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5화 (5/139)

제 05 화

2장.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전하, 밤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세이란이 고갤 들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리치문트 공작.”

“오전 내내 웃고 계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것참 이상하군. 난 그냥 서류만 본 것 같은데 말이다.”

시치미를 떼는 세이란을 보며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뭐지? 오늘 아침은 굉장히 이상하시군. 어젯밤과는 전혀 딴판이야.’

에드윈은 도무지 세이란이 밤새 기분이 좋아진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키안 레녹스를 만났으면 모를까…….

‘잠깐, 설마 그런 건가?’

하지만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어젯밤 세이란은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하고 힘든 모든 것을 감내하고 까칠하기 짝이 없는 세이란이 키안 레녹스를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보고 싶어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리치문트 공작, 귀족들은 여전히 내 결혼을 놓고 논의 중이겠지?”

“곧 사교 시즌이 시작되니, 황태자비 간택을 본격적으로 진행시킬 생각인 듯했습니다.”

세이란의 입가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절대 그들 뜻대론 되지 않을 거야.”

에드윈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황제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는 가문의 영애를 황태자비로 들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이번 사건을 일으킨 자들이 저지른 실수 중 가장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황제를 죽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잠들어 있던 세이란이라는 맹수를 깨워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계획은 있으십니까?”

“이제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그나저나 랜스터 가문에 출입하는 상단이 어디라고 했었지?”

“루시타니아 상단입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루시타니아 상단이라면, 루칸 백작이 연계되었겠군. 그리고 루시타니아는 셀서스 궁에 물건을 납품하는 상단이기도 하지.”

그의 의도를 눈치챈 에드윈은 긴장했다.

“전하께선 루시타니아 상단이 이번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셀서스 궁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사람을 심어놓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거든. 셀서스 궁은 물론이고 그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상단이 가장 유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만약 루시타니아 상단이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더라도, 뭔가 알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루시타니아 상단은 정보력을 수집해 파는 집단으로도 유명했으니까.

“오늘 밤 로체 거리로 잠행을 나가야겠다.”

“오늘 말입니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키엘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

키안은 지금 로체 거리로 향하는 아키텐 공작가의 마차에 앉아 있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하아- 벨라에게 생일 선물을 주지 못한 벌로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어.’

키안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그러곤 벨라의 권유로 입게 된 심플한 형태의 물빛 드레스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미친 게 분명해. 내가 여장을 하다니.’

사실 엄밀히 말해 여장은 틀린 말이었다. 키안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키안 레녹스 공작에겐 여장이었다. 유스타나의 최고의 기사라고 칭해지는 키안 레녹스 공작에겐 절대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이기도 했다.

키안은 고갤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벨라를 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에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아키텐 공작의 미망인은 자신의 고민을 눈치채지 못한 채 행복한 표정이었다.

제길, 어렸을 때부터 벨라가 엉뚱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황당한 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고민 끝에 키안이 벨라를 설득해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벨라, 미안하지만 이번 소원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 대신 다른 것으로 말해. 그건 꼭 들어줄 테니까.”

순간 들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실망으로 흐려지는 게 보였다.

“키안, 약속했잖아.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해. 누군가 날 알아보기라도 하면…….”

키안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주먹을 꼭 쥐었다. 사실 귀족들 중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는 자들이 있긴 했다. 귀족들의 일탈이라고 불리는 은밀한 사생활은 한때 유행처럼 번져, 귀족들 사이에선 공공연하게 행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자신처럼 감춰야 할 것이 있는 경우엔, 모든 일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레녹스 공작가는 멸문하게 될 거야.’

생각만으로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널 알아만 보지 못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키안?”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벨라, 내 말은 그게 아니야.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비밀이 있어. 지금 내 모습은 내 스스로 내 비밀을 폭로하는 꼴이야.”

“하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면 문제될 것 없는 것도 사실이잖아.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야. 다신 이런 부탁 하지 않을게. 그냥 나와 함께 파튬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나오면 돼. 말도 할 필요 없어.”

키안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설득하는 벨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런 모습으로 파튬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할 수는 없었다. 벨라를 실망시키더라도. 자신은 물론 레녹스 가문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벨라, 내 말 좀 들어봐.”

“키안, 너도 봤잖아. 네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런 널 보며, 키안 레녹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야. 날 믿어.”

키안 역시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가발을 쓰고 화장까지 한 상태에서 드레스를 입자, 정말 딴사람 같았다. 키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레이디가 뒤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벨라, 난…….”

키안이 거절하려는 순간, 벨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키안은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 기사들 사이에선 인간미라곤 없는 싸늘한 성격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벨라에겐 물렀다.

그리고 세이란과 카이우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벨라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키안, 너는 모를 거야. 내가 이런 날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난 절대 이뤄지지 않을 꿈이라고 생각했어.”

“벨라.”

키안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지자,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던 벨라가 키안을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곤 떨리는 목소리로 쐐기꼴을 날렸다.

“키안, 난 너와 함께 사교계에 데뷔하는 게 꿈이었어. 하지만 넌 로열 아카데미에서 검술 연습을 하느라 내 데뷔 파티에 오지 못했었지.”

“그 일은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벨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키안.”

키안의 사과에 벨라가 고갤 가로저었다.

“난 너와 함께 레이디로서 첫 데뷔를 하고 싶었다는 뜻이야. 오늘처럼 이런 모습으로.”

키안은 놀랐다. 벨라를 만난 건, 키안이 여섯 살 되던 해였다. 그날은 레녹스 공작가의 쌍둥이들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키안은 자신의 생일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채 아버지에 의해 옥탑에 갇혀 있었다. 어린 키안은 창문을 통해 생일 파티에 참석한 아이들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러다 한 여자아이가 아이들 무리에서 이탈했고, 길을 잃어버린 여자아이는 저택을 헤매다 키안이 있던 옥탑을 발견한 것이다.

호기심이 많았던 여자아이는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고 옥탑의 꼭대기에서 몸을 숨긴 채 파티를 구경하고 있던 자신과 마주친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던 여자아이가 바로 벨라였다. 그 후 친구 없이 옥탑에 갇혀 생활하던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쌍둥이 오빠의 배려로 벨라는 레녹스 공작가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키안은 어렵지 않게 벨라를 만날 수 있었다.

“몰랐어,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넌 네 어깨에 짊어진 짐만으로도 버거워 보였으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거야. 널 더 슬프게 만드는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달라. 레녹스가엔 카이우스가 있잖아. 이제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말이야.”

키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한 번도 벨라에게 자신의 의중을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벨라 역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벨라, 나 역시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이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카이우스를 위해서야. 그 아이에게 정당한 권리를 돌려주기 위해서.”

“알아. 그리고 그다음엔 네 삶을 살면 되는 거잖아.”

자신 역시 벨라의 말처럼 쉽게 해결되면 얼만 좋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스타나엔 제국법이 있고, 그 제국법을 뛰어넘는 관습법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관습법에 명시된 금기가 갖는 효력은 절대적이었다. 만약 그 금기를 깬 대상자가 황족이라 할지라도 유스타나 제국을 세운 구스타프 1세의 법령에 의거 즉결처형이었다.

“벨라, 그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카이우스에게 작위를 물려주게 된다면, 자신은 유스타나 제국에서 살 수 없다.

‘나를 모두 남자로 알고 있는 유스타나에선 내 자린 없어.’

그때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드디어 벨라가 이야기한 파튬이란 곳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망설이는 사이, 이젠 마차를 돌릴 기회마저 놓쳐 버린 것이다.

키안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내키진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벨라의 소원을 들어주는 방법밖엔 없을 것 같았다.

“키안, 도착했어. 나와 함께 가줄 거지?”

벨라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묻자 키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이상했다. 전쟁터에서 적과 마주했을 때보다 더 긴장이 되다니. 벨라가 마차 문을 열기 전 준비해 온 가면을 키안에게 건넸다.

“키안, 오늘 파튬의 무도회는 가면무도회야. 그러니 긴장할 것 없어.”

“가면무도회라고? 벨라, 일부러 날 속인 거야?”

키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자 벨라가 환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속인 게 아니라, 네 의지를 알고 싶었어. 네가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 미안해. 처음부터 솔직히 말하지 않아서.”

키안은 자신을 속인 벨라가 괘씸했다. 파튬에 오는 내내 엄청난 고민을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얼굴을 보일 걱정 같은 건 없었다는 생각이 들자, 안도하는 한편 조금 불쾌했다.

“정말 미안해, 키안. 용서해 줘.”

벨라가 두 손을 모으곤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그 모습에 키안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벨라에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키안의 표정이 누그러지기 무섭게 벨라가 가면을 다시 건넸다. 그러곤 자신 역시 가면을 썼다.

“키안, 고마워. 오늘은 내 평생 잊지 못할 무도회가 될 거야.”

키안이 고갤 끄덕이며, 가면을 썼다. 그러곤 벨라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다행스러운 건 파튬의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서인지 참석자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면 아래 신분을 감추고 무도회에 참석하다니. 생각해 보면, 조금 위험한 듯도 했다.

키안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허릴 폈다. 가면무도회여서인지 참석자들의 의상은 유난히 화려하고 대범했다. 레이디들이 입은 대부분의 드레스는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는 듯한 옷이었다.

“벨라, 혹시 전에도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적 있어?”

“아니, 나 역시 처음이야. 그래서 무지무지 흥분돼.”

잔뜩 흥분한 벨라와 달리 키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기사들 사이에서 가면무도회에 대한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그쪽으론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아니지만, 레이디들이 참석하는 점잖고 예의 바른 무도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벨라, 우리 돌아가는 게 좋겠어.”

키안이 벨라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다시 마차에 타기 위해 고갤 돌리 순간, 그대로 굳어졌다.

‘누구지? 누군가 날 보고 있어.’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키안이 재빨리 고갤 돌렸다. 가면 너머 너무도 익숙한 녹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여기에 왜 전하께서?’

키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가면을 쓴 자신을 알아보곤, 자신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도망쳐야 해!’

키안은 머릿속을 울리는 경고음에 재빨리 벨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벨라, 가자.”

“뭐? 이제야 도착했는데, 가자고?”

벨라가 키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키안은 그녀를 남겨둔 채 몸을 돌렸다. 최대한 빨리 세이란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얏!”

다음 순간 키안은 손목을 붙잡는 강한 힘에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자신을 끌어당기는 강한 힘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텼다. 고갤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사람이 누군지.

“날 봐.”

“…….”

귓가를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키안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러자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세이란이 눈앞에 서 있었다.

“대체 이 꼴로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키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이 쓴 가발이며, 옅게 화장한 얼굴을 지나 입고 있는 드레스를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키안은 그의 입가에 서서히 냉소가 떠오르는 걸 보았다. 세이란은 이 상황이 몹시도 불쾌한 모양이었다.

“저는…….”

혀가 굳은 것 같았다. 아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세이란이 기다렸다는 듯 고갤 숙여왔다. 그러곤 키안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취미가 있었는지 몰랐군, 키안 레녹스.”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얼어붙었다.

‘어쩌지? 이 모습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전하께 들켜 버리다니. 최악이야.’

키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꿈이길 간절히 바라며.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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