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다르게 만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황궁 복도를 거닐었다. 뜨거웠던 눈가가 차츰 가라앉았다. 여기서 누군가라도 만났다면, 당황해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겠지.
그러다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닌가, 어쩌면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가만 붉을 뿐, 한결 나은 얼굴이었으니까.
볼을 꾹꾹 누르며 샤를로테가 있다는 지하실 쪽으로 가기 위해 복도 우측으로 턴을 하던 순간, 무언가와 부딪혔다. 통,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은 아벨리는 울먹거리다가 부딪힌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대공!”
“각하라고 불러야지, 바보야!”
“대공 각하!”
어눌한 발음으로 ‘대공 각하’라고 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네트와 아벨리를 익숙하게 안아들고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아벨리의 마력은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게다가 얼굴에는 밴드가 잔뜩 붙여져 있었고, 그 위로 ‘아푸지마’라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있었다.
“아네트가 열심히 간호해주었구나.”
아벨리의 볼을 꾹 누르자 둘은 꺄르륵 소리를 내며 품에 안겼다.
몸은 다 나았다고 하나, 아직 더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데……아벨리와 아네트를 안아든 채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뺨을 문질렀다.
“궁의들이 더 쉬라고 말했을 텐데, 혹시 몰래 빠져나온 거니?”
정말로 몰래 빠져나온 것인지 아벨리와 아네트는 입을 꾹 다문 채 들고 있던 작은 꽃을 뒤로 숨겼다. 산책하고 싶어서 나온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옷이 흙투성이였다. 산책을 하다가 흙장난도 한 것인가?
“우응, 하지만 황후 폐하 아기 보고 싶었어요…….”
아기? 샤를로테의 아기……이 어린 애들을 지하 감옥에 들여 보내줬다고?
“저어기, 저기에 황후 폐하가 있어요.”
그러나 아네트가 가리킨 곳은 지하 감옥과 정반대인 곳이었다. 저곳은 님프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투옥되었다고 하길래, 지하 감옥에 넣은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나. 하긴, 임산부를 지하 감옥에 넣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궁을 내어준 건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아이를 데리고 님프 궁으로 향했다.
샤를로테가 투옥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의 아기가 걱정되기는 했다. 몸이 약한 임산부가 아닌가, 게다가 샤를로테는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지하 감옥에 갇혔다니까 아주 조금, 걱정되었다. 아주 조금.
님프 궁 앞은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시종 몇몇도.
‘……아기를 낳자마자 추방시킨다고 하지 않았나.’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잘 돌봐주겠다 이건가. 아니면, 감시?
아벨리와 아네트를 내려놓자 둘은 꽃을 꼭 쥔 채 침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 아이들을 따라 침실로 들어가자, 새하얀 쿠션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는 샤를로테가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새하얀 은발을 귀 뒤로 넘긴 샤를로테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보다는 훨씬 괜찮아 보였다. 아직 얼굴이 창백하고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았지만 괜찮았다.
아벨리를 흐릿한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내려다보던 샤를로테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들에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원 나무에 과일이 열렸단다. 가서 과일 몇 개만 따다 주겠니?”
그러자 아이들은 애써 가져온 꽃이 시들어버린 것을 보며 시무룩 해하다가, 샤를로테의 말에 금세 환해지며 정원 쪽으로 달려나갔다.
침실에 단둘이 남게 되자, 나는 일부러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가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피부는 더 새하얬다. 꼭 유리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샤를로테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샤를로테는 위급한 상황에 나를 도와주었다. 모든 마력을 건네주고, 납치되었던 루치아노를 데리고 칼라일에게 갔다고 말했지. 기사들이 마수에게 공격당하기 직전 마법으로 막기도 했고.
그래, 그랬지.
하지만 샤를로테에게 품고 있는 내 원망이 너무 컸다.
샤를로테의 부른 배를 보니 또다시 아픈 기억이 몰려왔다. 결국 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사과하지 마.”
“…….”
“너에게 사과를 들어도 내 원망은 결코 가라앉지 않을 거야. 너로 인해 내 어린 시절을 바쳐 이루어냈던 황후의 자리를 잃었고, 배신의 상처를 받았고, 아이를 잃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채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너를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못해.”
“…….”
“복수와는 별개로, 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도 용서할 수 없어.”
말 그대로였다. 샤를로테가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며 내 다리에 매달려 용서해달라고 외쳐도. 피눈물을 울리며 잘못했다고 빌어도 나는 결코 샤를로테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손으로 샤를로테를 죽이게 된다 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뜬 샤를로테는 짧게 한숨을 토했다. 이미 내가 그런 말을 할 것을 짐작한 사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를 왜 도와줬어?”
“뭐?”
“네가 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알아. 그래, 내 잘못이 얼마나 큰지도. 다 알고 있어. 그렇기에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네가 사과하라고 하면 사과할 생각이었어, 네가 원한다면……너에게 한 짓에 대한 죗값은 따로 치를 생각도 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물음에는 답해줬으면 좋겠어.”
“왜 너를 도와줬냐고?”
샤를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도와줬냐니.
사실 이유 따위는 모르겠다. 그녀에게 가진 원한에 비해 너무 많은 자비를 베풀어줬으니까.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딱히 없었다. 그저 도와주었다. 위험한 상황이었고, 죽을지도 몰랐으니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샤를로테의 뱃속에 있는 아이 때문일까.
“이유는 없어.”
“…….”
“그저 죽을 것 같아 보이기에 도와준 거야. 나는 누구처럼 매정하지 않거든.”
그 말을 들은 샤를로테는 잠시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이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칼라일은 대답하지 않았어.”
칼라일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었던 건가.
샤를로테는 말없이 이불 시트를 툭툭 뜯으며 말을 이었다.
“칼라일이 말해줬어. 루치아노가 가끔 자다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
“아플 때 죽었어야 했다고. 그래야 어머니도, 나도. 행복했을 거라고. 다 자기 탓이라고. 무의식에서 나온 말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서인지는 몰라.”
가끔 루치아노가 지내는 방을 지날 때면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는 했다. 칼라일이 종종 새벽에 일어나 루치아노의 방 앞에 머물다 오는 것도. 그게 그런 이유에서였나.
“내 어머니는 의도치 않게 나와 루치아노를 가졌고 평생을 우리 둘을 위해 살다가 죽었어.”
“!”
“장례를 치를 돈은 없고, 루치아노는 아팠고. 그래서……자진해서 황녀가 된 거야. 하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오히려 학대하고 나를 좀 더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지. 그 상황에서 평범하게 사는 법 따위 배우지 못했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샤를로테는 침대 옆에 놓은 서랍 안에서 작은 토끼 자수가 새겨진 천을 꺼냈다. 무언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인지, 천 위에 흑심가루가 묻어있었다. 말없이 천을 받아들자 샤를로테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게 되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거야.”
“…….”
“내가 배운 것이라고는, 남을 모함하고, 죽이고, 벼랑으로 몰아서 그 위에 올라서는 방법뿐이니까. 아직도 평범하게 사는 것에 대해 욕망을 버리지 못했어. 하지만……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어.”
샤를로테는 이불을 걷더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무엇을 하려는 지는 곧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얇은 실크 드레스를 정리하고 머리카락을 정돈하더니 두 무릎을 꿇어앉았다. 금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깨끗하게 반짝였다. 샤를로테가 가지런히 모은 손 위로, 머리를 숙였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게. 그게 처형이든 상관없어. 수도 한 가운데에서 단두대 위에 목을 내놓으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대신……부탁이 있어.”
부탁,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내 시선이 자수가 새겨진 천으로 향했다.
“아이가 황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줘.”
나도 모르게 건네받았던 천을 꽉 움켜쥐었다.
“염치없는 것도 알고, 너에게만큼은 이런 부탁을 하면 안 되는 거 알아. 하지만 제발 부탁이야. 아이만은……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게 해줘.”
“…….”
“아이는 죄가 없잖아. 죄는 내가 지었잖아.”
아이를 지켜 달라. 샤를로테가 자존심을 굽혀가며, 제 목숨까지 내놓으면서까지 부탁한 것은 그녀의 뱃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고 있을 아이였다. 어느 정도 예상한 부탁이기는 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황족일까. 그렇게 괴로웠다면서.
“네 말대로 황녀 시절이 그렇게 괴로웠다면, 황족으로 지내게 해달라는 부탁은 모순이 되는 거잖아.”
“…….”
“좋은 귀족에게 입양시켜 보내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 황족이야?”
살짝 고개를 든 샤를로테는 가느다랗고 얇은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은빛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햇빛을 받으니 더욱 빛나는 머리카락.
“나는 안케도니아 제국의 13황녀이고, 응당 노예가 되었어야 할 패전국 황녀니까. 만약 나를 빼닮았다면…….”
샤를로테는 말끝을 흐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 뒤의 말을 듣지 않아도 샤를로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귀족에게 입양 가도 샤를로테를 닮은 아이라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순탄치 않겠지. 그러니 황족이라는 위치가 샤를로테의 아이의 방패막이 되어줄 것이다. 샤를로테도 그걸 잘 알고 있어서 이렇게 무릎을 꿇은 것이겠지.
샤를로테가 말한 ‘다른 선택’이라는 것이 귀에 맴돌았다. 정말로 샤를로테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황녀로 가야 했던 것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치더라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았다면…….
“아이에게까지 네 죄를 물을 생각 따위 없었어.”
“…….”
“잘 쉬기나 해.”
자수가 새겨진 천을 샤를로테의 손에 쥐어주고는 침실을 빠져나왔다. 샤를로테는 울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깊게 뉘우치며 사과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타협을 한 것인지는, 아니면 정말로 반성했지만 그걸 티내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던 모든 것이 샤를로테가 저지른 악행의 업보니까.
침실을 빠져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샤를로테의 얼굴은 물에 잠긴 듯 먹먹해 보였다.
한쪽으로는 샤를로테가 가엾다. 그렇다고 동정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엾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네 말대로 네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너도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네가 원망스럽지만 동시에 가여워.
네 황녀일 적의 생활이 그리도 끔찍했다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네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그렇지만 정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잖아.
그걸 너는 너무 늦게 깨달았구나. 미련한 샤를로테.
어쩌면 우리는 다르게 만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침실에서 한참을 걸어 나오자 님프 궁 뒤편 정원에 서 있는 칼라일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를 발견한 칼라일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샤를로테와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는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후련하다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한결 나아진 듯 보였다.
천천히 칼라일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 손을 잡은 채 말없이 눈을 깜빡이던 칼라일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