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4화 (4/139)

제 04 화

‘하아- 어쩌지. 이러다간 정말 한 침대에서 자게 될 거야.’

가죽 부츠를 벗기 위해 손을 뻗던 그가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고 있지? 너는 안 자?”

“그게 아니라, 여기 누우십시오. 전 전하께서 잠드시는 걸 보고 난 후, 다른 방에서 자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이 침대는 셋이, 아니, 넷이라. 함께 자기엔 무리거든요.”

키안이 카이우스와 그 옆에서 잠들어 있는 새끼 늑대까지 가리키며, 이곳에서 자신이 함께 잘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키안 레녹스, 너 변했다. 아니, 의리가 없어졌다고 해야겠군. 잘 생각해 봐. 난 네가 힘들 때 황궁에서 탈출해 너에게 왔었다. 그런데 힘들어서 찾아온 날 내쫓으려 하다니.”

“전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당황한 키안이 재빨리 그게 아니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세이란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라면, 날 쫓아낼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난 그날 밤, 네 손도 잡아주고 너에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기억하고 있겠지?”

당연히 기억했다. 그날은 자신의 부모인 레녹스 공작 부처의 장례식이 있던 날 밤이었다. 십대인 키안은 어린 카이우스의 보호자가 되었고, 또 죽도록 거부하고 싶은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날이었다.

어린 카우이스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키안은 너무 절망적이었다. 죽고 싶을 만큼.

그 순간 세이란이 자신을 찾아왔었다. 그러곤 그의 말처럼 손도 잡아주고, 침대에 억지로 눕힌 다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툴툴거리며 잔소리를 했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서야 키안은 그것이 아직 십대였던 세이란의 서툰 위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땐 감사했습니다.”

“그럼 잔말 말고 저 녀석이나 구석으로 밀어버려. 날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세이란이 침대로 올라오며, 침대 한가운데에서 잠을 자고 있는 카이우스를 가리켰다.

“전하, 이쪽은 좁습니다. 차라리 카이우스 옆에서 주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훨씬 편하실 겁니다.”

꼭 함께 자야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아니라 카이우스의 옆에 자는 쪽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세이란이 눈썹을 확 치켜 올리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온 것이지, 저 조그만 어리광쟁이 옆에 있으려고 온 게 아니야.”

그러니 당장 카이우스를 바깥쪽으로 옮기라는 뜻이었다. 키안은 난처함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뭐야, 싫어? 이젠 내가 이 어리광쟁이에게 밀린 모양이군.”

또다시 세이란이 카이우스와 자신을 비교하며 고집을 피웠다. 술 때문인 건가? 평소와는 다르게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났던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선 나와 있을 때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

로열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이란은 서늘하고 냉정한 태도로 사람을 대했다.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까칠하고 차가운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두려움과 경외의 눈빛으로 대했다.

하지만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는 예외였다. 지금처럼 숨김없이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자신 앞에서만 세이란은 냉정함이란 가면을 벗고 또래 소년의 얼굴을 했다. 그의 다른 얼굴을 아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키안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제 생각엔 전하께서…….”

억지를 부리는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세이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술을 마신 탓도 있었지만, 그의 눈가에 그늘이 져 있었다. 지쳐 보였다.

‘혹시 위로가 필요해 날 찾아오신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키안은 눈을 가늘게 뜨곤 그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키엘체로 돌아오신 후 주무시긴 하신 겁니까?”

“하루에 한두 시간? 암살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잘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키안은 손을 뻗어 흩트려진 세이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키안의 손목을 붙잡더니, 자신의 옆에 앉게 했다.

“뭐야, 너? 조금 전 날 쫓아내고 싶어 안달이더니. 이제야 내가 불쌍하게 여겨진 것이냐?”

그에게 정곡을 찔린 키안이 어색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어이없다는 듯 입가를 비틀었다.

“쳇, 넌 거짓말을 너무 못해. 이럴 땐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았으면, 당장 자릴 만들어.”

죄책감에 더는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키안이 포기한 채 침대에 오르려는 순간, 그가 다시 팔을 붙잡았다.

“키안, 난 잠만 잘 생각이다. 네가 원한다면, 손가락을 걸고 약속할 수도 있다.”

순간 키안은 긴장했다. 그의 목소리며 태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묘했다. 마치…….

‘설마 내가 여자란 걸 알고 있는 건가?’

이내 키안은 고갤 가로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만약 내가 여자란 사실을 알았다면, 세이란이 이렇게 오랜 시간 자신을 곁에 뒀을 리 없었다.

‘제국 법을 어긴 날, 아니, 자신을 속인 날, 절대 용서할 리 없어.’

키안이 불안감을 감추곤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왜 그러냐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우스를 옮기겠습니다.”

키안이 카이우스를 안아 옆으로 옮겨 자릴 만들어주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침대에 누웠다.

“왜 그러고 있어? 넌 안 자?”

“아, 자야죠. 잘 겁니다.”

순간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너, 내가 잠든 사이 소파에서 자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을 테지?”

순간, 뜨끔했다. 사실 그의 말처럼 그가 잠들면 소파로 갈 생각이었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어서 누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

세이란이 키안을 끌어당겨 자신 옆에 억지로 눕게 했다. 그러곤 움직이지 못하게 이불을 끌어당겨 목까지 덮어주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딴생각하지 말고 자도록 해. 정말 피곤하거든.”

세이란 역시 침대에 자릴 잡고 누운 후, 잠을 청하려는지 옆으로 몸을 돌렸다.

방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키안은 잔뜩 긴장한 채 천장만 쳐다보았다. 그가 옆에 있다는 생각하자 침을 삼키고, 숨을 쉬는 것조차 의식이 됐다.

‘하아,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자라는 건지.’

키안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자신과 달리 졸음이 오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뒤척였다. 몸만 살짝 카이우스 쪽으로 돌리면 지금보단 더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등 돌리지 마.”

순간 키안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사과와 함께 키안이 원래대로 몸을 바로 하자, 세이란이 다시 잠을 청하는 게 느껴졌다.

하아, 제길. 조금 더 깊이 잠들었을 때, 움직였어야 했었다. 키안은 눈을 질끈 감고는 그가 다시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세이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키안이 안도하며, 몸에서 힘을 뺐다.

“키안.”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몸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네, 전하.”

놀란 키안이 세이란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그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러운 감정에 키안은 재빨리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키안, 잠이 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잠이 올까? 의식을 잃고 누워계시는 폐하를 생각할 때마다 화가 나 미칠 것 같아.”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한 달 동안 키엘체에서 혼자 버텨왔을 그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든 위로해 주고 싶었다. 7년 전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힘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해드리면 잠이 올 것 같은지 말씀해 주십시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농담처럼 말했다.

“다 커서 끌어안고 자면 웃기겠지? 어렸을 때처럼 네가 꽉 끌어안아 주면 잠이 올 것도 같은데 말이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키안이 손을 뻗어왔다. 그러곤 강한 힘으로 그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너……?”

놀란 세이란이 고갤 돌렸다. 하지만 키안이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휴우­”

한숨과 함께 세이란은 고갤 바로 했다. 등에 온기가 느껴졌다.

사실 장난처럼 했던 말에 키안이 자신을 끌어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귀엽게 굴면 내 인내심이 바닥나잖아.’

세이란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키안을 불렀다.

“키안.”

“주무십시오. 제가 잠이 들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조용하고 어두운 방에 키안의 심장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려왔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변했다.

그를 끌어안은 키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의 몸 역시 뜨거웠다.

그 사실을 두 사람 역시 똑똑히 느끼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너도 참, 어쩔 수 없다니까. 난처한 부탁 같은 건, 거절하면 되는데. 이러면 자꾸 기대하게 되잖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세이란의 목소리에서 열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키안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뒤를 돌아본다면, 끌어안고 자는 것만으론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키안의 온기가 등에 닿자, 더 많은 걸 하고 싶었다. 더 많은 게 욕심이 났다. 예를 들자면… 키스 같은 걸.

“키안.”

또다시 세이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키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사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신경 쓰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못 들은 척할 생각이군.”

세이란이 피식 웃었다.

‘그래, 지금은 나도 모른 척해주지. 하지만 다음번엔 참아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키안.’

세이란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감이 조금씩 누그러지자, 이번엔 정말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는 키안의 숨결 역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벌써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이란이 몸을 돌렸다. 그러곤 잠든 키안의 얼굴에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고집쟁이라니까.”

사랑스럽다는 듯 키안의 뺨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갤 숙여 키안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자 키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미 깊이 잠들었는지 깨진 않았다. 세이란 역시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것이 세이란 데지레 구스타프와 키안 레녹스의 공식적인 두 번째 동침이었다.

**

‘하아- 미치겠네. 잘 자고 일어났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 건지 모르겠군.’

키안은 침대 위에 벌어진 때아닌 신경전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러곤 서로를 쏘아보고 있는 세이란과 카이우스를 번갈아보았다.

사실 키안은 카이우스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자신을 흔들어 깨우기 전까지 깊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뜬 순간, 자신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남자를 발견했을 때부터 평화는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건의 발단은 잠에서 깬 카이우스가 자신 옆에 누워 있는 세이란을 발견한 것부터가 시작인 듯했다.

그 소리에 잠이 깬 세이란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그 서슬에 카이우스가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며 깨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키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카이우스를 세이란이 못마땅한 얼굴로 쏘아보고 있었다.

“키안, 당장 저 칭얼거리는 못난이를 이 방에서 내보내도록 해.”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명령하자, 키안의 품에 안겨 있던 카이우스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헝님, 저나께서 저보고 몬나니라고 하셔슴미다. 카이우쯔는 절대 몬나니가 아닌데. 헝님께서 말쓰매 주십찌오. 이 방에서 나가셔야 할 분은 제가 아니라, 떼이란 전하시라고요.”

카이우스 역시 아직 어눌한 발음이긴 했지만, 그 기세만큼은 세이란에게 지지 않고 말했다.

키안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 내쫓아달라고 요구하는 두 남자 사이에 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카이우스, 뚝. 전하께서 시끄럽다고 하시잖아.”

“하지만 왜 떼이란 전하께서 이곳에 계시는 검미까? 헝님 엎자린 제 것입니다. 저 말곤 헝님 옆에 아무도…….”

“욕심이 많군. 꼬맹이 주제에.”

모른 척하고 있던 세이란이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듯 카이우스의 말을 잘랐다.

그러곤 예민해진 맹수처럼 잔인한 목소리로 키안의 품에 숨어 있는 카이우스를 을러대기 시작했다.

“너, 웃기지 마. 키안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내 것이었다. 늦게 태어난 주제에 형제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다니. 절대 안 되지. 내 것을 빼앗은 치사한 녀석은 너란 사실을 잊지 말거라, 애송이.”

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시점에서 자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두 남자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키안은 무례함을 무릅쓰고 그를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전하,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카이우스가 무서워 울고 있습니다.”

세이란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퉁한 모습이었다. 카이우스 역시 눈물을 그치려는 듯 코를 훌쩍였다. 키안이 한숨 돌리려는 찰나, 그가 기분 나쁜 투로 말했다.

“쳇, 내가 저 꼬맹이한테 밀리다니.”

세이란은 키안의 품에 안겨 있는 카이우스를 마땅찮은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지금껏 자신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르던 키안이었다. 하지만 요 꼬맹이가 태어난 후 예외가 생기기 시작했다.

쳇,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키안이 자신은 내팽개치고 울고 있는 카이우스를 품에 끼고 있는 모습을 보자,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간, 저 꼬맹이 때문에 키안의 눈 밖에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길, 키안이 요 꼬맹이를 살뜰하게 챙기는 동안엔 어쩔 수 없이 이 꼬맹이와 잘 지내는 척하는 수밖엔 없겠어.’

세이란은 한 발짝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사실 어린 꼬맹이를 상대로 실랑이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었다.

“좋아. 철없는 어린 꼬맹이는 시간과 함께 무럭무럭 크는 법이니까.”

그는 카이우스가 금방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더는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키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지금 문밖에서 집사인 가브리엘이 제가 나오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키안이 침대에 내려왔다. 그러자 침대에 남겨진 두 남자가 동시에 소리쳤다.

“안 돼. 가지 마. 난 이 꼬맹이와 절대 단둘이 있고 싶지 않다.”

“찔쯤미다, 헝님. 전하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안슴미다.”

옷장 문을 열던 키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러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그제야 세이란이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머릴 긁적였다. 카이우스 역시 꼬리를 내리곤 고갤 숙였다.

키안은 두 사람을 남겨둔 채, 방을 나왔다. 집사인 가브리엘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는 동안 두 사람이 친해지길 바랐다.

하지만 정작 방에 남겨진 두 사람은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서로를 쏘아보았다.

“좋아, 꼬맹이. 우리 협정을 맺는 건 어때?”

결국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세이란이었다.

“헙정이요? 그게 뭡니까?”

“쳇, 내가 협정이란 단어 뜻도 모르는 꼬맹이와 말을 섞고 있다니.”

세이란은 그런 자신이 한심했지만, 키안이 이 꼬맹이를 끼고 도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저 또똑합니다. 열시미 공부도 하고 있고요.”

“그래그래, 너 똑똑하니까 내 말 잘 듣도록 해. 이건 남자 대 남자끼리 하는 약속 같은 거니까.”

남자 대 남자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이우스가 고갤 끄덕였다.

“키안과 함께 있을 때만 친한 척하는 거야. 너도 키안이 화를 내는 건 싫겠지?”

세이란의 말에 카이우스가 순진한 눈망울로 고갤 끄덕였다.

“조쯥니다. 저도 헝님께서 찌러하는 건 하고 싶지 안커등요. 그리고 저도 원하는 게 있쯤미다.”

“너, 설마 지금 조건을 다는 것이냐? 꼬맹이 주제에 앙큼하군.”

“시르시면, 저도 약쪽을 지키지 않을 검미다.”

세이란은 어이가 없었다. 협정이란 단어의 뜻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우습게 봤더니, 제법 똑똑한 구석이 있었다. 뭐, 키안의 동생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좋아. 뭔지 말해봐.”

그러자 카이우스가 제법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세이란을 쏘아보며 말했다.

“우리 헝님께 뽀뽀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십찌오.”

순간 놀랐다. 어젯밤 잠이 들기 전에 키안의 이마에 입을 맞춘 걸, 이 맹랑한 꼬맹이가 본 모양이었다.

“내가 왜 그런 약속을 꼬맹이 너에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내 마음인데 말이다.”

“그럼 헝님께 말하겠쯤미다. 헝님께서 주무시는 동안 저나께서 헝님의 이마에…….”

“제길, 약속하면 될 것 아냐. 약속한다. 그러니 그건 키안에겐 비밀이다.”

세이란의 약속을 들은 카이우스가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작고 통통한 손을 내밀었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남자 대 남자끼리 약소글 할 땐, 악쭈를 해야 한다고 배웠쯤미다. 저나께선 그것도 모르셨습미까?”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저희 유모가요. 그리고 밥을 머글 땐 손을 꼭 씨서야 하고, 단걸 머근 후엔 양치도 꼭 해야 한다고 했쯤미다.”

자랑이라도 하듯 으스대며 말하는 카이우스를 보며, 세이란은 어이가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철없는 꼬맹이를 이용해 키안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던 일인데, 결국은 꼬맹이한테 당한 꼴이 되었다.

‘제길, 레녹스가의 사람에겐 너무 무르다니까.’

세이란이 턱을 치켜 든 오만한 꼬맹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

그러자 카이우스 역시 자신의 세 배나 되는 세이란의 손을 꼭 쥐었다. 별것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마치 매우 중요한 협정이라도 맺는 것처럼.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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