 분명해. 세이란 님과 내가 키스를 하다니. 그것도 신음까지 흘리며 정신없이 빠져들다니.’
키안은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머릿속으론 계속 그를 밀어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몸은 그와 반대로 그의 하체에 아랫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다리 안쪽이 아릿했다. 축축하게 젖은 밀부가 흠칫흠칫 떨리며, 아래를 꽉 조였다. 그 낯선 감각에 키안은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두려웠다. 그에게 여인으로 반응하는 자신이 무서웠고, 이러다 자신이 여인이란 사실을 세이란이 눈치챌 것 같아 온몸이 굳어졌다.
“노, 놓아주십시오.”
키안이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밀어냈다. 손바닥을 그의 가슴에 대곤, 진득하게 들러붙었던 두 사람의 몸이 떨어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다.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시험이라니. 저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이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아서. 하지만 여전히 초조했다. 대체 왜 세이란이 자신에게 이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세이란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가슴에 놓인 키안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불안해하고 있었다. 숨기려 하고 있었지만, 지금 키안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내 약혼녀가 되어주어야겠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약…… 혼녀라니. 키안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설마…… 내가 여인인 걸 알게 된 건가?’
키안은 지독한 공포와 절망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철저하게 숨겨왔는데. 대체 어떻게……?’
아니,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세이란에게 죽을죄를 지었다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니, 카이우스만은 살려달라고.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사정을 해야 했다.
“전하, 저는…….”
“키안, 귀족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선 가짜 약혼녀가 필요하다.”
잠깐,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가짜 약혼녀라니. 그제야 키안은 세이란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내가 여인이란 건 모르시는 건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저는 아직도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키안이 조심스럽게 고갤 들어 세이란의 안색을 살폈다.
“귀족들은 내가 황태자비를 맞아들이길 원해.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리고 폐하께서 아직 병상에서 깨어나시지도 못했다. 다시 말해서 난 가짜 약혼녀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리고 그걸 가장 믿을 수 있는 네가 해줬으면 한다.”
“제가 어떻게 전하의 약혼녀가 될 수 있는 건지……. 전, 남자입니다.”
키안이 불가능하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그가 자신이 여인이란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의 약혼녀라니.
키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 같아 불안했다.
“알아, 네가 남자라는 건.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너와 내가 사랑에 빠져서 일이 꼬이는 문제는 없을 테니까.”
“…….”
그게 이유라면, 부정할 수 없었다. 세이란이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는 한, 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키안이 그를 밀어내며, 벽과 세이란 사이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자 그가 키안의 팔을 붙잡았다.
“다른 사람은 안 돼.”
“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키안이 놀라 고갤 들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이유를 덧붙였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그리고 생각해 봐. 에드윈이 여장을 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키안의 머릿속에 에드윈이 여장을 한 모습을 떠올랐다.
“풋-”
키안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러자 키안 역시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너도 이제 너밖에 안 되는 이유를 알았겠군.”
세이란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키안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미치겠군. 여장을 핑계로 기사단을 그만두려 했는데, 오히려 발목을 붙들려 버리다니.’
세이란은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며, 속으로 웃었다. 마음이 여린 키안이라면 절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키안, 폐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죄송합니다. 사정은 알겠지만, 전하의 가짜 약혼녀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왜? 넌 내 키스가 싫었던 거야?”
아니, 얘기가 갑자기 왜 그쪽으로 튀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키안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키스의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겐 중요해. 가짜 약혼녀 역할이지만, 다른 귀족들을 속이려면 진짜처럼 보여야 하거든. 사교 시즌 동안 수많은 파티에 참석할 테고 그곳에서 너와 춤도 추고, 키스도 할 생각이다. 귀족들에게 진짜처럼 보이려면 거짓 키스로는 금방 들통날 게 뻔하니까.”
키안은 그가 왜 자신에게 키스를 하며 시험이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키스가 왜 그렇게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농밀했는지도.
자신에게 가짜 약혼녀 제의하기 전,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한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단지 그것뿐이라서.’
하지만 자신의 반응은 그와는 달랐다. 그는 연기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은 진심으로 흥분했다.
처음 알았다. 남자와 키스를 하면, 이런 느낌이 드는지.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세이란이 남자로 의식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자꾸만 손끝이 떨렸다.
‘안 되겠어. 이런 상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비밀을 알아채고 말 거야.’
키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짜가 아니라, 진짜 약혼녀를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안 돼.”
세이란이 불가능하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폐하께서 위독하신 것 외에 다른 이유 말입니다.”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키안은 그런 세이란을 보며, 숨을 삼켰다.
‘믿을 수 없어. 세이란 님께서 이런 표정을 하시다니.’
세이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 애정이었다. 그것도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애틋하고 절절한 감정. 지금 세이란은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있었고,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제안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키안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머릿속에 사교계를 떠돌던 소문이 하나 생각났다.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인 레이디 베로니카.
햇살을 연상시키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베로니카는 유스타나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였다.
“그럼 그분과 결혼을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왠지 그 말을 하는데 키안은 목이 꽉 조여들었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키안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야. 내가 아직 말하지 못했거든.”
세이란이 난처한 표정으로 키안을 보았다. 낯선 모습이었다. 지금껏 14년 동안 세이란의 곁에 있었지만, 이런 얼굴의 그는 처음이었다. 뭔가 그 레이디에게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인 세이란이 쩔쩔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키안은 뭔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제가 돕겠습니다. 이 길로 성 캐서린 수도원에 가서 레이디 베로니카를 모셔오겠습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의 입매가 차갑게 굳어졌다. 눈빛 역시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뭔가에 굉장히 화가 난 듯도 보였다.
“여기서 왜 레이디 베로니카가 나오는 거지?”
“아, 죄송합니다.”
키안은 재빨리 사과했다.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레이디 베로니카를 데리고 온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베로니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넌 어쩔 생각이지? 내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일 테지.”
키안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도와야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내키지 않았다.
“전하께서 힘든 상황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이란은 키안의 거절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키안은 초조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기다렸다는 듯 한 발짝 다가서더니,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네 말대로, 널 보내주겠다.”
“네?”
처음엔 세이란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초조함을 드러내며 성마르게 말했다.
“기사단을 그만두겠다던 네 제안, 받아들이지. 대신 넌 내 가짜 약혼녀를 해주면 돼. 어때?”
“하지만…….”
“왜 거절하는지 모르겠군. 네게도 손해될 게 없는 제안인데 말이야.”
키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이란의 말처럼 너무도 매혹적인 미끼였다.
“아직도 망설일 이유가 있는 것이냐?”
세이란이 망설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키안은 가짜 약혼녀 역할을 하는 동안 여장을 해야 한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폐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릴 순 없습니다.”
“그건 걱정 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상대가 눈치가 없긴 하지만, 내 인내심이 곧 바닥이 날 예정이거든.”
그 말은 성 캐서린 수도원에 가 있는 베로니카를 설득해 키엘체로 오게 만드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란 뜻인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키안의 대답이 떨어지자, 세이란은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거짓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대신 약속은 꼭 지켜주십시오.”
“당연하지.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모든 게 끝이 나면 키안은 기사단에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었다.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비가 황실 기사단의 단장으로 있을 순 없기 때문이다.
세이란이 키안의 팔을 붙잡더니,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곤 키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걱정할 것 없다, 키안. 난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으니까.”
‘심장이 왜 이렇게 뛰는 거지?’
분명 세이란의 제안은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아니었다.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시킨 것도,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한 것 역시 자신이 아닌 레이디 베로니카를 위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심장이 미치기라도 한 듯 뛰고 있었다.
“대신 스킨십은 금지입니다. 그리고 허락 없이 키스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이란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키안을 품에서 밀어내며 말했다.
“잠깐, 그건 안 돼. 그리고 나는 분명 너와 약혼한 사이에 하는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던 걸로 아는데?”
세이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키스까지 했으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그가 하는 대로 모든 걸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께서도 남자인 저와 키스며 다른 이것저것을 하는 건 불쾌하실 겁니다. 그러니 하는 척만 했으면 합니다.”
“안 돼. 그리고 나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기하던 참이었거든. 설마 내가 남자인 널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까지 들 정도였다.”
“노, 농담 그만하십시오.”
키안이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자 세이란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다. 확실한 건 난 여자를 좋아하거든.”
세이란의 말에 키안은 안심했다. 사실 세이란과 14년이나 함께 지내오면서 그가 그쪽 취향을 갖고 있다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로열 아카데미 시절에도 주변엔 모두 남자뿐이었지만, 자신 외엔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까이 지냈던 게 에드윈 리치문트 정도일까?
“여전히 널 놀리는 건 재미있어. 반응이 신선하거든. 그런데 조금 전 든 생각인데 너 살이 좀 찐 거냐?”
“네?”
세이란의 질문에 키안은 그제야 자신이 목욕가운 차림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미쳤어. 이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키안은 재빨리 고갤 숙여 입고 있는 가운을 확인했다. 다행히 목욕가운의 앞섶은 단단히 여며져 있었다.
“널 안았을 때 뼈만 잡힐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부드러웠거든. 그래서 살이 좀 찐 건가 해서.”
“아, 집에 돌아온 후 식욕이 왕성해졌습니다. 그래서 살이 좀 붙은 모양입니다.”
“그래? 하지만 좀 이상해. 유독 가슴 부근만 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가슴이란 말에 키안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행히 어둠 속이라서 세이란이 키안이 얼굴을 붉힌 걸 보지 못했을 테지만, 자꾸 그의 시선이 가슴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안 되겠어. 최대한 빨리 이 방에서 그를 내보내야 해.’
“밤이 늦었습니다. 제가 세이란 님께서 돌아가실 수 있게 불을 켜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담을 넘어갈 생각이거든. 그전에 이리 와 머릴 좀 눌러줄 수 있을까? 며칠 동안 머리가 아파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
“머리가요?”
세이란을 내보내려던 키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세이란이 키안의 침대에 걸터앉더니 어서 해달라는 듯 눈을 감았다. 세이란은 키안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 당황해 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말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때 키안의 손끝이 세이란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조심스러운 성격답게 세이란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손길이 섬세했다.
“하아- 살 것 같군.”
세이란의 반응에 키안 역시 안심한 듯 손끝에 힘을 주며 말했다.
“불편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으음, 전혀. 잠이 올 것 같아.”
세이란은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신경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제가 실수라도 한다면, 저로 인해 난처해지시는 건 전하이십니다.”
키안의 목소리에 담긴 걱정을 세이란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세이란이 눈을 떠, 키안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옆에 앉게 했다.
“키안, 말했잖아. 넌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것 역시 다 생각해 두었으니 넌 내 옆에만 있으면 돼. 도망칠 생각 말고.”
“하지만 전 한 번도 레이디로서의 교육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사교계에 나가려면 갖춰야 할 게 아주 많다고 들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전, 분명 실수할 겁니다. 그리고 귀족들은 그런 저를 손가락질할 테고요.”
키안의 말에 세이란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떠올랐다.
“키안, 넌 네 자신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제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
“네가 얼마나 우아하고 기품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몹시…….”
‘예쁘다’는 말은 입 밖으로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했다간 분명 화를 내며 조금 전 했던 제안 역시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할지도 몰랐다.
“몹시 뭡니까?”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