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3 화
전쟁터를 떠나 수도인 키엘체로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세이란은 한 달 동안 계속된 두통으로 인해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보다 잠을 통 자지 못해서인지 약을 먹어도 그때뿐,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제길, 머리가 또 지끈거리는군.”
세이란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이틀 전 전령에게 받은 편지를 다시 펼쳤다. 편지는 사흘 후면 키안이 군사를 이끌고 키엘체에 당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늦어도 내일쯤엔 키엘체에 도착하겠어.”
키안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한 달 동안 세이란을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키안을 떠올린 것만으로 두통이 사라지다니. 세이란은 편지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드디어 내일이군.”
한 달 전 세이란은 시종장 아이크의 편지를 받고 키안과 헤어져 키엘체로 향했다. 그가 셀서스 궁에 도착했을 땐, 황제 윈슬러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독에 중독된 상태로 의식 없이 사경을 헤매고 있던 것이다.
그는 황실 소속의 의사들에게 갖가지 처방을 명령했고, 그렇게 일주일이 흐른 후에야 윈슬러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의식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세이란은 윈슬러의 상태가 호전되자마자, 귀족회의를 소집했다. 이유는 황제의 건강 악화로 인해 국정 수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의 진짜 의도는 황제의 독살에 관여한 귀족들을 색출해 내기 위해서였다.
‘감히 황권에 도전하다니.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죗값을 치르게 해주지.’
하지만 세이란은 귀족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을 향해 검을 빼 드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던 귀족들은 그의 뜻밖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낀 듯 한껏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었다.
그들 역시 눈치챈 듯했다. 냉혹하고 잔인한 성격의 황태자가 검을 겨누기 전, 자신들에게 마지막으로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똑똑똑,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세이란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전하, 리치문트 공작님께서 뵙길 청하십니다.”
“들어오라고 해.”
이내 문이 열리고,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판독 결과 랜스터 공작가의 것이 맞았습니다.”
에드윈은 재빨리 문서를 꺼내 세이란에게 건넸다. 문서를 받아 든 세이란은 안에 적힌 독의 성분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역시 폐하의 사건에 렌스터 가문이 관련이 되어 있었어.”
문서를 내려놓는 세이란은 씁쓸하게 웃었다. 렌스터 가문은 유스타나 제국의 개국 공신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런 가문이 황제의 독살에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건, 반란의 뿌리가 아주 깊다는 의미였다.
“레녹스 공작의 말이 맞았군요. 이미 전하께선 모든 걸 다 알고 계실 것이라 했거든요.”
레녹스란 말에 세이란이 고갤 들었다. 조금 전까지 잔뜩 찌푸려져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생기로 빛났다.
“레녹스 공작을 만났나? 어디에 있었지?”
에드윈은 세이란의 반응에 몸을 바로 했다. 평소 눈치 없기로 유명한 에드윈조차도 그의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황궁으로 오는 길에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레녹스 공작을 만났습니다. 공작저로 간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돌아왔군.”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세이란은 키안이 키엘체에 돌아왔다고 생각하자, 자꾸만 심장이 들썩였다.
“아, 귀족회의에서 황태자비로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를 추천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관심 없다. 난 아직 황태자비를 맞아들일 생각 같은 건 없거든. 백날 떠들라지.”
세이란의 냉소에 에드윈 역시 고갤 끄덕였다. 귀족들의 속셈을 그가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레녹스 공작은 어땠지?”
“잠시 스친 것뿐이지만, 지쳐 보였습니다. 말로는 내일 전하를 찾아뵐 것이라고 하더군요.”
에드윈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리치문트 공작, 피곤할 텐데 오늘을 들어가도 좋다.”
세이란의 명령이 떨어지자,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뵙겠습니다, 전하.”
에드윈이 집무실을 나가자, 세이란은 다시 책상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까지 봐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다. 오늘 밤도 자긴 그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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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작은 도련님은 제가 방으로 모셔가겠습니다.”
유모인 에리스가 키안의 침대를 차지한 채 잠들어 있는 카이우스를 보며 말했다. 단잠이라도 자는 듯 카이우스는 키안이 데려온 새끼 늑대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였다.
“에리스, 오늘은 내가 데리고 잘게. 그만 쉬도록 해.”
“하지만 작은 도련님께서는 잠버릇이 심하십니다. 저러다 늑대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걱정 마. 내가 잘 볼게. 별일 없을 거야.”
키안의 말을 듣고서야 에리스가 안심한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방을 나가기 전, 따뜻한 눈빛으로 키안을 보며 말했다.
“주인님,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작은 도련님께서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 키안은 카이우스에게 약속했었다. 천 일이 되기 전까진 돌아오겠다고.
“에리스, 고마워, 내가 없는 동안 카이우스를 보살펴 줘서.”
“당연히 제가 할 일인 걸요. 피곤하실 텐데, 어서 주무세요. 내일 아침은 주인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으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에리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곤 안타까운 눈빛으로 키안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너무 마르셨습니다.”
두껍고 통이 넓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키안의 마른 몸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살이 찔 거야.”
에리스가 방을 나가자, 키안은 입고 있던 두꺼운 가운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잠들어 있던 카이우스가 본능적으로 키안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바짝 몸을 붙여왔다. 키안은 그런 동생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 큰다더니 그 말이 맞는 듯했다. 1년 사이 카이우스는 부쩍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키안이 떠나 있는 동안, 에리스가 교육을 시킨 모양이었다.
“하아, 어쩐다? 이제 결심을 해야겠어. 카이우스가 더 크기 전에 말이야.”
키안은 잠들어 있는 어린 동생을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레녹스 공작이란 작위는 응당 자신이 아닌, 카이우스의 것이었다. 만약 부모님께서 마차 사고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벌써 제자리를 찾았을 터였다.
하지만 레녹스가에서 일어난 두 번째 불행한 사고로 다시 모든 게 어긋나 버렸다.
“내가 죽었어야 했어.”
레녹스가에 일어난 두 번의 불행한 사고에서 죽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키안은 태어났을 때부터 불길함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유스타나 제국에선 쌍둥이는 가문의 불행을 가져오는 징조였다. 특히 남녀 쌍둥이는 더했다.
‘암묵적인 금기.’
제국법을 우선하는 그 금기는 귀족들은 물론 황실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바스락, 바스락.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소리에 키안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키안의 눈빛 역시 날카로워졌다.
새끼 늑대 역시 인기척을 느낀 듯 귀를 쫑긋 세우더니, 창문 쪽을 응시했다.
‘도둑이 든 건가?’
하지만 레녹스가에 도둑이라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키안은 품에 안겨 있는 카이우스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러곤 재빨리 베개 밑으로 손을 뻗었다. 서늘하고 익숙한 감촉이 느껴지자,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사그락, 사락. 이번엔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난간을 타고 누군가 2층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어쩐다? 섣불리 공격했다간 카이우스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키안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그러곤 모든 신경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침입자에게 집중시켰다. 잠든 척 있다가 침입자가 최대한 가까이 다가왔을 때 공격하는 게 최선일 듯했다.
털썩. 마침내 침입자가 방에 들어왔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도둑치곤 조심성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털을 바짝 곤두세웠던 새끼 늑대가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마치 침입자를 알고 있다는 듯.
“뭐야? 돌아오자마자 네 침대를 차지한 녀석이 있었군. 그리고 이 털북숭인 뭐지? 그새를 못 참고 또 주워 온 모양이지?”
불만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달빛 아래 익숙한 실루엣이 키안의 눈에 들어왔다.
“전하?”
키안이 고갤 들자, 세이란이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는 듯 새끼 늑대의 뒷덜미를 붙잡는 게 보였다. 그러자 새끼 늑대가 그의 커다란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낑낑거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를 드러내며 제법 자신에게 충성심을 내보이던 새끼 늑대가 세이란의 손에선 강아지처럼 꼬리 내린 모습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새끼 늑대도 자신보다 강한 자를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 말고 네 방에 들어올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세이란이 새끼 늑대를 손에 쥐곤 키안에게 흔들어 보였다. 어디서 주워 온 건지 묻고 있었다.
“국경지대의 숲에서 어미를 잃고 덫에 걸려 있던 녀석을 만났습니다.”
“불쌍해서 데려왔다는 것이군.”
세이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곤 자신의 손에 붙잡혀 꼬릴 흔들어대는 새끼 늑대를 보며 꾸짖듯 말했다.
“맹수 주제에 침대에서 잠을 자다니.”
세이란이 손가락을 튕겨 늑대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그 모습에 키안은 새끼 늑대와 세이란 사이에 묘한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음을 느꼈다.
같은 맹수끼리 통한다는 건가?
“늑대에게 관심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드릴까요?”
키안이 의외라는 듯 말하자, 세이란이 침대로 다가와 새끼 늑대를 침대 위로 툭 던져 놓았다. 그러곤 관심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전혀. 은빛 늑대가 충성심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저도 그 말은 들었습니다. 은빛 늑대는 영물이라 단 한 명의 주인과 반려를 선택한다고.”
“맞아. 맹수치곤, 의리가 있지.”
세이란이 침대를 돌아, 키안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키안은 긴장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자신이 얇은 잠옷 하나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어쩌지? 잠옷이 너무 얇아 가까이 오면, 몸이 그대로 비칠지도 모르는데.’
키안이 고민하는 사이 세이란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밤늦게 창문을 넘어오셔서, 놀랐습니다.”
키안은 긴장감을 감추곤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눈치챈 듯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놀란 거야? 네 방에 몰래 숨어들 자가, 나 말고 누가 또 있다고.”
“도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간 큰 도둑이라도, 황실 기사단의 단장 방에 숨어들 자는 없지. 미치지 않고서야, 네 단검에 죽을지 뻔히 알 텐데 말이야. 안 그래?”
맞는 말이긴 했다. 그렇지만 세이란 역시 늦은 시각에 담을 넘어 도둑처럼 찾아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키안이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세이란과 얇은 잠옷만 입고 얘길 하는 게 몹시도 신경이 쓰였다.
“왜? 일어나려고?”
“그게 아니라…….”
키안이 벗어놓았던 가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가운은 키안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에 의해 바닥으로 던져졌다.
“잘 건데, 이런 건 입어서 뭐하려고?”
그의 거친 행동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세이란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잘생긴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고, 서늘한 눈매는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특히 날카롭던 녹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짙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굉장히 퇴폐적이라 무척이나…….
“야해.”
키안이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입 밖으로 뱉어버리다니. 고갤 들어 조심스럽게 세이란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별말 아니었습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키안은 안도했다. 다행히 세이란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술 냄새가 느껴져,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술을 드신 겁니까?”
그제야 키안은 그가 평소와 다른 이유를 알아차렸다. 맙소사, 지금까지 한 번도 술을 입에 댄 적도 없는 세이란이 술을 마시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아아, 잠이 오지 않아서.”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괜히 마신 모양이야. 오지 말아야 할 많은 이유를 댔는데, 결국 여길 온 걸 보면.”
말을 들어보니 그는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 이성의 통제를 잃고 자신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술이 깰 수 있게 차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차는 뭐하려고? 자려던 것 아니었어?”
세이란이 의아한 얼굴로 키안을 보았다.
“어, 그게…….”
키안이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그의 말처럼 잠을 자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가 방에 있는데,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께서 무사히 돌아가시는 것을 본 후에 자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나도 오늘은 여기서 잘 생각이거든.”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여기서 잔다니. 절대 그럴 순 없었다.
“네? 여기서 말입니까?”
“그래. 처음 자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군. 7년 전에도 함께 잤으면서 말이다.”
세이란은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입고 있던 겉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키안은 너무 놀라 입술만 달싹였다.
“불편하실 겁니다.”
“난 상관없다, 네가 작으니까.”
그러니 문제될 게 전혀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제길! 어쩌지? 키안은 재빨리 머릴 굴렸다. 하지만 술에 취해 고집을 피우는 그를 억지로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툭 소리와 세이란의 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