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숨만 붙여놔
보름 정도가 흐르자, 네스 영지의 복구도 차츰 정리되기 시작했고, 베논 제국과의 전쟁 준비도 차차 진행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보좌관에게서 서류들을 전달받으며 업무를 처리했고, 그중에 레이몬드 제국의 사절단이 며칠 뒤 헤레이스 왕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베논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서겠지. 베논 제국에서 여러 번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요청이 왔지만, 페르소나는 이를 단칼에 거절하며, 베논 제국과 맺었던 친교와 무역 관련 관계를 모조리 끊어버렸다.
헤레이스 왕국이 마법사 부대의 지원을 약속한 이상,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을 테니까. 다만 베논 제국도 전쟁 준비에 힘쓰며 방어 구축에 힘쓰고 있다는 보고도 함께 들어왔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쟁이 몇 달간 지속될 지도 모른다.
물론 로웬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를……아니지, 조금은 망설이려나.
보좌관에게 건네받은 서류를 뒤적이며 이번 사절단에 참여하는 자들의 리스트를 확인했다.
사절단 대표는 다행스럽게도 로웬이 아닌 페르소나의 비서인 세츠였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에 로웬이었다면, 릴리는 로웬이 헤레이스 왕국으로 향한 바로 그 날, 짐을 싸서 로웬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버렸을 것이다.
‘정말 로웬님은 너무하세요, 제 연인이 아니신 것 같아요! 어쩜 그렇게, 저는 진짜 너무 속상했어요.’
뒤늦게 릴리에게 모든 사정을 전해 들었다. 상당한 분노와 함께 릴리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릴리의 입장에서는 제 연인에게 버젓이 다른 귀족의 여식이 청혼서를 보내온 셈이었으니까. 한참 릴리의 서러움 가득한 한탄을 듣던 칼라일은 정말 간결하고도 수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쓰레기네요.”
그 말을 들은 릴리는 격하게 공감하면서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었다.
“로젤리아님, 쿠키와 홍차를 가져왔어요.”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는 없겠지. 로웬의 출정일이 정해졌으니까. 페르소나는 베논 제국을 없애려 하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 연구 기술이나 인재들이 아깝다고 느낄 테니, 아마도 베논 제국과 교섭을 하려 들 것이다.
‘지금 당장 머리를 숙이고,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어. 하지 않겠다면 대륙 지도에서 베논 제국은 사라질 거야.’ 대충 이렇게 은근한 협박을 하겠지.
그렇다면 아마 4~5개월 뒤 에나 출정에 참여할 것이다.
하지만 그 4~5개월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 사이 로웬은 점점 더 바빠지고 기사들을 훈련해야 한다. 마법사 부대와 함께 전략을 짜야 하니 헤레이스 왕국에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릴리와 함께 있을 시간은 점점 더 짧아지겠지. 출정일까지 만나지 못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클로이, 로웬과 릴리는 어디에 있니?”
간식거리를 가져온 클로이는 내가 로웬과 릴리를 찾자, 마치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꽤나 눈에 띄게 눈을 또르륵 굴리며 들고 있던 접시를 덜덜 떨던 클로이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저, 저는 몰라요!”
“정말로 모르니?”
“네, 저는 몰라요, 진짜! 아무것도!”
분명 알고 있는 게 있을 것 같은데……설마 로웬과 릴리가 또 싸우나?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떨리는 쿠기 그릇을 천천히 내려놓던 클로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우면서도 확신이 들었다.
로웬인지 릴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둘 중 한 명이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릴리와 로웬이 너무 크게 싸워서 말이야. 걱정이란다.”
“네, 네?”
“출정일이 4~5개월 후인데 이렇게 싸웠으니. 지금 당장 화해 시켜야 하는데. 지금 당장 화해시키지 않으면 둘은 찜찜한 마음으로 떨어져 있어야겠지. 후회도 막심할 거란다, 그때 왜 화해하지 않았을까, 하고.”
“후, 후회요?”
“그래, 후회.”
내 말을 들은 클로이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누구 한 명 크게 다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일부러 ‘흑흑’ 소리를 내자 아직 어린 클로이는 물에 젖은 햄스터 같은 얼굴로 울먹거리며 말했다.
“아까 무척이나 화난 듯 보이시던 로웬님께서 저한테 초상화를 보여주시면서 청혼서를 가져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었어요…….”
“그런 걸 물었다고?”
“네……그래서 저는 생김새를 기억나는데로 설명했고, 이 사람이 맞냐면서 보여준 그림 속 인물이랑 청혼서를 가져온 사람의 얼굴이 똑같아서 맞다고 했어요……그런데 다시 일하러 들어가려니까 막 기사들이 포대자루에 감싸서 뒤뜰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포대 자루를 들고 갔다고? 포대자루……그것도 뒤뜰 지하실에? 왜 포대 자루를 들고 갔을까. 설마 누군가를 납치해온 건가. 뒤뜰 지하실은 음산하고 어쩐지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도 돌아서 시종들도 가기 싫어하는 곳이었다.
설마 청혼서를 보내온 귀족 여식을 납치해온 건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그래도 로웬은 기사단장인데. 기사의 의무라는 게 있잖아.
‘응? 잠깐만.’
그 청혼서가……정말 로웬에게 온 청혼서가 맞나?
물론 청혼서로 인해 릴리와 싸우게 된 것은 맞지만, 그렇게 화가 나서 누군가를 포대 자루에 싸서 납치해왔다고? 아무리 화가 나도 귀족 여식을 납치해올 리는 없다. 하지만 만약에 그 청혼서가……릴리에게 온 청혼서라면?
“클로이, 그 청혼서에 보낸 이의 이름이 적혀있었니?”
“아니요, 그러고 보니 받는 이의 이름도 없었네요. 그냥 청혼서라고만 말했어요.”
가끔씩 몰락 직전까지 간 귀족의 작위가 탐나 일부러 그런 부류만 골라 결혼을 진행하는 하급 귀족들이 있다. 특히 부유하지만, 작위가 남작이나 자작에 머물러있는 귀족들. 만약 청혼서가 릴리에게 온 것이라면, 나를 거치지 않고 보낸 이의 이름도 작성되지 않은 청혼서를 지나가던 하녀를 불러 전달한 것이 말이 된다.
몰락 직전까지 간 여식에 대한 철저한 무시하는 행동. 로웬이 만약 그걸 알아차리고 청혼서를 보낸 이를 포대 자루에 싸서 납치해온 거라면……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대강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릴리를 무시하다 못해 청혼서때문에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으니까. 아마도 숨만 간당간당하게 붙여놓을지도 모르지.
“…….”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뜻밖의 상황에 눈을 멀뚱히 뜨고 있자니 로웬이 지하실로 온 나를 보며 손가락을 입술 위에 갖다 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자 눈이 천으로 덮인 채 손을 벌벌 떨고 있는 룬 자작이 보였다.
룬 자작이라면, 주로 건축 사업을 진행하던 귀족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번에 네스 영지를 복구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고 했지……설마 룬 자작이 릴리에게 청혼서를 보낸 건가.
영지 복구를 위해 힘쓰겠다면서 기부금을 자처해서 내던 그가? 선량한 귀족이라 네스 영지민들 사이에서 평이 좋은 이 자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어쩐지 말을 하면 안 될 듯싶어서 로웬의 손등 위에 글자를 적어서 묻자, 로웬은 생각보다 차분한 얼굴로 종이에 무어라 적어서 보여주었다.
‘저놈이 릴리에게 청혼서를 보냈어.’
‘내가 알기로는 영지 복구에 힘쓰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확실해?’
‘응, 확실해. 그래서 지금 고민 중이야.’
‘무슨 고민?’
로웬은 펜촉으로 종이를 툭툭 두드렸다.
‘어디를 어떻게 부러트려야 할까.’
……로웬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룬 자작이 청혼서를 보낸 것이 확실하구나. 펜을 돌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항구 복원도 룬 자작이 진행하는 사업을 통해 진행하려고 했는데. 제 신분보다 낮은 이라면 철저히 무시하는 저리도 더러운 놈이었다니.
‘일단 어디를 부러트릴지 생각하지 말고, 가넷 가문이 투자한 투자금을 모두 회수해. 항구 복윈을 위해 선불로 지급했던 비용도 모두 회수하고. 그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할 테니까.’
릴리에게 예법 하나 갖추지 않고 그딴 청혼서를 보낸 것을 생각하자면 화가 나다 못해 손 봐주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지금은 릴리에게 가서 모든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더 급하지 않은가.
릴리는 로웬과 헤어지겠다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의 대부분은 로웬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나온 말일 테니까. 그러면 지금은 룬 자작을 위협하는 것보다는 릴리의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다.
로웬은 내가 쓴 글씨를 보자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가 다시 펜을 들어 무어라 작성하려 할 때쯤, 룬 자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 나를 왜 납치해 온 거지?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그 순간 로웬의 손이 멈췄다. 펜대를 부러트릴 듯 콱 움켜쥔 로웬은 핏대를 세운 채 차갑게 말했다.
“……네 놈이 릴리 마가렛트에게 청혼서를 보냈다고 들었는데.”
그러자 룬 자작은 어깨를 흠칫 떨며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로웬의 목소리에, 보통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는지, 룬 자작은 순식간에 고개를 수그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리, 릴리 마가렛트라면……그 몰락 귀족 영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라고?”
로웬의 손에 들려있던 가엾은 펜은 뚝, 하고 반으로 부러졌다.
룬 자작은 마치 ‘겨우 그런 몰락 귀족의 영애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거야?’라는 듯 어이없다는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짚었고, 로웬은 어떻게든 참아왔던 화가 터져버렸다. 부러진 펜대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로웬의 손을 적셨지만 로웬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 룬 자작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다.
이러다가는 룬 자작이 오늘 죽겠다 싶어 잡고 있던 로웬의 팔을 더 세게 붙들었지만, 뒤이어 따라온 말에 저절로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저놈이 베논 제국의 전쟁에 칼라일을 참전시켜야 한다고 떠들어대던데.”
“…….”
“이카니엘 대공 그놈을 저지해준 건 마법사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싸우면서 네스 영지를 망가트렸으니 복원 비용 대신 지불 할 생각이 아니면, 참전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떠들어댔다고.”
그런 헛소리를 해댔다고? 몸에 무리가 가면서도 네스 영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건가.
“로웬.”
붙들고 있던 그의 팔을 놔주면서 차갑게 말했다.
“숨만 붙여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