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7 화
“죄송하지만,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러지 말고, 제가 조용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친절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곧 친구가 올 겁니다.”
키안은 감정 없이 서늘한 목소리로 사내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술에 취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누군지 몰라 겁을 상실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키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표범 가면을 쓴 귀족 이 자꾸만 찝쩍거렸다.
‘눈치가 없는 게 확실해.’
키안은 자신의 가슴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흘끗거리는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누는 모습을 상상을 했다. 차가운 단검이 사내의 목에 닿는 순간 거만하던 표정은 사라질 테고, 자신을 멸시하던 눈빛은 두려움으로 바뀔 게 뻔했다.
키안은 이런 자들의 속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약한 자에겐 강하고, 강한 자에겐 한없이 비굴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돌아가 주십시오.”
키안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정중했다. 하지만 한기가 느껴질 만큼 싸늘했다. 문제는 표범 가면의 사내가 그 경고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다는 데 있었다.
“내 생각과는 다르군. 난 문제를 일으키고 싶거든.”
낄낄거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은근슬쩍 건드리는 사내를 보며, 키안은 속으로 욕설을 뱉어냈다.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사내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를 만들어선 안 됐다.
‘전하의 명령을 들었어야 했어. 괜히 오기가 발동을 해서는.’
키안은 자신이 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 어딘가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던 여인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고, 자꾸만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마디로 누군가 싸움을 걸면 피하지 않고 다 상대해 줄 만큼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도도한 것까진 좋은데, 너무 튕기는군.”
“지금 뭐라고 했지?”
정말 눈치가 없었다. 그것도 죽을 자리에만 발을 뻗을 만큼. 사내의 비아냥거림에 키안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러자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탐욕스럽게 자신의 몸을 노골적인 눈빛으로 훑어 내렸다. 키안이 마침내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난 기가 센 여잘 좋아하지. 특히 침대 위에서 화끈하게 날 죽여준다면, 더더욱 바랄 게 없고 말이야. 어때, 나와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게?”
사내가 고갤 숙여 키안의 귓가에 소름 끼치게 끈적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럽고 추잡한 음담패설에 키안의 입가가 서늘하게 비틀렸다.
“조용한 곳 어디?”
키안의 물음에 표범 가면을 쓴 사내의 입이 찢어질 듯 위로 말려 올라갔다. 사내가 히죽거리며 지나가던 여종원의 가슴을 무례하게 주물렀다. 그의 행동에 여종원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키안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어디긴 어디야? 내 다리 사이지.”
멍청한 사내는 정욕에 눈이 멀어 키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휴우, 정말 세이란 님의 말처럼 여기는 위험한 곳인 모양이었다. 가면으로 신분을 감추고 오직 쾌락과 욕망을 채우는 곳이었다.
“꺼져. 너 따위완 어울려 줄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처음으로 표범을 쓴 사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짙은 냉기를 그제야 느낀 모양이었다. 사내가 살짝 몸을 움츠리며 반 발짝 물러서며 몸을 빼는 것이 보였다.
“뭐? 다시 말해봐.”
“죽고 싶지 않다면, 꺼져. 다음번엔 경고 따윈 없을 거야.”
키안이 뿜어내는 냉기에 사내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자신이 여인의 경고에 쫄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 이내 입가를 씰룩였다. 그러곤 실력 행사라도 하려는 듯 키안의 손목을 확 그러쥐었다.
“더럽게 튕기는군. 누가 모를 줄 알아? 네가 여기에 온 목적이 힘 좋은 사내를 골라, 밤새 다릴 벌리곤 암캐처럼 헐떡이려 한다는 걸 말이야. 내가 예뻐해 주겠다는데…… 헙.”
단전을 울리는 나직한 신음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부딪히며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표범 가면을 쓴 사내가 바닥에 넘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눈 깜짝할 새였다.
“경고는 없다고 했지?”
키안은 바닥에 엎드려 거친 숨을 내쉬는 사내를 서늘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러곤 앞에 놓여 있던 붉은색의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표범 가면을 쓴 사내가 가져온 음료였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너……. 감히 날…….”
음료를 다 마실 때쯤, 사내가 아픔을 참으며 고갤 들었다. 사내가 쓰고 있던 표범 가면은 바닥에 부딪힐 때 반이 쪼개져 있었다. 마치 남자의 구겨진 자존심처럼 보였다. 키안은 사내의 사타구니를 쏘아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다린 안 벌려. 대신 네놈의 그 작은 물건을 다신 사용할 수 없도록 잘라줄 수는 있지. 믿지 못하겠거든 잘 봐.”
키안이 머리를 장식했던 핀을 뽑아 사내의 목에 대었다. 날카로운 핀이 목에 닿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너, 누구야?”
사내의 목소리가 불쌍할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다신 약한 사람에게 함부로 굴지 마.”
잔을 내려놓으며, 키안이 남자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사내가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재빨리 도망을 쳤다.
“휴우- 이제 정말 돌아가야겠어.”
키안은 벨라를 찾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키안이 벨라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어어-”
왜 이러지? 갑자기 현기증이 나다니. 키안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현기증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갑자기 몸이…….’
이상했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왜 이러지?”
키안이 머릴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선명하던 주변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자꾸만 주위가 빙빙 돌았다.
“괜찮으십니까?”
누군가 어깨를 붙잡는 힘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당신은 조금 전……?”
“기억하고 계셨군요. 저는 스텐호프입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십니까? 열이 있는 것 같군요. 혹시 함께 계시던 그분은…….”
키안은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남자의 목소리가 자꾸만 윙윙거릴 뿐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자꾸 움직이는 걸로 보아 뭔가를 계속해서 묻는 거 같았다. 하지만 키안은 혀가 굳은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키안은 불길한 예감에 혀를 힘껏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자, 몽롱하던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상해. 몸이…….’
한순간 맑아지는 것 같던 의식이 다시 흐려지려 했다. 제길, 빨리 벨라를 찾아야 했다. 키안이 자신을 스텐호프라고 소개한 남자를 밀어낸 후 벨라를 찾기 위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강한 힘이 키안의 팔을 붙들더니 힘껏 끌어당겼다.
“윽, 머리가…….”
몸이 돌려세워지자, 키안은 어지러움에 울컥 구역질이 치밀었다. 가까스로 구역질을 참아낸 키안이 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내가 분명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아아, 그게… 지금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다행이었다. 키안은 세이란을 보자 안도감이 밀려들어 왔다.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에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세이란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이제 오셨군요. 레이디께서 불편하신 듯해서 도움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남자의 지적에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길, 직접 키안이 마차를 타고 가는 걸 눈으로 확인해야 했어야 했는데.
세이란은 자신에 품에 안겨 얼굴을 묻고 있는 키안을 보며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하지만 키안이 이렇게 무모하게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사례는 하도록 하지. 이젠 내가 왔으니, 가봐도 좋다.”
세이란이 키안을 품에 안았다. 그러자 힘없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키안이 고갤 들었다.
“이제 볼일은 끝나신 겁니까? 그 여인과 말입니다.”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그에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마치 자신이 그 여인을 질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이라고?”
“네,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 미인……. 엇, 저기 있다.”
키안의 시선이 세이란의 뒤쪽에 서 있는 여인에게 향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자신에게 고갤 숙이는 게 보였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모르겠군. 설마 패트리샤가 내 애인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패트리샤라는 이름을 듣자, 키안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세이란은 절대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제외하곤 지금껏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을 정도로 서늘한 성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저 화려한 미인을 패트리샤라고 이름을 부르다니.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게 뭐가 어땠다는 거지?”
“저만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지금까지 저에게만…….”
세이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키안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키안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마치 약에 취한 듯…….
“너, 뭘 마신 거야? 술은 아닌 것 같고. 패트리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
세이란의 명령에 패트리샤가 키안이 마셨던 음료의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향기를 맡더니 남아 있는 음료를 살짝 맛을 보았다.
“아주 소량이지만 미약입니다.”
“누군가 그걸 음료에 탔다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사실 가면무도회의 성격상 파트너가 정해진 후 그다음 단계가 바로 섹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파튬에선 자정이 넘어가면, 서비스의 일종으로 소량의 미약을 음료수에 넣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마 레이디께서도 미약을 탄 음료를 드신 모양입니다.”
패트리샤의 말에 따르면 무도회에 참석한 자들의 쾌락을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음료에 미약을 섞었다는 뜻이다.
“제길!”
세이란은 욕설을 내뱉었다. 가면무도회란 게 생각보다 더 음란하고 위험스러운 파티인 듯했다. 사실 유스타나의 제국법상 결혼한 귀족들에겐 불륜이 큰 죄악이었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까진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건 흠이 되지 않았다. 레이디든, 귀족이든. 그래서 결혼한 귀족들은 신분을 속인 채 이런 은밀한 만남을 가면무도회를 통해 계속하는 모양이었다.
“패트리샤, 밤을 보낼 곳이 필요하다.”
세이란의 말에 처음으로 패트리샤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었다. 세이란이 약에 취해 정신을 잃은 여인을 위해 집을 구하다니.
패트리샤는 레이디를 대하는 세이란의 태도를 보며,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앞으로 자신이 세이란에게만큼이나 충성을 해야 할 사람이란 걸.
“절 따라오십시오.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세이란은 키안을 품에 안은 채 패트리샤를 따라 비밀 사교 클럽인 파튬을 나왔다.
**
“저와 함께 온 레이디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벨라는 마차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키안과 함께 음료를 마시던 벨라는 잠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릴 비웠었다.
하지만 잠시 후 자리로 돌아와 보자, 키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당황한 벨라가 사색이 된 얼굴로 키안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 남자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더니, 다짜고짜 팔을 붙잡곤 파튬을 나온 것이다.
그는 벨라를 무작정 마차에 태운 후 아키텐 공작저로 가자고 말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벨라가 가면을 벗자, 남자 역시 가면을 벗었다. 벨라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황태자인 세이란의 최측근인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로열 아카데미의 교수로 있던 그는 유스타나 제국의 법무대신으로 임명된 자이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비밀 사교 클럽인 파튬에 전하와 리치문트 공작이 와 있는 걸까?’
벨라는 너무도 의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이 가면무도회 같은데 관심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남자들이란 모르는 거지. 전하께서도 여자에겐 관심도 없게 생기셔 선 조금 전, 여인과 함께 사라지셨잖아.’
벨라는 세이란이 여인과 함께 나가던 장면을 떠올리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앞에 앉아 있는 에드윈을 살폈다.
그는 세이란과는 반대로 학자풍의 미남이었다. 겉모습부터 젠틀하고 책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남자가 의외로 색을 밝힐지도 몰라.’
겉으론 굉장히 우아한 척 연기를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선 호박씨를 까는 레이디들도 많으니까. 분명 귀족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전하께 아키텐 공작부인을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함께 계셨다던 레이디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셨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그러니 한마디로 귀찮게 하지 말고,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입 다물고 얌전히 있으란 말처럼 들렸다.
“잠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쁘군요. 리치문트 공작님, 혹시 저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제가 꼭 알아야 하는 겁니까?”
“알 필요는 없죠. 하지만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셨으니, 해명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어떤 눈빛인지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에드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딱 잡아뗐다. 그리고 더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갤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젠 대놓고 나랑 말을 섞기 싫다고 밖을 보는 척하다니. 벨라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분명 멸시였다.
‘마치 천박한 여인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어.’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