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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0화 (10/139)

제 10 화

“제길, 꿈이라고 생각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이란은 자신을 품고 지독한 쾌락에 몸을 떨며 기뻐하던 키안이 정신을 잃기 전 했던 말 때문에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세이란은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키안을 보며, 미간을 접었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해야 하나?”

사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상황이었다. 키안이 가면무도회에 나타난 것부터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거기다 음료에 섞여 있던 미약을 마시는 내용은 자신이 본 미래엔 없던 내용이었다. 그리고 키안이 스스로 비밀을 말하기도 전에 안아버리다니.

제길, 일이 복잡하게 꼬여 버렸다. 특히 자신이 본 미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바꾼 삶인데, 여기서 어긋나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세이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결국 키안이 잠들기 전 했던 말처럼, 꿈으로 돌려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제길,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덮는 방법밖엔 없겠어.”

세이란은 욕망을 참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다. 그리고 미약이란 게 열만 내리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안일함 역시도.

그가 손을 뻗어 키안의 머리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다시 봐도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든 키안이 예뻐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자신에게 매달리던 키안의 모습이 떠오르자 진정됐던 심장이 다시 뛰었다.

“한 번으로 안 될 줄 알았어. 자고 있는 모습만 봐도 이렇게 발정을 하는데. 앞으론 어떻게 참아내야 할지 모르겠군.”

세이란은 키안을 안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되어버린 이상 시도 때도 없이 원하게 될 것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키안에 대한 소유욕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바꿀 것이란 것도.

“알면 화를 내겠지. 내가 널 살리기 위해 뭘 포기했는지 알면 말이야.”

세이란은 손을 뻗어 천천히 키안의 등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레이디들이 입는 속옷 사이로 키안의 검상이 살짝 보였다. 키안은 미약에 취해 반쯤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이 상흔을 보이는 걸 꺼려했다. 무의식에서도 검상에 대한 상처를 끌어안고 있었다.

세이란은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키안을 내리누르는 지독한 속박의 굴레를 벗겨주겠다고. 세이란이 고갤 숙였다. 그러곤 키안이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잠시 후 세이란이 고갤 들자, 키안의 새하얀 목에 키스마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건 약속이다, 키안. 네가 오늘의 기억을 모두 잊어도 내가 한 약속은 남는다는 의미야.”

세이란은 키안의 목에 생긴 붉은 흔적을 보며 그렇게 맹세했다.

잠시 후 세이란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깨끗한 물수건을 가져와 키안의 몸에서 자신의 흔적을 닦아냈다. 침대 아래 떨어져 있던 속옷과 드레스까지 입히자, 오두막은 뜨거웠던 정사 따윈 없었다는 듯 말끔해졌다.

“이제 한 가지만 남았군.”

세이란은 키안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짙은 녹색이던 그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더니,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유스타나 제국의 황실의 핏줄. 그리고 그 적통 후계자에게만 전해지는 특별한 능력에 대한 얘기는 그 어떤 역사서나 고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특별한 힘은 존재했고, 몇백 년 만에 한 번씩 그 힘을 온전히 갖고 있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 힘은 천 년 전 유스타나 제국에 남아 있던 마법사의 힘인 유스타나의 별을 파괴시킬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세이란이 검을 들어 자신의 손을 베었다. 그러자 손바닥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세이란이 흘러내린 붉은 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붉은 피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금빛으로 변하더니, 독특한 형태의 문양을 만들어냈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기억의 정지.”

세이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빛으로 빛나던 세이란의 피가 키안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곤 붉게 변해 있던 그의 눈동자 역시 다시 깊이를 알 수 없는 녹색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

“황제 궁으로 가야겠다.”

세이란은 셀서스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던 시종장 아이크와 함께 황제 궁으로 향했다. 키안을 오두막에 혼자 남겨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중간에 패트리샤에게 연락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자신보다 패트리샤가 함께 있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였다.

“폐하의 침전엔 누가 있지?”

“10년 동안 폐하를 모시던 시녀가 있을 겁니다.”

아이크의 말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10년이나 아버지 윈슬러 곁에 남아 있는 시녀가 있다고?

세이란은 까다롭고 사람을 믿지 않는 황제 윈슬러 옆에서 10년이나 있었다는 시녀가 대체 누군지 궁금했다.

“내가 알아보라고 명한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지금 조사 중입니다. 최근 1년 사이에 새롭게 황궁에 배치된 시종들과 시녀들의 리스트를 뽑아놓았지만, 아직까진 특별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좀 더 면밀하게 그들의 신변을 조사해. 분명 그들과 관련된 것들 중 실마리가 있을 테니까. 특히 침전을 드나드는 시녀와 황실에 식재료를 관리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살피도록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황제 궁의 침전에 도착한 세이란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세이란이 걸음을 멈췄다. 청량하고 기분 좋은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침전 안은 어두운 죽음의 기운이 아니라, 맑고 청량한 공기로 가득했다. 누군가 이 방을, 아니, 황제인 윈슬러를 진심을 다해 돌보고 있었다.

“누가 커튼을 열어놓았지?”

세이란은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침대 옆에 말없이 서 있던 시녀 하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달빛이 좋아 제가 커튼을 열어놓았습니다. 평소 폐하께선 답답한 걸 싫어하셨습니다.”

세이란의 시선이 시녀에게 향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시녀는 셀서스 궁에 있는 다른 시녀들과 똑같은 제복 차림이었다. 특별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침대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윈슬러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언제부터 폐하의 침전에 있었지?”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10년이라… 시종장 아이크가 말했던 시녀가 이 여인인 모양이었다. 세이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녀를 보았다. 그러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설마 아버지께 여자가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 왜 몰랐던 거지?’

세이란은 새삼 놀랐다. 지금껏 어떻게 감쪽같이 황궁의 사람들의 눈을 속여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은?”

“엘렌입니다.”

엘렌이 고갤 들자, 고요한 갈색 눈동자가 세이란을 향했다. 분명 자신의 서늘한 눈빛에 두려움을 느꼈을 테지만, 겉으론 표정을 잘 숨기고 있었다.

‘역시, 아버지가 선택할 만하군.’

세이란은 조금 안도했다. 아버지를 믿고 맡길 사람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엘렌, 앞으로 이 침전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너를 통해야 할 것이다.”

세이란의 명령에 평온하던 엘렌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커졌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셀서스 궁의 시녀장님 소관이십니다. 저에게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시녀장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앞으로 이 침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너에게 맡기겠다. 책임 역시 너에게 물을 것이니 철저히 관리하도록 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엘렌의 표정이 변했다. 갈색 눈동자가 무수한 감정으로 일렁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세이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의 명을 목숨처럼 따르겠습니다.”

세이란은 고갤 끄덕인 후, 침대에 누워 있는 윈슬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할 겁니다. 제가 전쟁터에 나가기 전 했던 그 약속을 말입니다.”

세이란은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윈슬러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그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이란은 이 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오두막에 키안을 남겨둔 채 황제의 침실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이란은 황제의 침전을 나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시종장인 아이크가 따랐다.

“전하, 저 시녀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 저 여인은 폐하의 사람이다. 셀서스 궁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돌볼 거야.”

아이크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커졌다. 폐하의 사람이란 말은 엘렌이란 시녀가 황제인 윈슬러의 여인이란 뜻이었다. 지금까지 곁에서 모셔왔지만 그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깨어나시면 물어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어. 그리고 답을 들어야 할 것 역시.”

세이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

키안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어나니 이곳 오두막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가면무도회에서 세이란 님과 함께 갔던 여인이 키안이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패트리샤라고 소개한 여인은 차분한 모습으로 키안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차입니다. 마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키안은 패트리샤가 건네는 차를 마시며 재빨리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고, 또 패트리샤라는 여인 역시 왜 여기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왜?”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어제 레이디께서 마셨던 음료에 수면제가 들어 있었습니다.”

“수면제라고요?”

키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젯밤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자신이 표범 가면을 쓴 남자를 위협했던 것과 한 남자가 자신을 돕기 위해 어깨를 붙잡은 것까진 기억이 났다.

“치근대던 표범 가면 남자를 떼어낸 직후 붉은색 음료를 마셨던 게 기억이 나는군요.”

“아마 그 표범 가면을 쓴 남자가 수면제를 탄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제 패트리샤와 함께 나갔던 분은 어디로 가셨나요?”

“저와 함께 있던 분이라고 하면?”

“그러니까…….”

키안은 전하라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곳은 신분을 속이고 참석하는 가면무도회였다. 아무리 세이란과 밤을 보냈다고 해도 패트리샤가 세이란의 이름이나 신분에 대해 알 리 없던 것이다.

“제 말은 큰 키에 검은 옷을 입고 계셨던 남자 분을 말하는 겁니다, 아주 잘생긴.”

“아아, 기억이 나는군요. 그분은 레이디께서 쓰러지신 직후 표범 가면의 남자를 붙잡으러 가셨습니다. 단단히 혼쭐을 내신다고 하시면서요.”

“그럼 전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 물어도 될까요?”

키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패트리샤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그 잘생기신 분께서 기다리라고 하셨지만, 레이디께서 정신을 잃고 잠드시는 바람에 급히 옮겨야 했습니다. 가면무도회는 워낙 위험한 곳이라 잠든 레이디는 귀족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거든요. 나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오는 동안 댁이 어딘지 여쭸지만 대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패트리샤의 말을 듣곤 키안은 납득했다. 패트리샤는 잠든 키안이 나쁜 일에 휘말리지 않게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고마워요, 패트리샤. 덕분에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렀다. 뭔가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작은 꾸러미를 건넸다.

“오늘 새벽에 어떤 분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패트리샤가 건네는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뭔지 물어도 될까요?”

“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전해 드리라는 말만 들어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키안의 거절에 패트리샤가 오두막을 떠나려는 듯 의자에 걸어놓았던 외투를 집어 드는 게 보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급한 볼일이 있어 먼저 가야 합니다. 밖에 말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쓰셔도 됩니다.”

키안 역시 따라 일어섰다.

“패트리샤, 나중에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데. 이곳으로 오면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이곳은 가끔 사용하는 곳이라 없을 겁니다. 만약 저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파튬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파튬.”

패트리샤가 인사를 한 후 서둘러 오두막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키안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더 혼란스러웠다.

키안은 꾸러미를 천천히 열어보았다. 그곳엔 다행히도 귀족들이 즐겨 입는 옷이 들어 있었다.

“대체 누가?”

하지만 곧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세이란이었다. 분명 갑자기 사라진 자신이 걱정돼 밤새 수소문을 했을 테고, 패트리샤가 자신을 데려갔다는 걸 알고는 옷을 보낸 게 분명했다.

“밤새 걱정하셨을 테지.”

키안은 재빨리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은 후 꾸러미에 넣었다. 그러곤 그가 보내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남자 옷을 입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키안은 꾸러미 안에 들어 있는 드레스를 보며, 다시는 입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오두막을 나오기 전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다 목에 난 붉은 흔적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벌레가 문 건가?”

하지만 벌레가 문 것치곤 가렵지 않았다. 유난히 눈에 띄는 붉은 흔적을 가리기 위해 앞주머니에 넣어져 있는 행커치프를 꺼내 목에 둘렀다. 그러곤 서둘러 오두막을 나와 레녹스 저택으로 향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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