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처음부터 이랬어야 할 일.
“마력을 저에게 모두 넘겨주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칼라일은 한참을 침묵 후 천천히 입을 떼었다. 흉터가 가득한 미엘르의 손끝은 불에 탄 듯 까맣게 그을려져 있었고, 손톱이 대부분 깨져있었다. 미엘르는 칼라일의 물음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죗값을 대신하고 싶군요.”
“죗값이라니요.”
“만약 그때 제가 로웬 경을 세뇌시키는 일을 거절했다면, 그렇게 죽었다면……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미엘르는 상처가 가득한 손을 꽉 움켜쥐며 미세하게 떨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대강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제 목숨을 가장 우선했고, 죽기가 두려워 많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이 일에 도모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잘 알면서요.”
“…….”
“물론 마음의 짐을 덜고자 하는 제안은 아닙니다. 마력을 받지 않겠다면, 저는 이 마력으로 항구 복원에 힘을 써드릴 생각이니까요.”
순식간에 방 안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라일은 꽤나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칼라일에게는 미엘르의 마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저 마력을 받았으면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아마도 저 망설임에는 마력을 흡수하면서 오는 타격과 별개로, 급속도로 악화될 미엘르의 상태도 함께 포함되어 있겠지. 마력을 빼앗기면, 그것도 선천적으로 품고 있던 마력을 빼앗긴다면……최악의 상황에는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미엘르 양, 마력을 내어주면 몸에 큰 무리가 갑니다. 선척적인 마법사인 경우는요. 그것을 미엘르 양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결정적으로 미엘르는 이 제국에 머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 같았다.
아주 일부지만, 전해 듣기로는 미엘르는 나와 칼라일이 네스 영지로 가 있는 사이 황궁에서 워프를 열어 기사들을 마수 출몰 지역으로 안내하고, 부상자들을 이송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무너진 건물을 복구하고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도왔다는데……역시 이름뿐인 황태녀는 없구나, 그녀는 태생적으로 황태녀의 몫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죽하면 트리벨 경이 미엘르를 칭찬했을까.
몇몇 관리들은 미엘르를 제국에 두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분명 미엘르도 그 사실을 들었을 텐데…….
“미엘르 양. 혹시 떠날 생각인가요?”
혹여나 죗값을 치르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면 말릴 생각이었다. 미엘르는 분명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순전히 본인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정작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을 모르지 않았나.
그러나 미엘르는 내 말에 끝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
“……마력을 빼앗기면서 생기는 일들을 모두 감안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각하. 이게 맞는 거니까요. 제 몸 속에는 아마 저의 온전한 마력은 이미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연구를 하면서 빼앗은 마력이 모여 있을 뿐.”
그저 다시 한 번 칼라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게 맞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래야 했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로웬 경이 뭐? 어딜 출정해요?”
릴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덕분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아일라는 놀라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렸다. 덕분에 새 사업안이 적힌 서류와 로웬에게 선물 받은 드레스가 찻물로 흠뻑 젖어버렸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다가 겨우 입은 드레스였지만 릴리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가 괜한 것을 알려드렸나 보군요,”
“아니, 아니에요…….”
“로웬 경께서 알려주지 않으셨나요?”
안 알려줬어, 알려주지 않았다고!
릴리는 손수건으로 젖은 드레스를 꾹꾹 누르며 설움을 삼켰다.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왜 연인과 관련된 일을 본인 입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어야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연인이지 않은가, 명색에 연인인데!
정말 억울했다. 그날, 로웬이 칼라일의 도움으로 세뇌가 풀린 날. 릴리는 몸을 무리하게 쓴 탓에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모든 전쟁이 끝나있었다.
로웬은 릴리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각 기사단에게 상황 보고를 받던 도중 자리를 뛰쳐나갔고, 릴리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놔주지 않았다. 로웬의 얼굴에는 릴리가 살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보다는 릴리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릴리도 그걸 잘 알기에, 로웬이 과보호를 하고 그가 따로 마련한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밤마다 직접 약을 발라주거나 하는 것도, 전부 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로웬은 정말 본인에 대한 것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세뇌 마법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한동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
심장을 제대로 파괴하지 못한 마수가 나타나 로웬을 공격했다는 것.
그로 인해 다쳤지만, 치료를 받지 않고 생존자들을 수색하는 작업을 진행시켰다는 것. 그러나 문제는 그 마수의 발톱에 독이 묻어있었고,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는 것!
심지어 로젤리아가 단단히 화가 났고, 몸을 함부로 굴리는 로웬의 모습에 결국 그의 등을 세게 내려쳤다는 것도 시종에게 전해 들어야 했다.
그래놓고 뭐? 아무 일도 없어?
로웬은 항상 돌아오면 그런 일들은 빼고 좋은 얘기만 들려줬다.
일부러 넌지시 물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굴 때는 정말 화가 단단히 날 뻔했지만 참았다.
하지만 출정 소식까지 남에게 들어야 하나?
그것도 베논 제국과의 전쟁에 출정하는 것을?
심지어 헤레이스 왕국과 동맹을 맺어, 베논 제국을 먼저 침공하는 일이기에 다른 전쟁들보다 더 위험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이었다. 못해도 최소 두 달, 오래 걸린다면 몇 년씩 진행될 수도 있는 대규모 제국 전쟁…….
말을 할 생각은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출정 전날까지 말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니면 그리 위험한 전쟁이 아니라고 속이려 했겠지!
정말 미웠다.
아일라 영애를 만난 후 저택으로 돌아오자 로웬이 릴리를 맞이했다. 로웬은 딱딱하게 굳은 릴리와 달리,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릴리 양. 아일라 영애는 잘 만났습니까?”
밉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라,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로웬은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기만 했다. 저택에 들어선 순간, 마주친 저 얼굴이 얄밉기만 했다. 속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네, 잘 만났어요.”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런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속을 삭힐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기사단장……눈치 하나는 정말 좋았다.
“혹시 밖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릴리 양.”
“없었다고요. 저 먼저 피곤해서 들어가 볼게요. 따라오지 마세요.”
그를 차갑게 처내자 로웬의 얼굴은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한 번도 이런 태도로 로웬을 대한 적이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일부러 딱딱하고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혼자 있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싸우게 될 것을 아니까. 언제 출정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와 크게 말다툼을 하며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로웬이 출정을 하겠다고 결정 내린 것은, 그가 저지른 죗값을 갚고 싶기 때문이겠지. 잘 안다. 하지만……이건 아니었다. 정말로 아니었다.
“환복을 해야 하니 이만 나가주세요.”
로웬은 나를 따라 침실로 들어왔지만, 환복을 핑계로 그를 내보냈다. 일부러 느릿하게 환복을 하고, 천천히 씻었다. 로웬이 기다리다 지쳐 돌아갔을 때쯤 욕실에서 나와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릴리님, 밖에 로웬님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신데…….”
시종이 말하길, 로웬은 가지 않고 계속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갈 법도 한데, 아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는 이상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릴리는 한숨을 내쉬며 시종들을 모두 내보냈다. 주변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몇 분 후, 로웬이 침실로 들어왔다.
로웬은 침대 등받이에 기대있는 릴리를 보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다 몇 걸음 앞에서 멈췄다.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 릴리를 보며, 로웬은 입술을 꾹 물었다.
“……릴리 양, 혹시 저에게 화가 났습니까?”
정말 눈치 하나는 좋다. 이럴 때는 그가 기사단장인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없이 서류만을 팔락거리며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자, 로웬은 조용히 침대 끝에 앉아 손만 앞으로 뻗어 릴리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면 저는 모릅니다. 릴리 양.”
“…….”
“혹시 화가 나서 저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왜 화가 났는지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요.”
릴리는 그제야 로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눌러놓았던 설움이 다시 울컥 올라왔다. 그의 뺨에 상처가 있었다. 그것도 못 보던 상처가.
“어디서 다친 거예요?”
“네?”
“뺨 위에 상처 말이에요.”
그러자 로웬은 손끝으로 상처를 더듬으며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었다.
“작은 생채기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그럼 저 역시 별일 아닌 일이니 말하지 않겠어요.”
연인의 얼굴에 상처가 났는지, 뭐?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저게 어디가 작은 생채기야? 딱 봐도 검에 베인 상처인데.
저런 것조차 말해줄 생각이 없는데, 출정은 말해줬을까? 아니, 말하지 않았겠지!
“로웬님, 이번 제국 전쟁에 출정한다면서요.”
울화를 토해내듯 말하자 로웬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릴리 양, 그걸 누구에게서….”
“그게 중요해요? 누구에게 들었는지?”
한번 터진 말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요? 말해줄 생각은 있었어요?”
“릴리 양, 먼저 제 말을…….”
“세뇌 마법 부작용으로 한동안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서요, 생존자들을 찾는 도중에 아직 살아있는 마수와 마주쳐서 크게 다쳤다면서요. 치료도 받지 않고,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을 구하려다가 머리를 다치고 이제는 출정까지!”
로웬이 손을 뻗어왔지만, 그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정말 참았다. 참을 만큼 참았다.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 치료나 마수에게 공격당한 것은 나중에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출정은, 로웬을 세뇌 시킨 마법사가 있던 베논 제국과의 전쟁은 말해줘야 했던 것이 아닌가?
“릴리 양, 저는 릴리 양이 아직 몸이 채 낫지 않았고, 그래서 나중에…….”
“나중이 언제인데요? 제가 아팠던 걸로 핑계를 대지 말아주세요. 저는 정말 많이 참았으니까요.”
로웬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릴리의 차가운 태도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릴리는 그런 로웬의 비위를 맞춰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붉어진 눈가는 뜨거웠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지만 겨우 참고 있었다. 릴리는 이불 시트를 꽉 움켜쥐며 침대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로웬이 침대 위로 올라와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더 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말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로웬님은 출정만큼은 저에게 알려주셔야 했어요. 제가 아파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나중에 말하려고 했다는 말은 핑계가 되지 못해요. 제가 정말 걱정되었더라면, 진작에 알려주셨어야죠. 왜 연인 아픈 것도, 사고를 당한 것도, 출정마저 남에게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