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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화 (프롤로그) (1/139)

황제의 독사과

제 01 화

# 프롤로그

날카로운 검이 사정없이 갑옷을 뚫고 사내의 심장을 꿰뚫었다.

“헉-”

거친 신음과 함께 태란국의 기사의 무릎이 순식간에 꺾였다. 기사는 가슴에 박힌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스타나 제국을 상징하는 검은 사자가 새겨진 검에선 어느새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길.”

1년이란 긴 시간 동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다니. 기사는 밭은 숨을 내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쟁터를 쏘아보았다.

“하아- 어디 있는 거지? 대체 어디……? 콜록, 콜록.”

태란국의 기사는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검을 움켜쥐었다. 지독한 고통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기사는 마지막 힘을 다해 꺾인 무릎을 세웠다.

찾아야 했다. 죽기 전에 그자를 찾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하아, 제길!”

그자. 유스타나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떠나오던 날 꿈을 통해 본 미래, 그 속에 있던 사내를 죽여야 했다.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그 사내를 죽여야, 그래야…….”

전쟁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분의 운명 역시 바뀔 수 있었다.

허공을 헤매던 기사의 눈빛이 절망에 휩싸였다. 그러다 자신의 심장을 찌른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지독한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피로 물든 대지를 밟고 서 있는 그는 사신처럼 보였다. 또한 날카로운 검처럼 쏘아보는 녹색의 눈동자는 맹수의 그것처럼 잔혹했다.

“날 막지 마.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니 제발, 비켜. 나는 꼭 죽여야 할 자가 있다.”

“헛소리. 넌 아무도 죽이지 못해. 내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기사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사실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자의 검이 심장을 찌른 순간, 모든 것이 끝이 났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하늘빛 눈동자의 사내를 죽이기 위해 검을 들었듯, 이자 역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 역시도.

“맙소사, 당신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당신이 망쳐 놓은 거야.”

절망감에 기사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자신 외에 미래를 본 자가 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빌어먹게도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인 저자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자신이 은빛 머리카락에 하늘빛 눈동자를 한 기사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역시도.

“꿈도 꾸지 마. 넌, 처음부터 실패할 거였으니까.”

“미쳤군. 그 하찮은 기사 하나 때문에……. 헙.”

지독한 아픔과 함께 바닥에 처박힌 기사는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냉혹한 녹색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왜……. 쿨럭쿨럭.”

기침하는 기사의 입술 새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세이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사에게 다가가 그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검을 움켜쥐었다. 순간 기사는 세이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절망에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왜지? 나와 똑같은 걸 보았을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아직 견딜힘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세이란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더니, 검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비틀었다.

“윽-”

지독한 고통과 함께 기사의 심장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순식간에 기사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서렸다.

“대체 그자가 뭐기에 완벽한 미래를 버리려 하는 거지?”

“그 입 닥쳐, 혀를 잘라 버리기 전에.”

협박이 아니었다.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만 더 한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혀를 자를 터였다. 하지만 죽기 전에 알고 싶었다.

“후회할 거야. 생각지도 못한 가혹한 삶이 널 두고두고 흔들 테니까. 매 순간, 그자를 볼 때마다 지금 이 선택을 한 널 죽이고 싶어 할 것이다.”

순간 세이란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차갑기 짝이 없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난 너 따위가 아니야. 절대 후회하지 않아.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다. 내 선택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아이의 반응이지.”

기사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유스타나의 황태자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선 모든 것을 죽일 만큼 잔혹한 자임을.

“말도 안 돼. 헙-”

순식간에 세이란이 기사의 심장에 검을 빼냈다. 그러자 붉은 피가 흘러내리더니, 땅을 적셨다.

“하필 예언자의 별 아래 태어난 자였다니.”

세이란은 기사에게서 미련 없이 고갤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키안을 발견하곤, 천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제 끝났어.”

세이란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더는 눈앞에 서 있는 저 아이가 죽을까 불안해할 필요 없었다. 직접 놈의 숨통을 끊어놓았으니, 더는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죽어가는 키안을 보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키안의 생명력이 빠져나갈 때마다 느껴지던 그 지독한 상실감 역시.

“키안 레녹스.”

그 순간 키안이 쓰고 있던 은빛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목덜미까지 오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순간 얼음처럼 냉혹하던 세이란의 얼굴에 처음으로 인간적인 감정이 떠올랐다.

“후회라니.”

그건 나란 인간에 대해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를.

세이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키안에게 향했다. 그 어떤 방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손에 쥐어 있는 검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1장. 키안 레녹스

“단장님, 벌써 자정이 넘었습니다. 이 시각에 숲에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종자인 이레오가 몸에 묻은 피를 씻기 위해 숲으로 가려던 키안의 앞을 막아섰다.

위험하다니. 1년 동안 계속되던 전쟁은 끝났고, 위험은 없었다.

“아레오, 그럴 필요 없어. 넌 여기 있다가 전하께서 날 찾으시거든 바로 가겠다고만 전해줘. 곧 돌아올 테니까.”

키안이 아레오를 지나쳐 막사를 나가자, 아레오가 안심이 되지 않는지 키안의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이 숲은 영물이라 알려진 은빛 늑대의 서식처입니다. 혼자 숲에 가셨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아레오, 더 이상 내 말을 거역했다간 너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키안이 뿜어내는 서늘한 냉기에 아레오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제가 단장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레오가 머릴 긁적이며, 뒤로 물러서자 키안은 아레오를 남겨둔 채, 숲으로 향했다. 한 달 만이었다. 혼자 몸을 씻을 기회를 갖게 된 건. 그래서 키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레오의 말처럼 숲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대대로 맹수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레녹스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런 키안에겐 숲의 주인인 은빛 늑대라고 해도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때 멀리서 폭포 소리가 들렸다. 이 숲에서 작지만 깨끗한 호수를 발견한 건 정말 행운이었다.

호수에 도착한 키안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호수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물속에 들어가자 저절로 만족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호수 한쪽에 자릴 잡은 키안은 천천히 눈을 감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키안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 가냘픈 얼굴이 달빛을 받아 청초하게 빛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스락. 사박, 사박.

숲에서 들려온 낯선 소리에 눈을 감고 목욕을 즐기고 있던 키안이 눈을 떴다.

‘뭐지?’

키안은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가까운 곳에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인지 아니면 맹수인지 알 수가 없었다.

키안은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 들고 호수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풀숲으로 걸어가던 키안이 일순 걸음을 멈췄다.

처음엔 은빛으로 빛나는 털 뭉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낑낑거리며 바르작거리는 작은 털 뭉치가 뭔지 깨달았다.

“정말 은빛 늑대가 있었어.”

키안은 천천히 무릎을 꿇은 후, 단검으로 가시덩굴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뒷발이 묶여 버둥거리던 어린 늑대가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손안으로 코를 묻어왔다. 보송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키안의 입매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불쌍하게도 어미에게 버려진 건가?”

키안은 새끼 늑대를 품에 안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변엔 새끼 늑대 외엔, 그 어떤 기척도 없었다.

그때 새끼 늑대는 키안의 체취를 기억하려는 듯 킁킁거렸다.

찌익, 찌이익. 날카로운 소리에 고갤 숙이자, 새끼 늑대의 발톱에 걸려 셔츠의 앞섶이 찢어져 있었다.

“이런, 어쩌지?”

아무리 어린 새끼여도 늑대는 늑대인 모양이었다. 제법 날카로운 발톱이 자신의 셔츠는 물론, 몸을 감고 있는 붕대를 뚫고 살갗에 닿았다. 다행히 붕대가 여러 겹 감아져 있어 상처는 나지 않지만, 옷은 다시 입을 수 없게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제법이군. 새끼치곤 말이야.”

키안이 대견스러운 듯 내려다보자 새끼 늑대가 얼굴을 비벼왔다.

그 모습에 키안은 동생인 카이우스를 떠올렸다. 집을 떠나올 당시 카이우스는 여섯 살이었다. 어린 동생은 자신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우스의 눈가는 이미 붉게 변해 있었다.

‘좀 더 어리광을 피웠어도 좋으련만. 나 때문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어.’

카이우스가 태어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 그래서인지 어린 동생은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그것이 몹시도 안타까웠다.

키안은 손을 뻗어 새끼 늑대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새끼 늑대가 손등을 핥기 시작했다. 간지러웠다.

“생각보다 인간을 잘 따르네. 인간의 손을 탄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키안은 마치 길들여진 것처럼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새끼 늑대를 보며, 주위를 살폈다. 주인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위에선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키안이 고민하는 사이 손등을 핥던 새끼 늑대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이내 잠들어 버렸다.

“날 언제 봤다고. 경계심이란 게 전혀 없군.”

말과는 달리, 키안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게 걸렸다. 눈빛에 한기가 걷히자, 미소년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신비로운 빛을 띠며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변했다.

**

“단장님,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모시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키안을 기다리고 있던 아레오가 재빨리 다가왔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엇, 세상에. 숲에서 새끼 강아지를 주워 오신 겁니까?”

뭔가 말하려던 아레오가 키안의 품에 안긴 은빛 털북숭이를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새끼 늑대다. 어미 늑대에게 버림받았거나, 아니면 죽은 모양이야. 버려져 있었다.”

“그래요? 정말 안 됐네요. 이렇게 어린데 어미를 잃다니.”

“아레오, 이 녀석을 내 침상 위에 올려놔 줘. 아직은 새끼라 너에게 발톱을 드러내진 않을 테니, 안심해도 될 거야.”

키안이 아레오에게 새끼 늑대를 건넸다. 그러자 아레오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늑대를 키엘체로 데려가시게요?”

“우선은 그래야 할 것 같아. 난 전하께 다녀올게.”

“아, 맞다. 전하께선 지금 마구간에 계십니다. 제가 단장님을 모시러 가려던 이유가 바로 전하께서 곧 키엘체로 떠나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레오의 말에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와 함께 가는 게 아니라, 혼자 떠나신다는 거야?”

“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키엘체에서 전령이 왔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황실 문장이 찍힌 편지를 들고 있었거든요.”

“아레오, 넌 드레이크 경에게 가서 출발이 빨라질 것 같다고 전해.”

그 말과 함께 키안은 세이란이 떠나기 전 그를 만나기 위해, 마구간으로 향했다.

**

“키엘체에서 전령이 왔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키안의 목소리에 말 위에 안장을 올리던 세이란이 뒤를 돌아보았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야. 널 못 보고 떠나는 줄 알았거든.”

세이란은 가죽끈으로 안장을 단단히 고정시킨 후, 키안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밀어낼 새도 없이 힘껏 끌어안았다.

“전하.”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키안의 어깨가 굳어졌다. 하지만 그를 밀어내는 대신,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태도와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키엘체에 심각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신 겁니까?”

“아니, 아무 일 없다. 그러니 넌 여기에 있다가 군사들과 함께 키엘체로 돌아오면 된다.”

“저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은 침묵할 뿐 아무런 말도 해주려 하지 않았다.

“혹시 키엘체에서 반란이 일어난 겁니까?”

순간 세이란의 어깨가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고갤 들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키안, 네가 지금부터 할 일은 평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키엘체에 돌아오면 일주일 동안 휴가를 주지. 푹 쉰 후, 황실 기사단으로 복귀하면 돼.”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판국에 휴가라니. 키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위독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안 돼. 지금 내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거야?”

“저 역시 전하를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위험합니다.”

키안 역시 평소와 달리 강경한 태도로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던 그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내가 없으면, 쓸쓸한 모양이군. 함께 가겠다고 보채는 걸 보니.”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농담을 건네다니. 키안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항의했다.

“보채다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알고 있다, 키안.”

세이란이 손을 뻗어 키안의 어깨를 붙잡더니, 고갤 숙여왔다.

놀라 고갤 들자,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뭐, 뭐지? 라고 생각한 순간,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불을 스쳤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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