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모든 끝의 시작
나를 계속 기다린 것인지, 내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칼라일은 곧장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다 바로 두 걸음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커다랗게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던 칼라일의 귀 끝이 점점 붉어지더니 이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칼라일?”
“아, 잠깐만…….”
혹시 지금 내 모습이 이상한가? 혹시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지기라도……아니야. 하지만 잘 어울린다고 했잖아. 일부러 칼라일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자 칼라일은 짧게 숨을 삼켰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 주춤거리는 그의 소매를 잡고 살짝 흔들자, 그제야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리네.”
“그럼 아까 한 말은 예의상으로 한 말이었어?”
“그게 아니라, 멀리서 보아도 예뻤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 어울리고, 아름다워서……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말이야.”
칼라일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귓가에 걸린 귀걸이를 톡 건드렸다. 보석들이 맞부딪히면서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어쩐지 본 적 없는 귀걸이라고 생각했어……어때?”
일부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눈웃음을 지어 보이자, 칼라일은 아까보다 더 얼굴을 붉혔다.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의 머리 뒤로 새하얀 리본이 흔들렸다. 그제야 칼라일의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라 나도 모르게 리본 끝을 잡고 잡아당기자, 찬란한 금빛의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물론 짧게 자른 머리카락도 어울렸지만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머릿결을 따라 손끝으로 훑으니 칼라일은 그 손길이 마냥 좋은 듯 눈을 감고 내 손에 뺨을 비볐다.
“머리카락을 어떻게 다시 되돌린 거야?”
“마력도 슬슬 원래대로 돌아왔겠다. 여러 가지 마법을 써봤어. 그러다가 복원 마법을 이용해봤지. 머리카락까지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복원 마법이라. 그럼 이 헬리오도르 저택도 복원 마법으로 되돌린 건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자 생각보다 일반저택 같으면서도 뭔가 분위기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벽에는 수많은 책이 꽂혀있었고, 은빛 카펫 위에 자리한 소파는 살짝 색이 바래져 있었다. 그리고 저택 기둥마다 박힌 마력석들이 보였다.
“네가 헬리오도르 저택에 한번 가보고 싶어 했잖아.”
“그래, 그랬었지.”
“사실 잔해밖에 안 남아있어서, 내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를 복원해봤어. 제대로 복원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
“괜찮아. 나는 네가 지내던 곳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밖의 모습은 성 같아 보였는데 내부는 밖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기둥에 손을 대자, 마력석이 반응을 하며 빛났다. 그리고 벽에서 계단이 나타나더니, 이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형태가 갖추어졌다.
“이층으로 가볼래?”
“이층도 복원했어? 이 층에는 뭐가 있는데?”
그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자, 튀어나왔던 계단이 다시 벽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끝없이 이어진 복도의 바닥에는 일층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있었고, 맨 끝에는 방이 있었다. 다른 방은 없고 저 방 하나만 있는 건가? 문득 궁금해진 마음에 방 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칼라일이 다급하게 내 앞을 막아섰다.
“저 방 말고 다른 곳 먼저 구경할까?”
“무슨 방인데?”
“……내 방.”
칼라일의 방?
지그시 그를 올려다보자 칼라일은 내 팔을 조심스레 잡으며 방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했다. 칼라일이 방을 더럽게 쓰는 편이었나……아닌데. 워낙 깔끔한 성격이잖아. 더럽게 쓸 리가 없는데?
“혹시 방이 난장판이야?”
“기억을 토대로 복원한 것은 맞는데, 그게 어릴 때 기억일지 최근의 기억일지 잘 몰라서…….”
“저 방이 어렸을 적 방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렇지. 그리고 어렸을 적 방은……난장판, 그래 난장판 맞지.”
칼라일이 어렸을 적의 방이라. 가보고 싶은데……칼라일을 살짝 올려다보며 그의 팔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잠시 움찔거리며 난감하다는 듯 웃던 칼라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방으로 데려갔다. 칼라일이 문 앞으로 다가가자 문고리가 저절로 돌아가더니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칼라일은 곧바로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말대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복원되었는지, 넓은 방 안은 정말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물론 어린아이가 쓰는 방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지만, 평소에 보았던 그의 침실과는 너무 달라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는 책이 가득 쌓여있었고, 책이 쌓인 바닥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칼라일은 부끄러운지 계속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전형적인 어린아이의 방이었지만 칼라일이 이런 곳에서 지냈구나 싶어 마냥 좋기만 했다.
가끔 칼라일에게 헬리오도르 저택에서 지내던 시절을 물어볼 때면, 그때의 칼라일은 정말 행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침공 때 다들 무사히 도망쳤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그때 창문 밖으로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마치 물결이 치듯 흔들리는 들판 너머로, 또 다른 성이 보였다. 헬리오도르 저택이 두 개였던가?
“칼라일.”
“응?”
“저 성은 뭐야?”
창밖으로 보이는 성을 가리키자, 칼라일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사실 이 저택보다는 저 성을 네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
창밖으로 보이던 성은 멀리서 보았을 때와 가까이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를 따라 성 앞에 서자, 어쩌면 황궁보다 클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성 꼭대기에 금빛 종이 달려있었다. 성이 아닌가? 칼라일의 손을 잡고 성안으로 들어서자, 눈부신 샹들리에와 함께 단상이 보였다. 단상 앞으로 깔린 붉은 카펫, 그 위로 뿌려진 꽃잎과 보석들…….
칼라일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운데쯤 멈춰서서 살짝 긴장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나는 칼라일이 왜 이곳을 나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모르고 있었을까.
왜 아셀라 영애가 나에게 순백의 드레스만을 주었는지.
왜 그렇게 다들 들뜬 모습으로 나를 치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보니, 면사포만을 쓰지 않았지, 전형적인 신부의 차림새였다. 그리고 칼라일도…….
“그때 그랬지, 다시 제대로 청혼할 거라고, 기억하고 있어?”
“……응,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야,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그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짧게 호흡을 하며 천천히 칼라일을 향해 다가갔다. 한 발자국 다가갈 때마다, 정말로 결혼식을 치르는 신부의 느낌이라, 손이 살짝 떨렸다. 분명 처음이 아닌 재혼인데도. 그만큼 내가 칼라일을 사랑한다는 소리겠지.
칼라일은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내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뒤에야 칼라일은 느릿하게 내 뺨을 쓰다듬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긴장한다는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은 걸까.
손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공식적인 결혼식이 아닌 청혼하는 순간일 텐데도 칼라일과 나는 긴장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
“좀 더 예쁘게 꾸미고 오는 건데.”
반쯤은 진심인 농담을 내뱉으며 내 뺨을 감싼 칼라일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자 칼라일은 그제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환하게 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칼라일은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 나를 끌어안고는 허리를 감싸 안아왔다. 마치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충분히 아름다워. 내 눈에는 항상 그랬어. 네 모든 것이 나에게는…….”
칼라일은 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내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로젤리아. 나의 로젤리아.”
금빛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눈은 오로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것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나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칼라일은 내 손을 감싸 쥐었다가, 천천히 자세를 낮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것은 전부.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없을 거야. 네가 치렀던 결혼식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성대하게 할 거고, 네가 모두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할 거야.”
칼라일은 나에게 손을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내가 이 손을 잡은 순간 다시는 놓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곁에 두겠다고. 떨어지는 일 따위 없고, 헤어지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라고.
나를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선명한 집착이 있었다. 저렇게 선명한데, 지금껏 그것을 어떻게 숨기고 있었는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그간의 상처는 모두 아물었어. 아마도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를 훨씬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을 거야. 너만큼은 떠나지 말라고. 사실 그 말은 전혀 다른 의미였어.”
나야말로 너를 놓지 않겠다는 의미였지.
굳이, 뒷말을 하지 않아도 칼라일은 이미 알아들은 듯, 벅찬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칼라일이 보여주는 집착이 더 짙은 것이라 해도 나는 칼라일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칼라일을 사랑하니까. 더 이상 페르소나는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칼라일은 묵묵히 내 곁에 있었고 무너지려 할 때마다 나를 붙잡아 주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 여겼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찰나의 망설임이 일어났다. 아직 배신의 상처가 남아있어서 그런 것인가? 하지만 이내 내 얼굴에는 미소로 채워졌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칼라일이 나를 저렇게 바라볼 리가 없지.
칼라일과 처음 만난 그날, 그는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내가 그를 구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날은 칼라일이 나를 구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그가 내 곁에 없는 것은 더더욱.
“사랑하는 나의 칼라일. 그대는 로젤리아 가넷을 부인으로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까.”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치며 속삭이듯 물었다. 물론 저 물음에 대해 돌아올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칼라일은 내 손을 잡자마자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손등에 입을 맞추자, 칼라일의 눈동자와 똑같은 은빛 보석으로 장식된 반지가 나와 그의 손가락 위에 나란히 형태를 드러냈다.
“내 심장을 그대에게 바칠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라일은 나를 끌어안았다.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 붉어진 눈가. 그의 눈에 비친 나는, 내 눈에 비친 칼라일의 모습은 똑같았다. 희열과 기쁨이 온몸으로 덮쳐왔다.
아팠고,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차례차례로 스쳤다.
모두가 나를 비난했고, 추문에 휩쓸린 채 가장 믿었던 이들에게마저 배신당했다. 홀로 슬픔을 삼키고 꾹꾹 억눌렀지만 결국 참을 수 없었던 그 끔찍하리만큼 괴로웠던 순간들.
그러나 더 이상 그 순간을 떠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행복한 일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테니까.
- 황후폐하의 이혼사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