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정말 안 말해줄 거야?
샤를로테와 비슷한 외향에 정말로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인 미엘르 안케도니아.
사람들은 이미 샤를로테에게 속고 크게 데였기에, 미엘르가 모습을 드러내고 황궁에 머무는 것이 샤를로테와 똑같은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라며 그녀를 의심했다. 게다가 페르소나에게 황궁에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니, 더더욱 황후의 자리를 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 사람이 진짜 1황녀라는 거지? 확실한 거야?”
“확실하대. 진짜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였다나봐.”
“세상에, 그러면 혹시 페하께서 저 여자를 황궁에 머물게 한 게 혹시…….”
“에이 설마, 황후로 들이실까. 물론 안케도니아 제국의 황태녀였지만 지금은 패전국 황녀나 다름없는데.”
“그럼 누구를 황후로 들이려나. 샤를로테, 그 여자를 그 자리에 계속 앉혀 둘리도 없고.”
“아일라 영애나, 세실리아 영애……아직 미혼이잖아.”
“그 영애들은 가문을 이어받는다고 했던 것으로 아는데.”
“정말? 그럼 누가 황후가 될까.”
몇몇은 비록 패전국 황녀지만 궁에 머물게 해준 것으로 보아 정말로 황후가 될지 모른다고 보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좀 더 고귀한 혈통의 귀족 영애를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런 와중에 미엘르가 마법을 이용해 군사들을 지휘하는 것에 있어서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왔고, 피난민들과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혹시나 남은 마수가 있을까 직접 토벌 작전에 의견을 내세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조금씩 미엘르의 평판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록 이름뿐이지만 황태녀였다는 이야기도 나오면서 점차 미엘르에 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여러 귀족의 입방아에도 오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패전국 황녀를 황후로 들이실까요?”
“또 들이면 그게 국가적 망신이지, 어떻게 패전국 황녀 따위를 황후로 들이겠나!”
“하지만 이번에 세운 공이 꽤 된다고 하더군요. 침공을 막는 것에 일조했으니 못해도 작위를 하사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궁에 머물라고 한 것도…….”
“혹시 아나, 그 13 황녀 아이의 유모라도 될지.”
“그럼 미리 안면을 틔는 것이 좋겠군요.”
다들 미엘르에 대해 수군거리고 여러 추측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이는 소문의 중심인 미엘르 뿐이었다.
황궁에 머물기 시작한 뒤로 매일 같이 루치아노와 자신을 보러 오는 미엘르를 보며 샤를로테는 조용히 혀를 찼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여기는 왜 자꾸 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마주하기도 불편하고……자신 때문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면서 함께 욕을 먹지 않나.
“미엘르.”
“응?”
“이제, 그만 돌아가.”
샤를로테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미엘르는 상처받은 얼굴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해.”
“안 너무해. 돌아가.”
님프 궁에 계속 들락날락하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된다면 또 욕을 먹을 텐데. 애초에 자신과 붙어있는 것 자체가 미엘르에 관한 소문을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같은 황실의 황족이었으니 도망치게 해주려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걸. 네 아이가 무사히 황족이 되도록 만들어줘야 하니까.”
“이렇게 계속 님프 궁을 찾아오는 게?”
미엘르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루치아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아이가 황족이 되게 만들어준다면서, 그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고 있었다. 아이와 관련된 일이니 알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아무리 페르소나의 피를 이었다지만 그 피의 반은 반역자나 다름없는 자신의 피이니, 무사히 황족이 될 수 있을지.
페르소나가 자신의 아이를 잘 돌봐줄 리가 없다……샤를로테는 입술을 깨문 채,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마수들이 사람들을 해치는 장면을 볼 때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는데.
“시간 다 됐네.”
“?”
“오늘은 알현까지 시간이 남아서 온 거야.”
알현이라니?
샤를로테가 자세한 내용을 묻기도 전에 미엘르는 그녀를 부르러 온 기사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하의 부탁도 있으니 아마 들어주실 거야.”
***
지금쯤이면은 미엘르에게 부탁한 서류가 페르소나에게 도착했을까. 미엘르라면 아마 어떻게 해서든 그 서류를 페르소나에게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뒤따라오는 소문을 충분히 감수하려 하겠지. 만약 그 서류가 페르소나에게 도착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샤를로테의 아이가 황족이 되게끔 도와줄 방법 따위 없겠지만.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멍을 때리던 사이, 무언가 손을 콕콕 찌르는 감각에 정신이 되돌아왔다.
새다.
하얀 새가 노란 부리로 내 손끝에 앉아 손톱을 쪼고 있었다. 새를 들어 올리자 새의 발에 묶인 작은 쪽지가 보였다. 미엘르가 보낸 걸까. 조심스레 쪽지를 풀어 확인해보자 간결하게 쓰인 글자가 보였다.
‘샤를로테의 아이가 황족으로 인정받을 것 같다’라는 대답을 받았다고 적힌 쪽지였다.
황족으로 인정받을 것 같다는 것은……아마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겠지. 관리 중에서 반대하는 걸까. 아일라 영애가 샤를로테의 아이가 황족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었지……
물론 아일라 영애를 설득해서 샤를로테의 아이를 황족으로 만드는데 적극 기여할 생각은 없었다. 미엘르에게 전달해준 서류만으로도 내 역할을 다 한 거니까. 페르소나에게 직접 말을 할 생각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견을 내세울 생각도 없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무척 오묘한 느낌이었다. 만약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누군가 이런 내 생각을 듣는다면, 그래. 이기적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샤를로테의 아이는 죄가 없다. 부모가 그리도 못난 것을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아이를 아끼는 것은 아니다.
원망스러운 샤를로테의 아이니까. 내 아이를 죽인 여인이 가진 아이를, 죄가 없다고 느낄 뿐, 불쌍해하고 가엽게 여길 생각 따위 없다.
말없이 쪽지를 촛불 위에 가까이 대었다. 종이 끝이 까맣게 그을리고 새하얀 종이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손을 털고는 새를 다시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창틀에 몸을 기대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고 있자니, 창밖으로 마차 한 대가 보였다. 손님이 오기로 했었나, 왜 기억이 나지 않지? 그러나 마차에서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아셀라 영애였다. 그리고 아셀라 영애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칼라일?
‘무슨 대화를 저렇게…….’
그것도 엄청 환하게 웃으면서 칼라일은 아셀라에게 무언가를 건네받고 있었다. 너무 멀리 있어서 무엇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댔던 몸을 반쯤 일으키자니, 아셀라 영애가 웃으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지금 내려가도 마차는 떠나겠지.
“…….”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알고 싶었다. 저렇게 환하게 웃어주는 것은……. 보통 나에게만 웃지 않았나, 그런데 왜 아셀라 영애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또 물어보기에도 애매했다. 단지 사소한 일로 얘기를 나눈 것이라면, 칼라일도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 웃어줄 수 있지. 그래. 뭐가 문제야…….
잠깐, 설마 나 지금 질투하는 건가.
“로젤리아!”
그때 칼라일이 내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한 것인지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뜨거운 하늘, 잔디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그 햇살 아래에서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얼굴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놀라서 숨어버릴 정도로.
‘……나는 왜 숨은 거지?’
숨으면 이상하게 보일 게 분명할 텐데, 칼라일과 시선이 마주한 순간 정말 나도 모르게 몸을 숨겨버렸다. 질투……했다는 것이 들킬까 봐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은데.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손이 차가워서 다행이다. 뺨을 꾹꾹 누르며 창문에서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바로 뒤에서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창틀 위에 선 채 웃고 있는 칼라일이 보였다. 분명 여기는 4층이었다. 어떻게 올라온 거지? 놀라 뺨에 손을 댄 채 굳어있자, 그에게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너, 마법…….”
전쟁 이후, 칼라일은 마법을 사용하려 하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몸에 큰 무리가 왔다. 그건 미엘르의 마력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혹시 모르니 되도록 쓰지 말라고 말했는데.
칼라일도 아차 싶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내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뭐 하고 있었어? 또 업무 처리했어? 몸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일해.”
이러면 내가 화를 못 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 칼라일은 예쁘게 웃으며 입을 쪽쪽 맞췄다. 덕분에 화 대신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칼라일은 한쪽 팔로 내 몸을 단단하게 받쳐 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쌓여있던 서류가 순식간에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사라졌다.
서류가 모두 사라진 책상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칼라일에게서 다시 한 번 크게 울렁이는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렸다.
“칼라일.”
“어차피 처리해야 할 건 전부 처리했잖아. 미리 해두지 않아도 돼.”
칼라일은 곧장 나를 데리고 화단 정원 쪽으로 내려갔다. 가는 도중에 마주친 몇 명의 시종들이 나와 칼라일을 보더니,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시선을 떼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심지어 정원을 다듬고 있던 시종들은 나와 칼라일을 보자마자 도구들을 챙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부끄러워서 살짝 버둥거렸지만, 칼라일은 그럴 때마다 이마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가끔은 바람을 쐬는 것도 좋아. 최근에 정원 근처로 못 왔지?”
“그래, 정원에 못 왔지…….”
정원 한가득 핀, 새하얗지만 옅은 황금빛이 도는 꽃잎이 바람에 의해 허공으로 흩날렸다. 드레스 위로 내려앉은 꽃잎 하나를 들어 조심스레 만지자 마법으로 피운 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법 쓰지 말라니까……몸에 또 무리가 가면 어떡하려고.”
“괜찮아. 미엘르의 마력을 받은 뒤로 원래의 내 마력이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고 있어. 바르셀민 백작도 신기하다고 감탄하더라.”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로만 쓰고 있으니까 걱정 마. 칼라일은 귓가에 작게 속삭이며 꽃밭 위에 내려주었다. 바닥에 푹신푹신했다. 칼라일의 팔을 잡고 조심스레 끌어당기자 내 곁으로 다가와 앉은 칼라일은 마음에 드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칼라일이 해주는 것들은 전부 다 좋은데.
“그래서, 로젤리아.”
“응?”
짧은 머리카락의 모습은 어쩐지 아직 어색한 느낌이라 그의 목덜미 부근을 매만지고 있자니, 칼라일은 내 손을 잡으며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아까 왜 숨었어?”
“안 숨었어.”
“숨었잖아.”
그리고 대답을 꼭 듣겠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다급하게 몸을 뒤로 물렸지만, 그때마다 칼라일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질투한 것 같다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숨어버렸다는 말을 어떻게 해! 일부러 고개를 돌리자 일부러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결국, 몸에 힘이 빠져 뒤로 넘어가자,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꽃잎이 다시 한번 허공으로 떠올랐다. 칼라일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금빛 속눈썹이 길고 예뻤다. 은빛 눈동자는 여전히 별처럼 반짝였고…….
나도 모르게 질투해서 숨은 거라고, 그렇게 말해버릴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속으로 ‘어떡하지’를 반복하던 순간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웬님은 진짜 바보예요, 그러니까 검이랑 결혼한다는 소리나 듣죠! 검술 천재에 전략가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붙인 건지 모르겠네요! 연인 마음 하나 못 알아주면서!”
“아니, 릴리 양. 잠깐만 제 말을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뭘 들어요! 이, 이……이 연애고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