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잘 어울릴 줄 알았어.
그날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루치아노와 샤를로테가 함께 사라진 이후, 비밀리에 페르소나의 지시를 수행하려던 기사들은 샤를로테가 사라진 것을 알자 다급하게 페르소나에게 알렸으나, 그는 알겠다고만 하고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샤를로테가 그날 처형된 줄 알았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카렐리아가 루치아노가 떠났다는 것을 알고는 엉엉 울다가 잠드는 일이 벌어졌다. 일부러 루치아노가 떠난 것을 나중에 알려주었는데, 그 일로 한동안 카렐리아는 삐져있었다.
그리고 샤를로테가 처형식이 진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웬의 출정일이 정해졌다. 레이몬드 제국은 혹시 모를 대비를 위해 경계 태세에 들어갔고, 헤레이스 왕국과의 연합군과 함께 바로 전장으로 향했다.
아마 베논 제국에서도 만만치 않게 방어를 할 테니 정말로 몇 달, 길면 몇 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올지도 모른다. 로웬이 걱정된다면 걱정되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로웬은 워낙 강했고, 전쟁을 치렀을 때 진 적은 없으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이라면……그건 릴리일까.
‘저 로웬님을 따라갈 거에요.’
‘……릴리,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주겠니?’
‘가서 로웬님의 시중을 들겠어요. 뭐……시중을 들라고는 안 하겠지만 그래도요. 어차피 저는 시녀 일도 오래 해왔고, 잘할 수 있어요.’
‘릴리, 그곳은 전장이란다. 위험할 수 있어.’
‘제가 다른 기사들보다도 강하잖아요.’
그렇지. 로웬의 기사단 중에서 너를 이길 수 있는 기사는 손에 꼽히기는 하지. 네가 그만큼 강한 것도 알지만……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로웬은 당연히 반대할 테고, 제대로 싸워본 적 없는 릴리가 전장에서 습격이라도 당하면 정말 큰일 날 테니까.
그러나 로웬은 의외로 흔쾌히 괜찮을지 모른다고 대답해왔다. 분명 절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다. 연인을 전장으로 데려가겠다니, 설마 몇 년씩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충격 때문에 맛이 갔나 싶었지만, 릴리가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납치되고 지하실에서 빠져나오고, 분명 다치고, 손에 들고 있는 거라고는 검 하나밖에 없는데 혼자 마수를 스무 마리 넘게 죽였어.’
‘?’
‘기사들에게 결투를 시켜보니 릴리보다 강한 기사들은 없었어. 그러니까 마법사 부대 쪽에만 배치하지 않으면 될지도 몰라.’
‘릴리를 또 기사들과 결투시켰다고?’
‘……아니, 그건 릴리 양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됐어. 대답하지 마. 조용히 해.’
로웬이 괜찮을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역시나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혹시 몰라 실제 기사들이 치루는 시험을 보게 했더니 덜컥 수석으로 합격해버렸다. 레이몬드 제국의 기사들은 남녀구분 없이 정말 실력 있는 자들로 구성되는데……그런 자들 사이에서 수석으로 합격하다니. 결국, 릴리의 출정도 함께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릴리는 몇 달간의 훈련과 함께 기사로서 전쟁에 출정하게 되었다. 몇몇 이들은 그런 릴리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겨우 몇 달 만에, 로웬과 제대로 붙어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본 이들은 릴리를 기사로서 인정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정 당시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고, 릴리가 다쳐서 돌아온다면 직접 똑같이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로젤리아님.”
“…….”
“로젤리아님? 로젤리아님!”
릴리가 보내온 편지를 읽다가 클로이가 연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클로이가 옆에서 보석함을 끌어안은 채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클로이?”
“로젤리아님. 혹시 지금 바쁘세요?”
“바쁘지는 않은데, 무슨 일이니?”
“혹시 이 보석이 좋으세요, 아니면 이 보석이 좋으세요?”
클로이가 보여준 보석은 은은한 은빛이 도는 보석과 내 머리카락 색을 꼭 닮은 붉은 보석이었다. 어느 보석이 좋냐니……갑작스러운 대답에 당황했지만 이내 칼라일의 눈동자를 꼭 닮은 은빛 보석을 골랐다.
그러자 클로이는 아까보다 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네, 그렇게 알려드릴게요!’하고 집무실을 후다닥 빠져나갔다.
‘알려줘……?’
내 보석 취향을 누구한테 알려줘?
***
발랄했던 릴리가 사라진 탓인지, 아니면 기사를 연인으로 둔 하녀들이 침울해한 탓인지 대공저 분위기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시종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들에게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자 대공저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칼라일도 아침 일찍 바르셀민 백작저로 나간 탓에, 어쩐지 약간의 외로움이 들기도 했다. 대공저가 너무 조용해서 그러나. 로젤리아는 일부러 업무를 더 들여다보고 서류를 처리하려 했지만 이미 전부 다 끝내놓았기에 할 것이 없었다. 책을 읽자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복도에는 구두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원이나 갈까, 하면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정원으로 가기 위해 대공저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대공저 앞에 못 보던 저택이 있었다. 아셀라 영애의 마차였다.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니, 아셀라 영애가 마차에서 내리다 말고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각하, 잘 지내셨나요?”
심심했는데 잘 됐다는 생각에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정말 얼마 가지 못했다. 아셀라 영애의 손에 들린 드레스 가방을 보며……환하게 말아 올렸던 웃음이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릴 만 한데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셀라 영애는 귀빈실로 안내하자마자 드레스와 장신구를 늘여놓으며 선물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갑자기 선물이라니, 거절하려고 했지만 아셀라 영애는 거절하면 후회할 것이라며 나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아셀라 영애는 종종 나에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선물해주는 것을 좋아했기에, 단호하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어쩐지 릴리가 떠오르기도 했고…….
“각하, 이 드레스는 어떠신가요?”
그런데 어째 권유하는 드레스가 전부 순백의 드레스였다. 내가 화려하지 않고 깔끔한 걸 좋아해서 일부러 새하얀 드레스만 골라 가져온 건가.
아셀라 영애가 고르는 드레스 중에서 금빛 무늬와 함께 크리스탈로 꾸며진 드레스를 골랐다.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심플하기만 한 드레스는 아니었다. 아닌가, 어쩌면 평소에 골랐던 취향보다는 조금 더 화려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칼라일은 이런 류의 드레스를 입어서 보여주면 볼을 붉히며 좋아하지 않던가.
아셀라 영애는 잘 어울리겠다면서 환하게 웃더니 이내 나를 욕실로 데려갔다……욕실? 잠깐만, 욕실에는 왜? 그때 몇몇 남겨둔 하녀들이 오더니, 장미 입욕제와 향유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입욕을 하고 나와 꾸며지기 시작했다. 꽃향기가 나는 향유를 머리에 바르고 피부를 새하얗게 만들어주는 가루를 얼굴에 발랐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나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점점 아름답게 변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꾸며주는 것인지, 그런데 어쩐지 다들 들떠 보였다. 마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하나같이 콧노래를 부르며 정말 열정적으로 치장을 끝마치더니 환복까지 완벽하게 도왔다.
“로젤리아님, 어떤 장신구를 하시겠어요?”
눈을 빛내는 이들이 건넨 장신구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내 보석함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특히 물방울 모양의 은빛 보석으로 꾸며진 샹들리에 귀걸이. 이건 정말 못 보던 것인데…….
나도 모르게 그 귀걸이를 고르자 하녀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걸이까지 귀에 걸자, 하녀들은 커다란 거울을 가져와 나를 비췄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 이들의 탁월한 실력에 대해 감탄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부?’
어쩐지 결혼식을 치르는 신부 같아. 그런 생각도 잠시, 아셀라 영애가 간 만에 이렇게 아름답게 꾸몄는데 정원이라도 가보시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했다.
“맞아요, 로젤리아님! 정원에 가보세요! 꽃이 한가득 피었던데 가서 구경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예쁘게 꾸미셨는데 어떻게 정원을 가지 않을 수 있겠어요!”
“로젤리아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러니 어디를 가야 한다? 바로 정원!”
다른 이들은 내가 정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할까, 정원에 가야 한다고 외치고 또 외쳤다. 마치 새가 짹짹거리는 느낌이라 귀엽기만 했다. 아직 어린 하녀들의 머리를 한 명씩 쓰다듬어주며 거울을 힐끗 바라보았다.
정원에서 이 모습으로 칼라일을 기다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칼라일이 무척 좋아할 것 같은데.
“혹시 칼라일이 돌아오면…….”
“걱정하지 마세요, 정원으로 가라고 말씀드릴게요!”
하나같이 입을 모아 외치는 그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정원에는 여전히 새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그러나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꽃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부분일까. 보석을 뿌린 것 마냥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꽃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정원 한가운데에 앉아 쉬려는데, 어쩐지 바람이 한쪽에서 계속 불어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다시 걸었다. 정원 이곳저곳을 걷다 문득 덤불 사이로 보이는 문 앞에 섰다.
‘왜 문이 여기에 있지?’
문이 있었나? 문을 설치한 기억이 없는데. 색이 바랜 문을 똑똑 두드리다 금빛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넓은 뜰과 함께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뜰 위로 옅은 색의 들꽃이 가득 피어있었고, 바람의 힘으로 호수에 커다란 물결이 일어났다. 녹음이 짙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나도 모르게 홀리듯 앞으로 나아갔다. 푹신푹신한 발밑에, 드레스가 펄럭였다. 어쩐지 낯익은 풍경이었다. 이미 예전에 한 번 와본 것 같은 공간이었다. 여기가 어딜까. 수풀 사이를 지나고 호수 근처를 돌았다.
정원 뒤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고? 그럴 리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칼라일이?’
그때 눈앞으로 거대한 저택이 나타났다. 마치 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황궁보다도 더 클지도 모르겠다. 그 저택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순간, 왜 이곳이 낯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저택……본 적이 있다. 헬리오도르 가문의 저택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헬리오도르 저택은 이미 다 무너졌다. 불타 없어졌을 저택이 정원 뒤에 있다고? 문 앞으로 다가가자, 거대한 문은 저절로 열렸다. 마치 들어오라는 듯, 바닥에 꽃잎과 보석이 흩뿌려져 있었다.
조심히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가 보였다. 그리고 저택 한가운데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어.”
칼라일이 있었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