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황족
얼마나 잔 것인지는 모르겠다.
창문 너머로 환한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침은 아니고, 낮 정도인가. 그런데 왜 아무도 깨우러 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이유는 몸을 일으킨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품에 안긴 채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칼라일……그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자, 칼라일이 옅은 숨소리를 내며 나를 더 꽉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기억났다. 그것도 전부. 간밤에 있었던 일이 모두 떠오르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기억을 떠올리기에는 정말……부끄러웠다. 그렇다고 싫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는 쪽이 더 가깝겠지.
살짝 몸을 일으키자 허리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지만 아주 미약한 통증. 분명 처음은 아닌데, 왜 아플까. 일부러 칼라일 쪽으로 몸을 돌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다시금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 번만 더……미안해, 응? 로젤리아…….’
……아플 만 했구나. 그렇게 거의 아침이 되도록 오래 붙들고 있었으니. 떼어냈어야 했는데 땀에 젖어 내려다보는 눈빛에 홀려 거부하지도 못했지. 목을 간지럽혔던 숨결이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잠든 칼라일의 뺨을 더듬고 입술 쪽을 매만졌다.
사랑한다면서 속삭이던 말들이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그때 칼라일의 눈이 살짝 떠졌다. 반쯤 눈을 뜬 칼라일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이내 환하게 웃으며 입을 맞췄다.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다 벗고 있으면서 부끄럽지도 않은 것인가. 일부러 살짝 고개를 피하자 칼라일은 어깨 부근에 뺨을 문지르며 작게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잘 잤어, 로젤리아?”
“잘잤…어…….”
대답을 해주는데 내 목소리가 한껏 갈라져 있었다. 살짝 삑사리가 난 목소리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칼라일은 나를 보며 쿡쿡 웃어대고……일부러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자, 칼라일은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느릿하게 시선을 나를 향해 올렸다.
“로젤리아.”
칼라일은 내 손을 잡고 쪽쪽 입을 맞추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푹신한 감촉과 함께 칼라일이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뺨에 달라 붙어있던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손길로 떼어주면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손을 뻗어 칼라일의 목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어 내렸다.
“칼라일. 나 목소리 가라앉은 거 안 들리는 건 아니지?”
그의 가슴 부근을 손으로 꾹 눌렀지만 칼라일은 내 손을 잡고 앞으로 더 몸을 내밀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싫어?”
저렇게 야한 표정으로 신호를 주는데, 누가 거절을 하겠어.
“이미 낮인데, 누가 오면 어떡해?”
“아무도 안 올걸.”
“어떻게 알아?”
“어젯밤에 부르기 전까지 아무도 침실 근처로 오지 말라고 말해뒀거든.”
뜻밖에 대답에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아기의 상태는 괜찮습니다만, 여전히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최대한 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황궁의는 어제오늘, 같은 말을 하며 돌아갔다. 그래도 검진은 열심히 하니 상관은 없었지만, 여전히 ‘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다가 돌아갔다.
샤를로테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황궁의의 진단을 듣고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궁 밖으로 나가지 마라, 그건 자신의 상태가 아니라, 아이를 걱정하는 말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또다시 아이를 가지고 도망칠까 하는 말이겠지.
님프 궁에는 시종들이 몇 없지만 그래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낳을 아이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처벌과 폐위. 그리고 그 후에 들일 황후에 대한 이야기까지. 뭐,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면 눈치를 보며 금방 흩어지니 상관은 없었다.
물론 그것도 내 눈치가 아니라 내 뱃속에 있는 페르소나의 아이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만.
처벌은……일단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중요한 것은 아이였다.
뱃속에 있는 이 아이. 이제 6개월 된 아이.
로젤리아가 아이가 황족으로 남아있게끔 도와줄지는……잘 모르겠다.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로젤리아를 탓할 수는 없겠지. 내가 저지른 죄가 있으니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는 행복했으면 한다, 나와 달리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
가만히 배를 쓰다듬고 있자니 뭔가 뱃속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너무 놀라 부른 배를 내려다보았다. 뭐지, 설마 뭐가 잘못된 것인가.
그 순간 다시 한 번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황궁의를 부르기 위해 일으켰던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태동인 건가. 그래, 이맘때쯤이면 태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샤를로테는 떨리는 손으로 배를 감싸 끌어안았다. 심장이 놀라 빠르게 뛰었다.
괜찮아, 아이는 괜찮아. 건강하구나. 네가 아들이면 좋을 텐데.
그전에는,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아들이어야지, 이후의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딸보다는 아들이 낫겠지. 샤를로테는 배를 쓰다듬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샤를로테가 향한 곳은 루치아노가 있는 또 다른 침실이었다. 샤를로테는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루치아노를 보며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잠든 쌍둥이 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샤를로테는 말없이 루치아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손끝에는 초조함이 담겨있었지만, 샤를로테는 그 사실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저 빨리 깨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빨리 깨어나서……묻고 싶었다. 이게 네가 원하던 것이냐고. 네 말대로, 모든 것을 그만뒀다고.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조차 그만두라고 말했던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 정말로 나를 원망한 적 없냐는…….
그때 누군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누굴까, 황궁의는 이미 다녀간 걸로 아는데. 고개를 들자, 샤를로테는 또다시 얼어붙었다. 태동을 느꼈을 때보다 더 창백하게 질린 채 얼어붙었다.
“샤를로테……?”
미엘르, 그래. 미엘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이카니엘 대공의 보좌관이 진짜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인 미엘르였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미엘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충격받는 것과 동시에, 이카니엘 대공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미엘르가 왜 이카니엘 대공의 편에 붙어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름뿐인 황태녀라며, 모욕당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제국을 아끼던 그녀가, 왜? 물론 마지막에는 안케도니아 제국 따위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욕을 했었지.
“샤를로테.”
하지만 미엘르를 이렇게 마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를 가졌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구나.”
게다가 미엘르가 저렇게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라고는 더더욱.
왜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자신은 미엘르의 신분을 사칭했다. 어쩌면 안케도니아 제국의 1황녀라는 명예를 더럽힌 셈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살아줘서 다행이라는 눈으로 보다니. 샤를로테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미엘르를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
“그때, 너를 데리고 도망치도록 도와준 게 마음에 걸렸거든. 너는 가장 어리고, 이런 전쟁이 벌어질 시 어떻게 대처하고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 테니까.”
마음에 걸렸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당신의 신분을 이용해 악행을 저질렀어. 그런데, 살아서 다행이라니.”
“내 신분은 더 이상 나에게는 소용없는 것들이야. 그러니 네가 내 신분을 어떻게 사용했든, 너를 미워하거나 하지 않아.”
미엘르는 의자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자신을 미워하고 있지 않은, 그저 잃어버렸던 가족을 찾아서 기쁘다는 미소로 보고 있었다. 저 미소를 보자니 알 수 없는 것들이 가슴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울컥거리고, 뜨겁게 치솟았다가 이내 차갑게 식어버렸다.
미엘르와 자신의 입장이, 너무나도 상반된 것만 같아서. 나는 왜 저렇게 웃지 못했을까…….
‘미엘르도 나와 같은 사생아인데.’
샤를로테는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미엘르가 사생아인 것은 아마 칼라일도 모를 것이다.
미엘르의 어머니는 일찍이 죽었고, 자신도 유모에게 어쩌다가 들은 것이니까.
같은 외향, 같은 아비를 두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미엘르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정부의 딸이라는 것. 그 정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미엘르가 사생아라는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낸 자는 절대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다.
사실상 미엘르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엘르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정부도 함께 거론되니까 한 행동이었겠지만…….
잘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그에 비해 미엘르의 어머니는 아주 악독했다고 말했다. 막 걷기 시작한 미엘르를 학대하는 것도 모자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고, 비웃음거리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미엘르도 1황녀의 신분이라 앞에서는 다들 대우를 해줬지만, 뒤에서는 자신과 못지않은 취급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엘르가 모두에게 존경받는 1황녀에, 사생아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황태녀의 자리를 따낸 것은, 그만큼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다.
미엘르는 절대 게으르게 산 적 없다. 어떤 노력을 정확하게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생아라는 출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죽을 만큼의 노력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듣고 넘겼는데……지금에서야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엘르 안케도니아, 만약 나도 너처럼 살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미엘르는 자신보다 더 가장 아래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라…….”
“…….”
“그렇구나.”
샤를로테는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새삼 미엘르를 눈앞에 두자니 그 사실이 더 와 닿았다.
어떻게든 살려고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미엘르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거라는 사실이.
“그럼 무슨 일로 온 건데?”
샤를로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되물었다.
“나를 비웃으러 온 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라도 있어? 폐하의 명으로 왔을 리는 없잖아, 무슨 일로 온 건데?”
미엘르는 말없이 누워있는 루치아노의 머리를 두 어 번 쓰다듬었다.
“일단은 루치아노의 상태 때문에 온 거였고, 그리고……너를 도와주기 위해 왔어. 너와 네 아이를 위해.”
나와 내 아이를 위해서라니?
“가넷 대공 각하께서 네 아이가 무사히 황족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나에게 부탁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