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155화 (155/170)

#155화, 사랑해.

“한 번의 연을 맺으면 그 길은 부부의 연으로 연결되어, 영원히 끊어낼 수 없으며……일생을 함께 하게 되니…….”

어두컴컴한 침실 위로 위 무거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페르소나는 레이몬드 제국의 결혼식 때 사용되는 주례사를 읊고 또 읊으며 무거운 몸을 침대 위에 눕혔다.

로젤리아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할 것 같아, 집무실의 모든 빛을 차단했다. 그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보석을 세심하게 세공한 듯한 눈을 보면, 모든 체면을 던져버린 채 그녀에게 매달릴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 못했던 사과를 하는 와중에서도, 손을 잡은 그 순간에도, 그저 빌고 싶었다. 무릎을 꿇고 로젤리아의 손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돌아와 달라고 울면서 버리고 싶었다. 오히려 황제의 체면을 모두 버리는 대가로 다시 로젤리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로젤리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세뇌 마법의 영향이 남아있는 건가? 얼굴이 열기로 가득 차오르고, 심장은 불쾌하게 뛰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심장이 더 괴롭게 뛰기 시작했다.

“로젤리아…….”

결국 페르소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떠나보내기로, 로젤리아의 행복을 위해 놔주고자 마음먹었지만. 몸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폐하, 페하께서는 도대체 저에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또 시작이군. 황후야말로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질투라도 하길 바라십니까, 아니면 저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로젤리아의 대화가, 내가 저질렀던 죄들이 머릿속을 점차 메우기 시작했다. 아니야, 로젤리아. 나는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나는 세뇌 마법을 당해서, 절대 진심이 아니었어. 페르소나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으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황후는 업무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샤를로테만 신경 쓰나 보오.’

‘폐하.’

‘이러니 악랄한 황후 소리나 듣는 것이오. 그러면서 뭐가 그리 억울해서 이렇게 한밤중에 와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거지? 정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찬성할 때는 어쩌고, 이제 와서 샤를로테를 내보내 달라 투정을 버리는 것이오!’

그만, 그만해. 머리가 아팠다. 어지러웠다. 눈앞에, 로젤리아에게 소리 지르고 화를 내고 악의가 가득한 말만 내뱉던 미련한 모습이 아른거렸다. 로젤리아는 그토록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입술을 꽉 문 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만해, 그렇게 말하지 마…….”

페르소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로젤리아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내가, 저렇게 말했던 것인가. 아니야, 저렇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이지? 아무리 세뇌 마법에 걸렸다지만 어떻게 저런 말들을 로젤리아에게 쏘아붙인 거지?

‘샤를로테가 저지르는 악행은 왜 또 가만히 놔두는 것이죠, 아무리 정부라지만, 폐하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라지만, 폐하께서는 어찌!’

‘패전국의 황녀라며 무시한다고 하지 않소, 그 점을 감안해서 보는 것이니 가만 나두시오, 황후. 그런 건 일일이 신경 쓰지 말란 말이오.’

‘폐하!’

‘그리고 시종들의 교육을 지시하는 것은 황후의 일 아니오? 황후가 이렇게 손을 놓고 있으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겠지.’

귀를 틀어막았다. 한번 떠올린 대화는, 끊임없이 터져 나왔고 로젤리아의 심장을 향해 비수를 박았다. 로젤리아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렇게 표정 관리를 잘하던 로젤리아는, 점점 감정이 격해졌다. 황후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그녀가 그리도 무너지는데, 그저 시기라고 생각했다.

상처받았으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한 번도 나에게는 진심을 내보인 적이 없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로젤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처와 배신을 꾹꾹 억눌렀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터져버린…….

“폐하,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문밖으로 세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모든 상념은 깨졌다. 그러나 로젤리아에게 독설을 내뱉던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끊임없이 로젤리아에게 지은 죄들을 입 밖으로 내뱉고 있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 회의를 뒤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어찌할까요?”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세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지만, 페르소나의 귀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에 손이 절로 떨렸다. 세츠의 어깨너머로 또다시 로젤리아와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독설을 내뱉을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괴롭다.

‘황후, 그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샤를로테에게 독을 먹인 거지?’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저렇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후는 정말 악랄하군. 내가 사람을 정말 잘못 보았어.’

“폐하, 폐하!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신 겁니까?”

‘황후는 정말……너를 황후로 두었다는 것이 처음으로 부끄럽군. 수치스러울 지경이야.’

호흡이 멈췄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아니야, 저렇게 말하지 않았어.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로젤리아에게 다가갔다. 환각인 것을 안다. 진짜 로젤리아가 아닌 것을 알지만,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이 심장을 괴롭게 만들었다.

‘폐하,’

로젤리아의 목소리는 한껏 침착해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저를 사랑하시기는 합니까.’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한껏 말라붙은 입술은 그렇게 또다시 진심을 내뱉고 있었다.

“로젤리아, 내가 미안해.”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로젤리아, 로젤리아……내가 잘못했어.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다급하게 로젤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형체는 손이 닿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손은 허공에 머물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인가, 그렇게 상처가 되는 말만 했다고? 괴로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깟 세뇌 마법에 걸려서,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딴 마법이 뭐라고, 나는……!

“폐하, 세뇌 마법이 아직 채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환각입니다, 폐하! 제발 진정하세요, 폐하!”

크게 울부짖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뚤뚤 뭉친 응어리가 가슴 한구석에 맺혔지만, 너무 아픈 탓에 입 밖으로 고통 어린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꽉 쥔 주먹에서, 살갗을 파고든 손톱 때문에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나가라!”

“폐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제가 다시 대공 각하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진정하시고…….”

“나가라는 내 말이 안 들리나, 당장 나가!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

페르소나는 버럭 외치며 세츠를 침실에서 내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정되지 않았다. 다 죽어가던 로젤리아가, 그렇게 몸도 정신도 수척해진 상태에서 겨우 내뱉은 말이,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었는데, 차라리 화를 내주었다면, 원망 어린 말을 내뱉었다면.

하지만 로젤리아는 그때에도 황후의 체면을 생각해도 화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황후니까, 황제의 반려니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다 갈라진 목소리 위로 물기가 묻어났다. 정말로,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칼라일, 그자보다도 내가 더 네 행복을 바랐을 것이다. 분명 장담할 수 있었다. 너를 본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너와 함께 하는 일생동안 행복한 생활만을 하게 해주겠다고.

‘가넷 가문의 여식, 로젤리아 가넷이라고 합니다.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너를 마음에 담았었다.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과 보석을 새겨 넣은 듯한 눈동자. 가넷이라는 성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여인은 로젤리아 밖에 없었을 것이다. 첫 만남부터 그렇게 사랑에 빠졌지만 정작 로젤리아는 황태자비가 되기가 싫어 그 자리에서 도망쳤지. 하지만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황실 간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태자비가 되어야했지만……그래도 불행한 황후 생활을 하지 않게 해주리라, 약속해주고 싶었다.

‘로젤리아, 드디어 내일이면 부부가 되는 거야.’

‘드디어 황제로 즉위를 하게 되신 거군요, 축하드립니다.’

‘말투가 너무 딱딱해……혹시 아직도 황후가 되기가 싫은 거야?’

분명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럴 리가요.’

‘!’

‘좋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그런 것입니다.’

그 약속을 깨트린 것은 세뇌 마법도, 뭣도 아닌 나구나.

로젤리아에게 다가갔다.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로젤리아에게 다가갔다. 아름답다. 칼라일에게 보여주던 그 환한 웃음을 띤 채 볼을 붉히고 있었다. 손에는 나눠 낀 결혼반지가 있었고……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로젤리아.”

손을 뻗어, 로젤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붉은 눈동자가 오로지 나를 향해 있었다. 그 눈동자 위에 내가 비춰지고 있다, 칼라일 그자가 아닌, 내가.

“로젤리아…….”

사랑한다는 말이,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로젤리아에게 닿지 못했다. 아까 보았던 환각처럼 또다시 연기처럼 사라진 로젤리아.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기도, 환한 웃음도.

그 무엇도, 아무것도.

“……사랑해.”

로젤리아가 서 있던 자리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뺨을 타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랑해, 사랑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얼굴 위로 녹색빛 눈동자가 점점 탁해졌다.

“나는 너를 아직, 너를……사랑해…….”

***

침실 바로 위, 황궁 지붕 위에 앉아있던 칼라일이 울컥 피를 토해냈다.

새하얀 손수건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있는 마력 없는 마력 다 긁어모은 덕분인지 생각보다 타격이 적었다. 손수건으로 피가 흐르는 입가를 꾹꾹 누르던 칼라일은 페르소나에게 걸었던 환각 마법을 거두어 들었다.

역시 페르소나는 아직도 로젤리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처를 주고서는.

어떻게 저런 놈이 로젤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것일까. 칼라일은 피가 묻은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생각보다 불쾌하군.”

하지만 이 불쾌함도 잠시, 건너편 복도를 지나고 있는 로젤리아가 보였다. 페르소나와 만나고 나온 참인지, 로젤리아의 얼굴은 좋지 않으면서도, 한결 나아진 얼굴이었다. 그래, 불쾌할 필요 없다. 어차피 로젤리아는 더 이상 저놈의 아내가 아니니까. 저리도 사랑스러운 여인은, 로젤리아의 반려는 이제 자신이었다. 마법에 걸려 배신의 상처를 가득 안겨주고는, 뒤늦게 후회하는 저놈이 아니라.

‘멍청한 놈.’

사랑한다며 속삭이는 페르소나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던 칼라일은 더 이상 들은 것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지붕 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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