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한번 말해볼래?
미엘르가 다녀간 후, 황궁에서 새 보좌관 한 명과 여러 서류가 보내져 왔다.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끔 손을 쓰겠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것인지, 페르소나는 앞으로 침공이나 역병과 같은 제국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안을 제외하고는, 강제적으로 황궁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전해왔다.
황궁과 대공저 사이에서 전서구 역할을 맡아줄 보좌관까지 따로 정해진 것을 보면 진심인 듯 보였다.
“폐하께 들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각하의 몸이 심하게 악화되었고, 업무를 하기에도 무리한 상황이시라고요.”
보좌관에게는 그렇게 설명해놓은 건가……나는 말없이 미소로 화답하며 그에게 이카니엘 대공과 대치 당시의 상황을 낱낱이 적은 보고서들을 건넸다.
침공이 끝났으니, 그 뒤에 있을 복구 작업과 베논 제국과의 전쟁 상황에 대해 논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거의 날마다 황궁에 드나들어도 모자랄 만큼 해결해야 할 업무가 많았다. 그러나 보좌관을 통해 전달한다면 한결 나아지겠지.
그리고 황궁에 드나들 때마다 페르소나를 봐야 하니, 아무리 공과 사를 구분한다 해도 꺼림직 한 상황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정말 다행이었다.
“혹여나 전쟁 상황에 대해 결정된 바가 있으면 전달해주었으면 합니다. 로웬 경에 대한 것도. 네스 영지 건은 독단적으로 맡겠다고 이미 폐하께 전해드렸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 밖에 다른 것들은…….”
“중요한 사안을 제외하고 단순한 업무는 일주일 간격으로 정리해서 가져다주십시오. 아, 그리고……샤를로테 건도 따로 전해줄 수 있겠습니까?”
샤를로테 얘기가 나오자 보좌관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이내 알겠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서는 되도록 샤를로테에 대한 이야기는 외부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반역을 도모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마수들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운 여인. 아마도 확실한 처벌을 결정내리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대할 생각인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때 시야를 가득 메우던 서류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정확히는 내 손에 들려있던 서류가 사라지고, 어깨 위로 무거운 것 하나가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꽤나 불만 어린 얼굴을 하고 있던 칼라일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게 보였다.
“칼라일.”
“언제 끝나십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닌가요?”
무의식적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으려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존댓말에 잡시 멈칫했다. ……갑자기 왜 존댓말을 사용하는 거지?
“그렇게 오래 기다렸어?”
“제가 정부일 때나 연인일 때나,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여전하십니다. 혹시 저를 애태우는 게 즐거우신 건가요?”
애태우는 게 즐겁냐고? 재빠르게 그의 입을 턱 막았다.
“분명 업무가 끝날 때까지 침실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싫으신가요?”
칼라일은 눈웃음을 지으며 보좌관을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보좌관은 ‘크흠’하고 헛기침을 내뱉더니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다른 중요한 사안이 생기면 곧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마치 칼라일에게 당장 나가지 않으면 없애버리겠다고 협박을 받은 사람처럼 다급하게 서류들을 챙기고는 정말 빠른 속도로 집무실을 나갔다. 다급하게 달려 나가는 보좌관의 뒷모습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내 어깨에 두른 그의 팔을 꽉 움켜쥐자, 그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간만에 함께 있는 건데, 나한테도 시간을 쓰는 건 어때?”
“이제는 일에게 조차 질투를 하는 거야?”
“나는 세컨드는 싫은데…….”
세컨드라니. 방금 그 보좌관을 말한 건 아니겠지.
“방금 그 남자는 황궁에서 보내온 보좌관이야. 앞으로 황궁에 드나드는 일 없이, 대부분을 대공저에서 처리하려고. 여기에 네 일도 적혀있어. 한 번 읽어봐.”
“이미 알고 있어. 나도 받았거든.”
“그럼 보좌관은 왜 내쫓은 건데?”
내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꼬며 간질이던, 칼라일은 보좌관이 앉아있던 자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너를 보면서 얼굴을 붉히길래.”
얼굴을 붉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려 그저 긴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칼라일은 내 앞에 쌓인 서류를 책상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어쩐지 일을 방해하는 까칠한 고양이 같으면서도 그 눈빛은 나를 향한 순한 강아지의 동그란 눈빛 같기도 했다. 아니지, 순하지는 않은가.
“설마 또 일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죠, 대공 각하?”
“이미 이틀이나 쉬었는데……황궁에 안 가 봐도 됩니까, 마력연구관님?”
칼라일은 나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이마에 두 어 번 입을 맞췄다.
“이제부터 황궁이 아니라 바르셀민 백작이 따로 소유하고 있는 연구소에서 일하기로 했어.”
“!”
“황제 인장이 찍힌 서류에 그렇게 적혀있었어.”
나를 침실로 데려와 침대에 눕힌 칼라일은 배시시 웃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칼라일은 내 품에 안겨 얼굴을 묻었다. 작게 한숨을 내뱉은 칼라일은 나를 끌어안은 채 내 팔에 있는 화상 자국을 매만졌다. 그런 칼라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허전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
“칼라일.”
“응?”
“간지러워.”
손끝을 살짝 움직이며 손목 부근에 입을 맞추고 있는 칼라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칼라일은 내 몸에 남은 화상 자국을 보며 이따금씩 인상을 찌푸리거나 오랫동안 상처부근을 매만졌다. 피부가 새하얗기 때문에 화상 자국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뿐인데…….
약을 발라주다가도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화상 자국 위에 입을 맞췄다. 당장 치료해줄 수가 없다는 것이 미안한 듯 보였다.
칼라일은 미엘르의 제안을 받아들여, 마력을 넘겨받았다. 덕분에 칼라일의 몸에는 다시 마력이 돌았지만 신중하게 사용하자는 내 부탁에 내 상처 치료는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칼라일은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연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력이 다시 회복되는 대로, 치료해줄게.”
“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한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남은 흔적이니까.”
오히려 미안한 쪽은 나였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 나야말로 머리카락을 다시 원상복구 시키고 싶었다. 내가 화살을 쏜 직후, 불길에 당황한 이카니엘 대공을 제압하는 사이 긴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고, 칼라일은 망설임 없이 잘라냈다고 말했다. 새까맣게 타버린 부분을 잘라내자, 새하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내가 그의 목덜미 쪽을 쓸어내리자 흠칫 떨다가도 이내 익숙하게 나를 무릎 위에 앉혔다.
“금방 자랄 거야.”
“……머리카락이 자라는 마법이 없어서 아쉽네.”
“그런 마법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칼라일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정말인데.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오죽하면 ‘마력연구소에서 머리가 빨리 자라는 마법에 대해 연구할까.’라며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고민을 입 밖으로 말했다가는 칼라일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릴 게 뻔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로젤리아. 혹시…….”
“응?”
“‘머리가 빨리 자라는 마법에 대해 연구해볼까’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혹시 남의 머릿속을 읽는 마법도 있나?
“로젤리아,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머릿속을 읽는 마법도 없어.”
칼라일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쿡쿡 웃어댔다.
얼굴에 다 드러났다고 생각하니 점점 열기가 올라왔다. 일부러 고개를 돌려 그의 무릎 위에서 내려오려 하자, 칼라일은 내 허리를 더 꽉 끌어안은 채 놔주지 않았다.
짓궂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짓궂어졌을까.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데.
“칼라일.”
완전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앉고는 그의 어깨를 꾹 눌렀다. 칼라일은 잠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띠우며 천천히 뒤로 몸을 눕혔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칼라일이 완전히 몸을 눕히자, 그의 배 위에 앉은 자세가 되어버렸다.
문득, 이제 막 칼라일의 마음을 자각했을 당시 꿨던 꿈이 떠올랐다. 야릇한 분위기가 될 때마다 그 꿈이 떠오르니……잊을 만도 한데. 그걸 떠올리니 다시금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는 긴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별을 뿌려놓은 듯 흐트러진 것이 정말 아름다웠지만, 지금은……사실, 굳이 머리카락이 길지 않아도 좋았다. 여전히 아름다웠으니까.
“무슨 생각 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칼라일은 내 손끝을 살짝 깨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예전에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게 떠올라서.”
“꿈?”
“응, 꿈.”
“뭐야, 야한 꿈이라도 꿨어?”
뺨을 쓰다듬던 내가 그대로 얼어붙자 칼라일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이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꿈속에 내가 어땠는데?”
입술을 살짝 핥으며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깨물던 칼라일은 재촉하듯 연신 입을 맞췄다. 바로 코앞에서 마주한 은빛 눈동자는 열기를 띤 채 번들거리고 있었다. 말해주지 않으면 놔주지 않겠다는 듯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칼라일은 야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나도, 그와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의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단단하면서도 뜨거운 감촉, 특히 그의 심장 소리가 손으로부터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내 심장도 칼라일의 심장박동에 맞춰 뛰는 것만 같았다. 낯뜨거운 감각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다음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던 칼라일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의 살결을 매만질 때마다 칼라일은 나를 계속 재촉했다. 하지만 꿈속의 칼라일과, 눈앞에 있는 칼라일은 많이 달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올려다보는 칼라일은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으려 할 것만 같았다.
“꿈속과 네 모습이 너무 달라.”
“……어떻게 다른데?”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 보여.”
그 말에 칼라일은 멈칫, 거리며 쇄골 부근에 뺨을 맞댔다. 목 근처로 달뜬 숨이 느껴지자 순식간에 목덜미가 더워졌다.
“싫어?”
“….”
“내가 너를 잡아먹을까 봐?”
칼라일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전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대답 대신 입을 맞추고, 입술 사이를 혀로 비집고 들어가자, 칼라일은 낮게 신음하며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허리에서 머물던 손이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이 맞닿은 자리가 유난히도 뜨거웠다.
“……좋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등을 쓸어내리던 손은 천천히 허벅지 쪽으로 내려갔다. 그 손길이 무슨 뜻인지 알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치맛자락을 파고드는 감촉에 내뱉는 숨결이 점차 뜨거워졌다.
“글쎄.”
다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하던 칼라일은 내 등 뒤에 묶여있던 옷고름을 천천히 풀었다.
“한번 말해볼래?”
칼라일은 내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금빛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은빛 눈동자에는 욕망이 가득 서려있었다.
“그럼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