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돌아가지 못하겠네.
‘로웬 나쁜 놈…….’
릴리는 훌쩍이며 베개에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헤어지겠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전부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로웬이 제대로 말해주는 것도 없고 출정까지 속이고 청혼서까지 받았다고 해도 자신은 아직 로웬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만큼 서러웠다.
일부러 로젤리아가 기분도 좀 풀고 쉬라며 휴가를 주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무엇을 하든지 로웬이 떠올랐다. 나쁜 놈이었다. 정말 나쁜 놈, 잘생기지라도 말던가!
릴리는 베개를 팡팡 내려치며 서럽게 울다가 이불을 확 뒤집어썼다. 자신과 사귄 것은 무엇이었는지, 설마 가볍게 놀려고 그랬던 걸까. 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할 때는 정말 진심처럼 느껴졌는데, 내 착각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로웬이 나빴다. 진짜, 정말. 만약 버젓이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있는데 나에게 고백을 한 것이라면, 한순간의 유흥이었다면 칼라일의 말대로 그는 쓰레기일 것이다.
“나쁜 놈! 나쁜 놈!”
릴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웬과의 일을 잠시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우울해지고 무력해졌으니까. 하지만 그 나쁜 놈 하나 때문에 이렇게 울고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맛있는 것을 먹는다던가, 사치를 부리던가 해야 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삼십 분 전부터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지, 깜빡 잊고 있었다. 릴리는 쏟아지는 비에, 쓰러지듯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응? 잠깐만.’
방금 마차가 세워져 있지 않았나?
릴리는 몸을 벌떡 일으켜 창문을 벌컥 열었다. 마차가 왜 있지? 그것도 가넷 가문의 마차가! 분명 비가 오기 전에는 마차가 없었는데? 릴리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다가, 저택 앞에서 비를 맞으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로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왜 밖에 있는 거야? 릴리는 다급하게 내려가 문을 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로웬은 릴리가 나오자 깜짝 놀라며 주춤거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게, 갑자기 찾아오면 싫어할까 봐…….”
“그렇다고 이렇게 비를 맞고 있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릴리는 가져온 수건을 로웬의 머리 위에 얹고는 빗물을 털어냈다. 하지만 로웬은 자신이 젖은 것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릴리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며 릴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화는 나는데, 이렇게 비를 맞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도 좋지 않았고, 내쫓고 싶지만, 또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들어와요. 비에 다 젖었잖아요.”
문을 닫고 로웬의 팔을 잡고는 의자에 앉혔다. 일부러 그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로웬의 계속되는 시선에 릴리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로웬은 입술을 달싹이다 릴리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릴리 양.”
“…….”
“그 청혼서, 제가 아니라 릴리 양에게 온 것입니다.”
뭐? 누구에게 와?
릴리는 뜻밖의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청혼서가 로웬이 아니라 나에게 온 거라고? 하지만 분명 청혼서는 대공저로 왔고, 자신에게 청혼서가 보내려면 마가렛트가 저택으로 보내는 것이 맞는데, 어째서 대공저로 온 것일까……. 릴리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수건을 쥔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왜 자신의 청혼서가 왜 대공저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예법에 완전히 어긋난 청혼서, 몰락 귀족의 작위를 탐낸 이가 저지른 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릴리는 분노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럼 지금 그 예법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놈 하나 때문에 이 일이 벌어진 거야? 진작에 화해할 수 있는데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
“릴리 양.”
“!”
“이제 저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니, 어떤 추태를 부린 것인지……그것도 모르고 화만 냈잖아! 릴리는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워져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릴리 양, 계속 얼굴을 보지 못했잖아요. 제가 얼마나 릴리 양이 보고 싶었는데.”
그 순간 로웬이 릴리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그 탓에 몸의 균형이 흔들리면서 그만 로웬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얼떨결에 그의 무릎 위에 앉아버리자, 릴리는 곧바로 일어서려 했지만, 로웬의 안도한 듯한 표정을 보자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릴리의 손등에 입을 맞춘 로웬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제가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릴리 양에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이기 때문일까요. 잘하려고 해도 쉽지 않군요.”
“부족하다니……이번에는 제가 잘못한걸요. 저는 당연히 로웬님의 청혼서라고 생각하고 화를 냈으니까요.”
그 점은 정말 미안한데, 릴리는 로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로웬은 릴리의 손을 쥐어 뺨에 대고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출정만 제대로 말했다면, 그 전에 제가 먼저 얘기했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겠죠.”
“!”
“제가 아직도 많이 미운가요?”
밉냐니……솔직히 출정일 말 안 한 것은 아직도 밉기는 하다. 출정일이 몇 달 후라고 하더라도 당장 다음 주면 거의 만나지도 못할 정도로 바빠질 텐데, 그리고 이번에는 마법사 부대까지 참전하는 전쟁이니 미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아마도 이렇게 불안한 것은, 그가 이카니엘 대공에게 세뇌당했던 것 때문이겠지. 또다시 그렇게 될까 봐…….
“미워요.”
“……역시 그렇군요.”
“저는 로웬님이 또다시 세뇌를 당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조종당할까 봐 두려워요. 그때를 생각만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아요.”
릴리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제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최대한 미워하지 않아 볼게요.”
“…….”
“어차피 저는 로웬님을 너무 좋아해서 미워하는 감정도 금방 잊어버릴 것 같네요.”
슬쩍 로웬의 얼굴을 살피자 로웬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치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을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릴리는 로웬의 뺨을 더듬으며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꾹 눌렀다. 이 고운 얼굴에 상처라니. 전쟁에 다녀오면 그의 몸에 생길 흉터는 더 늘어나겠지…….
그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자니 로웬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누구는 속이 타들어 가는데!
“저를 미워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막 싫어할 정도로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미워하셔도 좋을 겁니다. 저야말로 릴리 양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으니까요. 릴리 양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릴리 양, 제가 출정일을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은, 당신에게 또 다른 걱정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로웬은 더 세게 릴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눈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저로 인해 아팠고, 다쳤잖습니까. 그래서 오래 고민했고……이런 일이 벌어진 듯합니다.”
마치 눈가에 있는 상처를 지우고 싶다는 듯 연신 입을 맞추던 로웬은 쓸쓸한 얼굴로 릴리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은 로웬이 공격했던 상처 부근에 닿았다. 일일이 상처를 쓸어내리던 로웬은 미간을 찌푸린 채 릴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세뇌를 당한 시기 동안 저지른 악행……그 죄값은 치룰 겁니다. 그게 맞는 거니까요. 하지만 릴리 양에게 지은 죄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로웬은 괴로운 듯 릴리의 손에 생긴 흉터들을 지그시 눌렀다.
“그럼에도, 릴리 양이 계속 제 곁에서 웃어주셨으면 합니다.”
손등에 입술을 맞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군요.”
비소를 흘리면서도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말에, 릴리는 로웬이 오기 전, 그를 원망하고 속상했던 마음이 차츰 녹아내리는 듯했다. 저렇게 처연한 얼굴을 하면 마음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자신을 공격한 것에 죄책감을 품고 있는 그가 자신에게 쉽게 출정일을 말하기란 쉽지 않았겠지, 그 점도 이해가 간다.
‘출정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쩌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클지도 몰랐다.
“……바쁘겠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봤으면 좋겠어요.”
“!”“너무 바쁘면 제가 황궁으로 찾아갈게요. 들여 보내줄지 잘 모르겠지만.”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작게 속삭이자, 로웬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를 보고 싶다고 말해준다면, 곧바로 릴리 양에게 갈 테니까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쌓아두었던 응어리가 한 번에 풀려버리자 다시금 편해졌다. 차라리 모두 털어놓았다면 좋았을 텐데, 왜 진작에 그러지 못했나 싶고……릴리는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커다란 천둥소리가 저택 안으로 울려 퍼졌다.
순간 놀라 릴리를 로웬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올라왔다. 로웬이 옷 젖어있다는 것을 미처 잊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도……. 릴리는 젖은 옷 위로 비추는 그의 살갗에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다.
다급하게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로웬은 릴리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대공저로 돌아가지 못할 듯합니다.”
“아…….”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에 있다가 가도 될까요.”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흐릿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릴리는 물기가 묻은 그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비가 밤새 올 것 같은데…….”
“……이런, 어쩔 수 없이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야겠군요.”
릴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로웬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입을 맞췄다.
“그러게요, 정말 어쩔 수 없네요.”
***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났다.
로웬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바빴지만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릴리를 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미친 듯이 업무를 해나갔다. 다행히도 그날 이후 둘은 화해를 했는지 마주치기만 하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항구 복원도 거의 다 마무리되었고, 무너졌던 무역 건물도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그리고 칼라일의 마력도 어느 정도 돌아왔다. 바르셀민 백작은 살면서 이렇게 빨리 마력을 회복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말했고, 칼라일은 마력이 회복되자마자 루치아노부터 치료하려 했다.
5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의료의 문제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인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칼라일의 마력이 충분히 회복된 이상, 이제 루치아노를 깨어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
샤를로테가 아들을 낳았다.
몇 번이나 유산할 뻔했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건강하게 태어났다
샤를로테의 바람대로 페르소나의 외향을 빼닮았다.
그러나 샤를로테가 출산한 것은 이슈가 되지 못했다.
샤를로테가 출산한 바로 다음 날, 그러니까 칼라일과 함께 루치아노를 치료하기 위해 황궁으로 가기로 한 오늘, 보좌관이 대공저로 찾아왔다.
샤를로테의 처형이 결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