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157화 (157/170)

#157화, 이렇게라도 죗값을.

황궁의는 루치아노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복부에 의한 과다출혈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지, 루치아노가 어떤 상태인지 몰랐던 나는 처참한 그의 모습에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지금은 편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마치 천사가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채 옅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뭐라고 말해야 좋은 걸까.

햇빛이 창문 너머로 들어와 루치아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칼라일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햇빛을 막았다. 그러더니 손을 쭉 펼쳐 루치아노의 이마에 댔다.

“칼라일?”

“편하게 잠든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칼라일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잘 때마다 자책하는 말을 중얼거렸다고 그랬지.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거라면, 꽤나 오래전부터 불편한 잠을 잤다는 것인가.

‘밤마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으니……깨어있을 때는…….’

샤를로테의 결혼식에서 운 루치아노.

우는 것을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척을 했겠구나. 일부러.

솔직하게 말해주어도 괜찮았을 텐데.

깨어났을 때는 또 어떤 심정일까. 샤를로테는 이제 아이를 낳기만 하면 곧장 처벌을 받을 것이다. 관리들을 샤를로테를 처형하자 말하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이카니엘 대공의 침공을 도왔다. 즉, 아직 황후 신분이었던 샤를로테가 나라를 팔아넘기려 한 행위, 반역을 도모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원래는 추방형이었지만 그 정도면, 처형을……피하기는 어려울지 몰라. 그럼 루치아노는…….

“한 번도 루치아노가 동생이 아니라고는 생각해본 적은 없어. 뭐, 딱 한 번은 빼고.”

“한 번? 그게 언젠데?”

“루치아노가 붉은 귀걸이를 차고 온 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기웃거리자 칼라일은 말없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쨌든 대부분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라 생각했어. 나는 루치아노를 어릴 때부터 보았으니까…….”

칼라일은 작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샤를로테가 원망스러워. 그러니 샤를로테를 죽이고자 했다면 진작에 죽였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애매하게 복수를 해왔어.”

“!”“너를 위해서기도 했고, 또 루치아노 때문에 못 죽였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샤를로테의 숨을 거둬들였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처음으로 후회가 되네.”

그의 말의 의미를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칼라일도 샤를로테가 처형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구나. 말없이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루치아노는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몇 년 후일 수도 있다. 둘 다 루치아노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이겠지. 결국 끝까지 샤를로테에게 정을 떼지 못한 루치아노는 계속 샤를로테를 가족이라 생각할 것이다.

당장 내일 깨어나도, 샤를로테가 처형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소식을 들게 될 테고, 몇 년 후에 깨어난다면, 그때는 이미 샤를로테가 처형당한 후일지도 모르지.

“루치아노는 깨어난 뒤에도 행복해하지 않겠지. 그동안 나와 너를 괴롭혀왔던 모든 것이 끝났지만…….”

칼라일은 말끝을 흐렸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칼라일도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도 루치아노는 소중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칼라일에게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루치아노가 깨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편한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칼라일.”

“응?”

“너만 괜찮다면,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

칼라일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칼라일은 루치아노의 은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말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일의 손을 살짝 간질이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루치아노를 대공저로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황궁에 머물게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치유 마법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긴급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 결정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황궁의에게 전해들은 의외의 사실 때문에, 루치아노를 님프 궁에 계속 머물게끔 하기로 결정 내렸다.

‘현재 황후 폐하……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폐하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겨우 유산의 위험을 넘겼습니다. 각하께서 쓰신 그 치유 마법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던 고비는 넘겼다고 봐야죠.’

‘그럼 아이는 안전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진작에 유산했어야 할 아이가 겨우 살아있는 상태라, 지금부터는 스트레스도 받지 말고, 오로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벨리님과 아네트님이 폐하의 스트레스를 많이 줄여주고 있고, 각하의 호위를 보고 난 뒤에는 어쩐지 안정된 듯 보여서…….’

‘루치아노 말인가?’

‘네. 황후 폐하는 항상 그분을 보러 갑니다. 가끔은 그 방에서 잠들기도 하고, 말없이 얼굴을 보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분도 폐하가 다녀간 후에는 불안정한 맥박이 많이 안정되기도 하고요.’

루치아노가 샤를로테의 안정에 도움을 준다는 것. 그리고 루치아노의 안정에 샤를로테가 도움을 준다는 사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니. 쌍둥이는 쌍둥이라는 건가. 여전히 둘을 붙여놓는 것에 불안한 마음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공저로 데려오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루치아노가 깨어나면 어쩐지 샤를로테를 가장 먼저 찾을 것 같은 생각이 한 몫 하기도 했다.

칼라일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대공저 문 앞에 황궁 마차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왜 황궁 마차가? 페르소나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대공저로 온 걸까.

하사품이나 깨트린 조약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러 온 보좌관인가 싶었지만 대공저에는 전혀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대공 각하.”

미엘르 황녀……?

“미엘르 양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황태녀 전하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 본국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그저 미엘르라고만, 불러주세요.”

미엘르가 왜 여기로 왔는지는 모르겠다. 뒤로 황궁의 시종들이 물건을 나르는 모습을 보니 하사품과 관련해서 온 것 같은데……그런데 왜 미엘르가 황궁의 심부름을? 페르소나가 미엘르를 계속 황궁에 머물게끔 한 건가? 하지만 미엘르의 복장은 평소와 달랐다. 루치아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얼굴을 가릴 만한 커다란 로브에,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때 뵙고 제대로 못 뵌 듯하여, 이렇게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각하와 마력연구관님께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듯싶어서요.”

“감사 인사라니……?”

“물론 사과드려야 할 것도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사과라면……로웬을 세뇌시킨 것을 말하는 건가.

“일단 들어와요, 할 얘기가 많은 듯하니.”

하사품과 관련된 심부름은 핑계였던 건가. 미엘르를 귀빈실에 들이며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미엘르가 로브를 벗자 은빛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은하수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미엘르는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이내 머리카락을 끈으로 느슨하게 묶었다.

“어디서부터 사과드려야 할지……잘 모르겠네요.”

“로웬의 사과에 대한 것이라면, 이미 로웬에게 들었습니다. 제가 쉬는 이틀 사이, 로웬과 다른 이들에게 사과를 하고 다녔다고 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어요. 이 침공에 일조한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미엘르는 생각보다 올곧은 여인이었다. 확실히 1황녀로서 갖춘 품위가 있었고, 황태녀라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틀을 쉬는 사이, 황궁에서 전해들은 소식에 따르면 미엘르는 하녀들이 할 만한 일도 하려고 했고, 마수에 의해 다친 이들, 기사들에게 모두 찾아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고 말한다.

확실히 침공을 돕고, 마수를 생성하는 연구에 힘을 쓴 자신의 행적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왜……이카니엘 대공에게서 도망치거나 그의 연구를 돕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을까.

“미엘르 양은, 왜 이카니엘 대공을 도운 건가요?”

저렇게 선명한 죄의식이라면, 거부했을 법한데.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하나는 제 능력 때문이었고, 하나는 살고 싶어서였어요.”

능력? 어떤 능력을 말하는 것일까.

“마력연구관님은……대충 짐작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칼라일을 곁눈질로 살피자, 미엘르를 응시하는 칼라일의 눈빛에서 어느 정도 이해하는 듯한 느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미엘르 양은 황태녀 시절, 마법사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이미 학자들에게 인정받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행사나 정치적인 부분에서 배척받았죠. 황자들과 황제에게도 ”

칼라일은 잠시 입을 다물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딱 한 번 심하게 다친 하녀를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가 5개월간 탑에 갇혀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카니엘 대공이 그 점을 노렸군요. 재능을 마음껏 쓸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까?”

“……순전히 욕심이었죠, 그 말을 들은 순간, 살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그렇게라도 제 능력을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연구를 돕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죽었어야 했지만요.”

미엘르는 상처로 가득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흐릿한 웃음을 내뱉었다.

“연구를 거부했습니다. 능력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죠. 하지만 그 다음날, 제 시중을 들던 하녀가 죽었습니다.”

미엘르는 그때를 기억하기 싫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뒤로 미엘르가 꺼내는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카니엘 대공이 미엘르에게 시슬리라는 새 이름을 부여한 뒤, 끊임없는 연구와 강제적으로 세뇌 마법을 걸게끔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녀의 동료 마법사들과 시종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해왔다고 말했다.

로웬에게 세뇌 마법을 걸지 않으면, 차례차례 한 명씩 미엘르의 눈앞에서 목숨을 빼앗고, 마수로 만들고, 독을 먹여 고통스럽게 죽어가게 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마법을 걸어야 했다고…….

“……하지만 이건 핑계일 수도 있죠. 그렇게 죽는 모습을 보며, 저도 처참히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어쩌면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미엘르 양의 탓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제 선택 하나로 이미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 법이죠.”

아마도 그때. 나를 발견하고 어떻게든 나에게 접근하려고 했던 것. 호위 기사를 마주하고 난 뒤 벌벌 떨면서도 모든 것을 말해주려고 한 것이 단순히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침공을 미리 알았을 테고, 그 침공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갈지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모든 죗값을 치르기란 힘들겠죠. 각하와 마력연구관님께도……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미엘르는 천천히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칼라일의 앞으로.

“마력을 흡수하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

“많지는 않지만, 각하께서 가지고 있던 마력 정도는 될 겁니다. 이 마력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라도 죗값을 치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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