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애증
루치아노가 깨어났다. 그것도 샤를로테의 처형을 앞둔 날.
어떡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신을 받아든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책상을 짚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루치아노가 깨어나기를,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그대로 잠들어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렇게 밉지만 결국 손을 놓지 못한 샤를로테……죽어가면서까지 샤를로테에게 모든 악행을 그만두기를 바라왔던 루치아노가 샤를로테의 처형 소식을 듣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서신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서신을 들고 있는 칼라일. 크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루치아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거구나.
“루치아노가…….”
칼라일은 말라붙은 입술을 꾹 문 채 천천히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샤를로테의 처형을 앞둔 날 깨어난 루치아노를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일단 황궁으로 가자. 거의 5개월 만에 깨어난 거잖아.”
황궁으로 가서 루치아노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5개월 만에 깨어났으니 그의 몸 상태를 살피고, 그다음에 샤를로테의 처형 소식을, 말해줘야겠지. 아니야. 차라리 말하지 말까. 또 쓰러질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이제 막 깨어났는데 그런 소식을 전해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숨긴다고 숨겨질 일은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알게 될 게 뻔했다.
시종들이 마차를 대기시켜놓았지만 나와 칼라일은 마법으로 곧장 님프 궁 앞으로 갔다. 황궁의와 하녀들은 나와 칼라일이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자 놀랐지만, 그런 반응을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루치아노가 머무는 침실의 문고리를 잡은 순간 안쪽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문을 열자 바닥에 흩어져 있는 깨진 꽃병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루치아노가 머무는 침실에 이미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샤를로테가 왜 여기에 있을까. 루치아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일까. 샤를로테의 다리에는 깨진 꽃병 조각에 베이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 왜…….”
상처 부위를 압박하며 루치아노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 이제 막 깨어났고 아직 덜 나은 상처도 있기에, 아직 몸을 움직이면 안 되는 상태였다. 칼라일은 황궁의들을 물리고 루치아노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나와 칼라일이 찾아온 것을 확인했는지, 루치아노는 그를 보자마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샤를로테, 너는 그만 나가봐.”
칼라일은 루치아노의 목 부근에 마력을 흘러 넣으며 샤를로테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침실 앞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샤를로테를 데려가기를 지시하자, 그제야 샤를로테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고개를 숙인 채, 은빛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샤를로테가 방을 나가자, 침실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치아노는 혼란스러운지,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이 왜 살아있는 것인지, 상처가 가득한 손을 매만지며 숨을 불규칙하게 내뱉었다.
“5개월이나 의식이 없었어. 지금이라도 깨어나서…….”
다행이야, 그러나 칼라일은 말을 채 잇지 못하며 마지막 말을 삼켰다. 루치아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이마를 짚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줘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루치아노는 그때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였다.
칼라일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목 부근에 대었던 손을 천천히 뗐다. 루치아노의 몸에 있던 상처가 점차 사라졌다. 온몸에 가득하던 상처가 전부 아물어갈 때쯤, 루치아노가 입을 열었다.
한껏 갈라지고 탁해진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샤를로테가 처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인가요?”
들었구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 순간 칼라일이 내 소매를 쥐고는 살짝 끌어당겼다.
“……그래, 샤를로테가 처형을 선고받았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얘기하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뒤따라오는 말에 의해 굳어버렸다.
“죄송합니다.”
루치아노는 잠긴 목소리로 사죄를 하듯 말했다.
새하얀 피부 위에 흐르는 눈물이 이불 위로 툭툭 떨어졌다. 루치아노는 그 자국을 가리기라도 하듯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저 눈물은 나와 칼라일에게 미안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샤를로테가 처형을 선고받아서, 그래서 우는 것이었다. 유일한 혈육, 하나 남은 쌍둥이 누나. 끝까지 정을 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섞인…….
“샤를로테가 연을 끊자고 말했어요.”
루치아노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깨진 꽃병을 보며 중얼거렸다.
“두 분이 오시기 전, 샤를로테는 침실로 오자마자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 질렀어요. 저 망할 놈이 왜 살아있냐고, 당장 이곳에서 내쫓으라고. 소리 지르고 악을 쓰고 연을 끊자고 하더라고요.”
그럼 아까 침실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던 이유가 샤를로테가 난동을 부려서? 샤를로테가 왜 루치아노에게 그런 말을 했지?
“너무 미웠어요. 겨우 살아난 동생에게 그딴 말을 한다는 게. 너무 화가 나 꽃병을 던졌죠.”
샤를로테가 루치아노를 싫어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샤를로테는 루치아노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증이었겠지. 억지로 만들어낸 미워하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샤를로테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했다고 하더라도…….
‘일부러 그런 거겠지.’
문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자 문틈에 모인 눈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루치아노, 안케도니아 제국의 13황자이자 샤를로테의 동생, 아마도 흥미가 생기겠지. 여러 가지의 추문을 만들어내기에 좋겠지. 샤를로테도 아마도 그걸 알고…….
“……하지만 꽃병을 던진 뒤에야 알 수 있었어요. 샤를로테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요.”
루치아노의 두 뺨 위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그도 샤를로테가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임을 알아차린 듯 보였다. 샤를로테가 결국 그를 온전히 싫어한 것이 아닌, 루치아노가 가지고 있는 애정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게 더 화가 나요. 이럴 거면 저를 왜 황궁에서 내쫓았고,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결국 둘 다 서로를 못 놓은 거잖아요. 이럴 거라면…….”
결국 루치아노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으며 울음을 삼켰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아가면서 토해내는 말들은 그간 억눌러놓은 것들을 모두 토해내는 듯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들이 뭉개지고 무너지면서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차라리 정말로 샤를로테가 루치아노를 싫어했다면, 뭔가가 나았을까…….
그때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러나라고 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훔쳐보려 하는 것인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문을 연 사람은 전혀 뜻밖의 사람이었다.
“……각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일라 영애?
***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일라 영애. 확실한 건가요?”
아일라 영애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아일라 영애는 후계자 교육을 받느라 사교계에도 나오지 못하고 저택 밖으로도 거의 나오지 못한다고 그랬는데, 왜 그녀가 이곳에 있을까?
‘세츠를 보러 온 건가. 하지만 그도 만만치 않게 바쁠 텐데…….’
그러나 아일라 영애가 나를 찾아온 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아일라 영애는 나를 님프 궁 뒤뜰로 데려가더니 심각한 얼굴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샤를로테의 처형과 관련된 소식이었다. 설마 처형일이 앞당겨진 것인가 싶어 머릿속으로 소리 없이 울던 루치아노의 모습이 스쳤다.
그러나 아일라가 전해준 소식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샤를로테를 처형식 당일에 빼돌린다니요.”
단두대에 샤를로테가 아니라 다른 죄수를 세우겠다고?
“폐하께서 비밀리에 지시하신 일이라고 해요. 저도 세츠에게 들었어요. 사형수 중 한 명에게 은여우 털로 만든 가짜 털로 머리카락을 숨기고 샤를로테인 척 대신 세운다고 하셨어요.”
“……폐하께서 그걸 직접 지시하셨다고요?”
“네, 샤를로테와 안 좋은 관계였으니 말씀드리지 말까 싶었지만……각하께는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페르소나가 그런 지시를……도대체 왜 그런 지시를 했을까. 관리들이 샤를로테를 처형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결정을 한 사람은 페르소나가 아닌가. 그럼 애초에 샤를로테를 추방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샤를로테를 빼돌린다니, 그럼 빼돌린 다음에는?
“빼돌린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죠?”
“타국으로 추방한다고 하셨어요.”
“노예로 가는 건가요? 아니면 하녀로?”
“추방만 시킨다고 하셨어요.”
추방만 시킨다고……?
“타국으로 추방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감시도 없고, 하녀나 노예로도 만들지 않고 죽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셨어요.”
“!”
“죽은 사람이니, 신분도 없고. 이름도 잃게 되겠지. 그럼 신분을 새로 사야 할 텐데……하지만 그녀는 형식상 죽은 사람이니, 어려울 거예요. 어쩌면 추방당한 이보다 못한 삶을 살지도 모르죠.”
완전한 추방. 노예로 만들어 추방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감시가 따라붙는다.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의 위치를 알려야 하고, 만약 그 과정에서 죽게 된다면 그 시신을 수습해 적어도 가족에게는 돌려 보내준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정말로 완전한 추방. 무슨 일을 당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죽어도 그녀는 그곳에서 혼자 쓸쓸히 죽는다.
게다가 형식상 죽은 사람이니, 일을 하려 해도 할 수 없다. 신분을 사야지 무슨 일이라도 할 텐데 죽은 사람이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샤를로테는 추방당한 순간부터 철저하게 고립당했다고 느끼겠지.
……어쩌면 처형보다 더 잘 어울리는 처벌일지도 모른다. 샤를로테가 반성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욕심을 어떻게 내려놓을까. 못 내려놓겠지. 추방당한 곳에서의 삶은 그녀의 어린 시절처럼 비참할 수도, 더 끔찍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추방당했으니 결코 좋은 삶을 살지는 못하겠지.
“……알려줘서 고맙군요, 아일라 영애.”
“각하. 각하께서는 괜찮으신 건가요?”
“나는 괜찮아요.”
그래, 괜찮다……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샤를로테는 처형을 당하지 않는다, 보여주기식의 처형. 사실상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샤를로테가 처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