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아물어버린 상처
머리는 이해하려고 해도 몸이 이해 안 될 때가 많았다. 그래도……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로웬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다고도 생각했고, 뒤늦게라도 사과하자고 마음먹었다. 로웬의 입장에서는 분명, 출정 소식을 나에게 전하는 것이 많이 고민되었겠지.
기사로서 아무리 세뇌를 당했지만, 그간 저지른 일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죄값을 치르려 했겠지. 로웬은 그런 사람이니까. 차근차근히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날 말하려고 했는데 듣지도 않고 화를 낸 것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믿었는데……그래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제가 연인인 것이 부끄러우신가요? 몰락 귀족 영애라서?”
“릴리 양!”
“제가 다 이해하려고 해도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 없어요, 청혼서라니!”
정말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로웬님께 청혼서가 온 건데요!”
청혼서. 귀족들의 청혼서는 조금 특별했다. 막무가내로 나가지 않는 이상, 청혼서는 본래 귀족들 간에 어느 정도 얘기가 오가야 보낼 수 있는 게 청혼서였다. 사랑한다고 바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거야말로 귀족의 예의가 어긋나는 행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로웬에게 청혼서가 왔다.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오랫동안 얘기가 오간 귀족 가문에서 보낸 것인지, 아니면 어떤 예법도 모르는 귀족 여식이 보낸 것인지. 그러나 둘 다 기분 나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얘기가 오고 갔다면 그건 그것대로 배신감이 들었고, 어느 막무가내로 나가는 여식이 보냈다면 로웬은 원망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웠다. 로웬의 연인은 릴리 마가렛트, 자신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기사단 사람들도 모르고 있었다. 로웬이 말해주지 않아서 몰랐다고.
“릴리 양,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청혼서라니, 제가 지금 당장 반환시키겠습니다.”
손에 쥔 청혼서가 볼품없이 구겨져 갔다. 반환한다고 다 되는 일인가, 이게?
로웬은 꽤나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여기서 가장 당혹스럽고 힘든 사람은 자신이었다. 릴리는 청혼서를 꽉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구겨져 버린 청혼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일부러 떨어트린 게 아니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고백 안 받아줬을 거예요…….”
너무 슬퍼서 손에 힘이 빠져나간 탓이었다. 떨어진 청혼서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베이지색 편지 봉투 위로 눈물 자국이 퍼져나갔다. 상처는 욱신거리고 저번에 다친 눈은 눈물이 나자 다시금 아프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통증에 릴리가 눈을 부여잡자, 로웬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왔지만 릴리는 차갑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리, 릴리 양. 제가 잘못했습니다.”
“…….”
“제가 출정을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청혼서도……제가 주변 관리를 잘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그러니, 릴리 양. 일단 치료를 받아요, 여기서 상처가 벌어지면 큰일 납니다, 네?”
로웬은 창백하게 질린 채 릴리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릴리는 그대로 다친 눈을 꾹 누르며 로웬은 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뒤돌아 자리에서 벗어났다. 릴리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로웬은 인상을 찌푸린 채 손에 얼굴을 묻었다.
로웬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뒤늦게야 청혼서를 들어 올려 확인했다.
“……도대체 누가 보낸 거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겠다는 눈빛으로 청혼서를 읽어내리던 로웬은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이내 완전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다 못해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거기, 멈춰.”
그때 로웬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지나가던 기사들이 로웬이 부르자 화들짝 놀라며 괴물을 마주친 사람마냥 떨었다. 분명 훈련을 거친 기사들이었지만 로웬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절로 어깨를 떨었다.
“이 청혼서, 전달하는 사람이 뭐라고 말했지?”
“저,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클로이라는, 하녀가, 받아오는 것만, 보아서…….”
그 말에 로웬은 이를 으득 갈며 누구 하나라도 죽일 듯 붉은 눈동자를 흉흉하게 빛냈다.
“이 새끼 잡아 와.”
“네……?”
“안 오겠다면 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당장, 내 눈앞으로 데리고 와.”
***
릴리와 로웬?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싸우는 걸까.
로젤리아는 귓가를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목소리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릴리가 저렇게 소리 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않았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상체를 살짝 일으킨 순간, 칼라일이 나를 끌어안은 채 다시 누웠다.
“칼라일!”
“자꾸 다른 사람 신경 쓸 거야? 내가 옆에 있는데?”
칼라일은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함께 있으려 하는 건지 궁금해지려던 찰나, 어제도 칼라일과 함께 있지 못했음이 떠올랐다.
그때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뒤로 같이 있지를 못했다. 일단 보좌관이 와서 그간 지시로 내려온 일들을 처리했고, 항구 복원을 위해 힘썼으니까. 게다가 지쳐서 칼라일과 대화 도중에 잠들어버렸다. 칼라일이라면 이해해주겠지만, 서운할 만도 하다.
다시 팔을 바닥에 대고 상체만 살짝 일으키자 칼라일은 다시 섭섭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내가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주자 금방 풀어졌다. 눈을 감은 채 내 손길이 좋다는 듯 내 허리에 얼굴을 묻는 모습을 보니 좋으면서도 더더욱 아셀라 영애에게 웃음 짓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생각나자 나도 모르게 칼라일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었다.
“로, 로젤리아?”
얼떨결에 머리채가 잡힌 칼라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덩달아 나도 놀라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미안해, 잠시 다른 생각 하느라…….”
“다른 생각? 무슨 생각 했는데?”
“으음……그냥. 이것저것.”
아셀라에게 환히 웃어주는 것을 보니 살짝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문득 내가 모르는 시절의 칼라일이 궁금해졌다. 지금의 칼라일은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 환히 웃어주지는 않았다. 잘해봤자 연한 미소였지 않은가. 그것도 예의상 미소. 안케도니아 제국에 있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설마 아까 숨었던 것과 관련된 거야?”
얘는 왜 이렇게 눈치가 좋을까……더 숨겨봤자 계속 궁금하다면서 물어볼 것 같은데.
“사실……아까 아셀라 영애와 있는 것을 봤어.”
“!”“네가 환하게 웃어주는 것도…….”
내가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시선을 떨구자 칼라일은 몹시 놀라 몸을 일으켰다. 너무 놀란 것처럼 보여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니, 칼라일이 다급하게 내 손을 꼭 쥔 채 ‘아니야!’라고 외쳤다.
“아니야. 정말 아니야.”
“응?”
“내가 아셀라 영애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너 반지 전쟁 도중에 깨졌다고 아쉬워했잖아. 그거 물어본 거야. 다시 복구 가능하다고 해서, 네가 기뻐할 것 같아서 웃은 거야.”
아, 그랬지. 반지 깨져서……. 칼라일을 꼬옥 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쟁이 다 끝난 뒤에야 반지가 깨졌다는 것을 알았다. 칼라일의 반지도 마찬가지였고, 칼라일이 처음으로 선물해준 반지라 꽤나 아꼈던 것이었는데 깨지니 많이 아쉬워했었다.
금도 많이 가고 보석이 깨지기도 해서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아셀라 영애를 만난 이유가 그 반지의 복구를 부탁하려고?
“로젤리아. 나, 진짜 아니야. 미안해. 내가 네 생각을 못 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내 눈치를 보는 거지?
“다른 여자한테 호감을 느끼거나 그런 게 아니야.”
“!”
“네가 이미 그 일로 상처받은 걸 알고 있는데,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나는 그냥 네가 기뻐할 것만 생각했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정말로.”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그제야 칼라일이 왜 이렇게 다급하게 말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상 나는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상처를 받아왔고, 그로 인해 이혼까지 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웃어주거나 관심을 보이는 부분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칼라일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구나. 내가 아셀라 영애에게 웃어주는 것을 봤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칼라일의 생각과 달리 나는 정말 칼라일이 다른 여자에게 환하게 웃는 게……질투 났을 뿐이었다. 그 예쁜 미소를 다른 사람이 보는 게 싫어서…….
‘질투같은 것은 안 할 줄 알았는데.’
목덜미가 점점 더워졌다. 질투는 나에게 먼 단어였다. 질투라니. 고개를 돌린 채 푹 숙이자 칼라일이 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운다고 생각하는지, 칼라일은 어찌할 줄 몰라 손등으로 뺨을 누르며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다른 여자에게 웃어주는 게 싫었어.”
“……응?”
“환하게 웃어주는 건, 나에게만 짓던 표정이었잖아. 그래서 조금 싫었어. 그러니까, 이런 걸 흔히…질투한다고…하던데…….”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친 채 중얼거리듯 말하자 칼라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꽤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안 하길래 설마 내가 질투하는 게 좋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건가 싶었지만 칼라일이 뜻밖에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또 상처받았을까 봐.”
칼라일은 무척이나 안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상처받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그랬잖아. ‘너만큼은 나를 떠나면 안 돼.’라고. 분명 그때 네가 불안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못 지킨 것 같아서 그랬어…….”
칼라일은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그때 칼라일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맞다. 너만큼은 나를 떠나면 안 돼. 그건 분명 진심이었다. 페르소나에게 받은 배신의 상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컸고, 다시는 그런 괴로운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페르소나를 좋아했던 것만큼, 모든 것을 놓아 버린 그 시점에서 뒤늦게 나를 사랑한다며 붙잡은 그에게 똑같은 비참함을 겪고 싶지 않았다.
칼라일이 나를 떠나게 된다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때처럼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게 뻔했다. 칼라일은 내가 그의 곁에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칼라일이 곁에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이미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칼라일이 나를 떠나는 모습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칼라일만큼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쩐지 느낌이 그랬다. 그만큼은 내 곁에 남아 있어 줄 것만 같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네 말대로 나는 배신의 상처도 크고, 네가 다른 누군가와 있는 것을 보면 그 끔찍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를지 몰라. 하지만 나는 네가 아셀라 영애와 있는 모습을 보아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어.”
칼라일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하자, 칼라일은 말없이 손가락을 얽어왔다. 손끝으로 내 손을 툭툭 건들다 이내 깍지를 껴오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등을 토닥이자, 그의 귀 끝이 붉게 변한 것이 보였다.
“아마도 네가 나를……사랑해주니까. 표현도…….”
심장이 무척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말이 이런 것을 뜻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좋았다.
“나도 네가 없는 삶을 생각하기 싫어,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마주 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눈도 못 마주친 채 얼굴을 붉히는 칼라일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그제야 칼라일은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해.”
마냥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듯 웃던 칼라일이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너를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정도로 너를 사랑해.”
칼라일로 인해 내 상처는 지워지고 있었다.
때때로 그 상처의 존재마저 잊어버릴 만큼 아물어 버린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