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모든 게 끝이 났다.
전쟁이 끝이 나고, 이틀 정도가 흘렀다.
나와 칼라일이 이카니엘 대공과 고전하는 사이, 페르소나는 네스 영지와 수도를 제외한 나머지 영지에서 남은 마수들을 모두 토벌했고 몇몇 마법사와 대치해 승리를 거두었다.
다행인 점은 네스 영지에서 일어난 사상사를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사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점일까.
물론 마수들에 의해 부상당한 자는 많았다. 한족 다리를 못 쓰게 되거나, 팔을 뜯긴 이들도 있었고, 기괴한 마수들의 모습에 겁을 먹고 트라우마가 생긴 몇몇 이들은, 전쟁 후 기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항구는 무너졌고, 마을 대부분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미처 황궁으로 피신하지 못한 이들은 마수에게 당하거나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페르소나는 그에 따른 모든 지원을 최대한 해주었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을 대처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잃은 것만이 많은 전쟁은 아니었다.
마수에게서 도망치거나, 가족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이들. 또는 극한의 상황에서 마력이 개방된 이들이 생겨났다. 아벨리와 아네틀처럼 자신이 마법사임을 모르고 살아간 자들이나, 목숨이 위협당하면서 소수의 확률로 후천적 마법사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리엘 공작부부가 먹은 독이 해독되면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모든 사정을 전해들은 리엘 공작부부는 곧장 헤레이스 왕국으로 귀환했고, 이를 들은 헤레이스 왕은, 레이몬드 제국에게 물질적 지원을 하면서 마법사 부대를 지원해줄 테니, 베논 제국을 침공하자는 제안을 보내왔다.
아마도 페르소나는 수락할 것이다. 오랫동안 한 제국의 기사단장을 세뇌시켜 첩자 노릇을 하게 만들고, 침공까지 해왔으니까. 헤레이스 왕국의 마법사 부대까지 있으니 더 이상 망설일 것은 없을 것이다.
잃은 것뿐만 아니라 얻은 것도 많은 전쟁이었다.
가넷 가문은 황실과 협력하며 마수들에 의해 크게 손상된 곳이나 마을, 특히 네스 영지가 복구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현장에 나가서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루치아노가 되도록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던 그 마법을 몇 번이나 사용한 탓에, 오른쪽 팔은 완전히 화상을 입었고, 몸 이곳저곳에도 화상 자국이 남아있었다. 솔직히 그때 어떻게 활을 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각하, 이 몸 상태로 정말 전장에 나가신 겁니까?”
“그렇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저라면 한 걸음도 못 내딛고 기절했을 것 같습니다만.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물론 ‘기적’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 진단을 옆에서 들은 칼라일은 그 뒤로 나를 대공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걸을 때마다 다리가 욱신거리며 달군 돌을 밟는 기분으로 잘 걸을 수도 없었지만……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자마자 칼라일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페르소나에게 전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 목적은 샤를로테와 루치아노 때문이었다.
샤를로테는 반란에 도모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고 했고, 루치아노는 황궁의의 모든 기술을 이용해 겨우 살려냈지만 아직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칼라일은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을 이카니엘 대공의 목숨을 거둬들이는데 사용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는 듯 보였다.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칼라일은 루치아노가 그런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납치되었었다고는 더더욱, 황궁으로 향하는 내내 칼라일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손을 뻗어 칼라일의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자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좀처럼 사라지지 못했다.
황궁에 도착하고는 칼라일과 나는 서로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향한 곳은 페르소나의 집무실이었고, 칼라일은……샤를로테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의 결정을 말리지는 않았다. 다 생각이 있어서 샤를로테를 만나고자 했을 테니까.
“폐하께서는 어떠시지?”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계십니다. 최대한 영지 복구에 힘쓰시고, 제국민들에게 물자를 보급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다행히도 마수가 네스 영지와 그 주변의 영지만을 노린 덕분에, 그 부근만 집중적으로 복구 작업을 거치면 될 듯싶습니다.”
집무실에 가던 도중 마주친 세츠는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집무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세츠도 페르소나에게 전달해야 하는 서류를 넘기지 않은 채 기사들과 조용히 물러났다. 페르소나와 단둘이서 해야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인지……주변이 전부 조용해지자 그제야 나는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제국의 태양의 폐하를 뵙습니다.”
집무실 안은 어두웠고, 서류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밤새 쉬지 않고 업무를 처리한 셈인지, 전장에 나갈 당시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새하얀 제복 위로 채 닦아내지 못한 마수의 피가 묻어있었다.
“……수고했다, 가넷 대공. 그대의 공이 참 크다. 다른 기사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마력연구관과 함께 이카니엘 대공과 맞섰고, 그 과정에서 마력을 모두 잃었다지.”
페르소나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형식적인 말만 내뱉는 것처럼 보였다. 덤덤한 목소리 사이로 미세한 떨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자세한 보고는 서류와 함께 보좌관을 통해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항구 복원에 관해서는 저희 가넷 가문에서 독단적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곧 레이몬드 제국으로 귀환한다고 하니, 그때 논의한 결과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형식적인 말을 주고받는 것이 끝나자, 긴 침묵이 시작되었다. 어두운 집무실에서는 페르소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보이는 것은 멍들고, 터진 입술뿐이었다. 그 입술이 침묵을 깨고 겨우 움직인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지?”
“….”
“다친 곳이 있다 들었는데, 그대가 원하면 요양을 할 만한 곳을 알아봐 주지. 물론 공에 따른 하사품과는 별개로 진행할 것이다.”
“하사품이라……하사품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째서지?”
“저는 오랜 황실 간의 약조를 깨트렸으니까요.”
페르소나는 또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제 죄는 반역과도 같은 죄. 하사품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관리들의 반발도 심할 테고요.”
이때다 싶은 관리들은 어떻게든 가넷 가문이 황실 다음으로 강한 세력에서 끌어내리려 아등바등 되겠지. 그렇다고 가넷 가문이 끼치는 영향이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다 감수하고 진행한 일인데……페르소나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된 이후, 헤레이스 왕국과 동맹을 맺어, 베논 제국의 침공할 생각이다. 그리고 로웬 경이 그 작전의 지휘를 맡기로 했다.”
로웬이? 뜻밖의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 다운 결정이라 이해가 되었다. 아마 로웬은 세뇌를 당해도 그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어젯밤, 로웬이 칼라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 것처럼.
그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라도 베논 제국의 침공 작전에 나선 거야. 페르소나가 먼저 권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웬 경은 우수한 기사이니, 승리를 가져오겠지. 그 공과 네 공을 합쳐, 조약을 깨트린 것은 묻어버릴 생각이다.”
“…….”
“대공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피해도, 그러니…….”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건가 싶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페르소나가 내가 앉아있는 자리 바로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 위로 온기가 퍼져나갔다. 이내 그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페르소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그가. 페르소나가.
그의 손에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힘이 탁 풀려버렸다.
“미안해. 이 말로 네 상처가 전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꼭 말하고 싶었어. 미안하다고…….”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단지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예전과는 달리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말을, 이혼하기 전에 들었다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페르소나를 사랑했으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하지만 이런 페르소나의 모습을 보아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페르소나가 세뇌에 걸린 상태든 아니든 이미 홀로 배신의 상처를 안고 울었던 날들이 너무 많았다.
앞으로 살면서 그렇게 괴로워하며 우는 날이 또 있을까. 아마도 없겠지.
“돌아오라는 말은……이제 하지 않을게. 그 말을 하기에는 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분명 모든 것이 내 잘못임을 알아도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너를 억지로 붙들어 매려 했으니까. 전부 잘못된 일이니까.”
페르소나는 잡았던 내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그렇기에 네가 깨트린 조약을 덮어버리는 거야. 만약 이 일을 거론하게 된다면, 너는 다시금 황궁으로 와야 하고, 그때마다 나와 마주하게 될 테니까.”
손등 위에 머물던 온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네가 행복하기 위해서는……내가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을 잘 알아.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럴 테지.”
페르소나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형편없이 일그러진 페르소나의 얼굴이 보였다. 목소리는 무덤덤했지만 표정은 그러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부러 억누르는 듯, 입술을 깨물던 페르소나는 짧은 숨과 함께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네가 행복했으면 한다는 것은 진심이야.”
그 말을 끝으로, 페르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안을 어둡게 만들어놓은 것도, 일부러 저런 표정을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선명하게 그의 마음이 드러나는 얼굴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말라붙은 입술을 떼며 말했다.
“그래.”
딱 이 한마디.
그 한마디만 내뱉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를 마주한 페르소나는 그런 내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듯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의 새하얀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카펫 위로 눈물이 연이어 뚝뚝 떨어지며, 페르소나는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 얼굴에서 여러 모습의 페르소나가 겹쳐졌다.
나를 사랑했던 그와, 나에게 상처 주었던 그와, 뒤늦게 모든 것을 후회하는 페르소나.
무덤덤한 얼굴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듯싶어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그와의 연은 내가 그에게 이혼을 선언한 순간부터 끊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페르소나가 그것을 억지로 붙들어 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무실을 나선 이 순간, 그 연을 마침내 완전히 끊어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끝났다, 정말로.
모든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