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비극의 끝
“칼라일!”
이카니엘 대공에게 붙잡힌 칼라일은 피를 울컥 내뱉으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의 목을 붙잡고 있는 팔을 꽉 움켜쥐었다. 새하얀 칼라일의 마력이 까맣게 점철되어 이카니엘 대공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칼라일의 주변으로 일렁이던 마력의 기운은 점점 사그라지고 이카니엘 대공의 마력이 점점 거대해진다. 생물, 인간 가릴 것 없이 마력을 얼마나 빼앗은 것인지, 이제는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가, 각하! 죽은 기사들이!”
더불어 죽어있던 베논 제국의 기사들의 시체가 검은 연기에 휩싸여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마수의 형태로. 설마 빼앗은 마력으로 죽은 이들에게 마력을 불어넣은 건가? 죽은 시신들로도 마수를 만들 수 있어?
“시신들을 불태워라! 겁먹지 마라!”
로웬은 꿈틀거리는 시신들을 검으로 베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신들 위로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하지만 칼라일은, 저 둘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제 어떡해야 하지? 칼라일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가진 마력은 거대하며, 이카니엘 대공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만큼 소름끼쳤지만 칼라일보다는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칼라일이 마력 전부를 빼앗겨버렸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이곳에서 이카니엘 대공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마력이 없으니, 변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군. 이제 너는 뭘 할 수 있지, 칼라일? 벼랑 끝에 몰린 네 연인은 이런, 화살로 나를 위협하려 드는데.”
이카니엘 대공의 얼굴을 향해 날아온 화살은 그대로 잡혔다. 정확히 목을 노린 화실이었지만, 이카니엘 대공은 이런 얇은 화살로 뭘 할 수 있겠냐는 듯 천천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 화살 하나로는 상처조차 입힐 수 없겠지.
검을 버리고 활을 택했다. 활시위를 쭉 당겼다. 다친 팔이, 검에 베인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팔목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카니엘 대공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야.
다시 한번 정확하게 목을 노린 화살은 허공을 가르고 빠르게 날아갔다. 그리고…….
펑!
폭발음과 함께 화살이 이카니엘 대공의 얼굴 근처에서 터졌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당황한 이카니엘 대공은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비틀거리더니 타오르는 불길에 순식간에 그을려진 얼굴을 짚었다. 다시 한번 활을 잡았다. 바로 이전의 마법 때문에 팔부터 어깨 전체가 화상 자국으로 뒤덮였다.
두 번의 마법이 최대였다. 적어도 칼라일을 이카니엘 대공에게서 떨어트려놓아야 했다. 마력을 손끝으로 모으자, 마치 온몸 이곳저곳에 불이 붙은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제대로 쏠 수 있을까.
그 순간, 손에 힘이 빠졌다. 화살이 잘못 날아갔다.
이카니엘 대공이 아니라, 칼라일에게로.
“칼라일, 피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칼라일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이카니엘 대공이 그의 목을 움켜쥐고 모든 마력을 빼앗기 직전에 지었던 미소처럼 온화하게 웃으면서.
그리고 화살이 다시 한 번 터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터져버린 화살은, 그로 인해 타오른 불꽃이 칼라일과 이카니엘 대공 전부를 감싸며 마치 폭발한 화산처럼 타올랐다.
팔도 다쳤고, 애초에 이카니엘 대공만을 노린 화살이기에 저렇게 크게 타오를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마력을 쏟아 붓지도 않았다.
“각하, 피하십시오! 위험합니다!”
“아니야……마법이 이렇게 강하게……칼라일!”
기사들이 나를 붙잡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려 했지만,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칼라일이, 내가 쏜 화살과 함께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활시위를 좀 더 꽉 잡았어야 했는데, 놓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눈앞에서 폭발하기 직전에 보았던 미소가 아른거렸다. 그 미소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내 실수로 인해.
그 마지막 순간, 칼라일은 왜 웃은 거지? 도대체 왜?
나를 사랑해 마지않던 얼굴로 바라보면서, 왜 피하지는 않은 거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잖아!
……설마, 희생할 생각으로?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칼라일이 죽을 리 없다. 희생 같은 멍청한 선택을 했을 리 없다. 그가 나를 두고 죽음을 선택했을 리가 없다. 무슨 이유에서 그런 걸 거야. 죽었을 리 없어.
그리고 설령 죽었대도……나에게는 이렇게 망연자실할 시간 따위 없었다. 만약 이카니엘 대공의 숨이 아직도 붙어있다면, 내가 직접 그 숨을 거둬들여야 할 테니까.
목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다시 공격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게.
“전부 당황하지 마라.”
“가, 각하…….”
“레이몬드 제국의 기사들이 이렇게 나약한 자들이었나! 시신들을 마저 불태우고, 궁수들은 모여 불길을 겨냥해라!”
로웬과 내 지시에, 궁수들이 활을 불길을 향해 겨누었다.
화살에 마법을 걸자.
만약 칼라일이 아니라, 이카니엘 대공이 멀쩡히 살아나온다면, 다시 한 번 거센 불길과 함께 터트려 죽이자.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제발.
점차 불길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움직임조차 없던 마력이 다시 일렁였다. 그 마력은 칼라일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칼라일의 마력은 희미했지만,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죽은 것인가. 심장이 가빠르게 뛰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말없이 손을 들자, 궁수들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로젤리아! 공격을 멈춰!”
그 순간 로웬이 날카롭게 외쳤다. 흐릿해져가는 정신이 다시 되돌아왔다. 나는 황급히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로웬은 불길을 거의 노려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 다시 불길 속 한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살점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느껴지는 듯한 그 속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전원 공격을 중지하고, 활을 내려라!”
허리까지 내려오던 금빛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짧게 잘려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불꽃에 타들어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칼라일!”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로젤리아.”
부드러운 미성과 함께, 그의 입꼬리에 걸린 아름다운 미소. 그리고……그의 손에 잡혀있는 이카니엘 대공이.
“일부러 마력을 빼앗아가게끔 기회를 만들어줬는데……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렸어.”
이카니엘 대공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칼라일의 마력이 이카니엘 대공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카니엘 대공이 뺏는 것이 아니라, 칼라일이 자발적으로 넘겨주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어떻게, 커흑……네가 어떻게, 이 능력을……!”
이카니엘 대공의 얼굴이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강한 산(酸)물질에 닿은 것처럼 썩은 살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온몸에 금이 가고, 점점 부서지기 시작했다.
“내 마력을 원했지, 굳이 빼앗을 필요 없어. 전부 가져가. 기꺼이 너에게 넘겨줄게.”
어떻게든 칼라일에게서 벗어나려 이카니엘 대공은 자신의 목을 마구 긁어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칼라일이 이카니엘 대공에게 그의 모든 마력을 강제적으로 불어넣고, 또 불어넣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신에 너는 마수도 뭣도 아닌 괴물이 되어버리겠지만.”
이카니엘 대공의 몸이 마력을 채 받아들이지 못해도 칼라일은 묵묵히 마력을 계속해서 그의 몸에 불어넣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마력을 전부 다. 과도한 마력으로 이카니엘 대공의 몸이 기괴하게 변해도.
기사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상대했던 마수처럼 변하는 이카니엘 대공을 보며 다시금 검을 쥐었다. 이카니엘 대공의 몸에는 이제 가늠할 수조차 없는 마력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사람이 아닌 완전한 마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법사들 중에서 마력을 빼앗고, 다시 불어넣는 능력은 샤를로테 딱 한 명뿐이었어. 그래……한 명뿐이지.”
이카니엘 대공은 검은 피를 토해내며 몸 형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는.”
칼라일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이카니엘 대공이 그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그를 내던졌다.
“끄윽, 내가, 끅. 이대로…….”
눈에서 피가 떨어지는 이카니엘 대공은 목을 부여잡은 채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더듬더듬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제야 칼라일이 일부러 자신에게서 마력을 뺴앗아가겠끔 유도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어떻게든 몸 안을 돌고 있는 마력을 없애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늦어있었다.
칼라일은 진득한 피가 묻은 손을 털어내며 발끝으로 이카니엘 대공을 툭툭 쳤다.
“터져서 죽은 기사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그때 알았어. 마수는 절대 터져 죽지 않거든.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 네가 심어놓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혹시나 네 계획과 관련된 사실을 말할까, 일부러 터트려 죽인 것을.”
이카니엘 대공은 짐승에 가까운 소리로 울부짖으며 까맣게 죽어버린 피를 토해냈다.
“그래서 일부러 샤를로테, 딱 한 명만이 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잘 속아주던데. 누아르 이카니엘 대공.”
뼈가 기괴하게 꺾이고, 몸은 크게 부풀어 완전한 괴물이 되어버린 이카니엘 대공은 거대한 이빨을 드러내며 이성을 잃은 채 비틀거리며 칼라일에게 달려들었다.
“죽음으로 그에 따른 죗값을 치르기엔 현저히 적지만.”
칼라일은 뺨에 튄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에게 거대한 원한을 가진 사람은, 나 말고도 또 있으니 이번에는 그에게 양보하도록 하지.”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이카니엘 대공의 고함이 뚝 끊겼다. 피와 함께 뒤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눈이 점점 검게 변하더니 이내 먼지가 낀 듯이 뿌옇게 변했다. 그의 목은 점점 기울더니, 이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닥을 구르는 머리, 그리고 쓰러진 몸체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 사이로, 로웬이 잘린 이카니엘 대공의 목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웬의 검에 의해 처형당한 이카니엘 대공의 시체는 이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잠시의 침묵 후, 한 기사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 탄성이 귓가를 스친 순간, 들고 있던 활을 떨어트리고 칼라일에게 다가갔다. 두 번의 폭발 마법으로 이미 몸 이곳저곳이 망가진 상태였지만 상관없었다.
“칼라일……!”
“왜 그래, 설마 내가 죽은 줄 알았어?”
그를 끌어안은 순간, 정말 칼라일이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칼라일, 칼라일. 네가 살아있어. 네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희생이라던가, 그런 선택을 한 줄 알았어.”
하지 않았을 것을 알면서도, 네가 그런 선택을 했을까 봐. 이 전쟁이 끝나고 돌아갈 때, 내 옆에 네가 없을까 봐 두려웠어. 칼라일은 이제 내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모든 이들을 잃고, 하나 남은 약혼자에게도 배신당했을 때. 그때 나는 너를 구했지만, 너는 내 앞으로의 삶을 구한 셈이니까.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겠어. 제대로 된 청혼도 못 했는데.”
몸의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기사들이 환호하고, 로웬이 다른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무어라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 귀에는 오로지 칼라일의 목소리만이, 고른 그의 숨결만이 들려왔다.
칼라일은 애써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였지만 그도 나와 비슷하게 몸이 떨리고 있었다. 쓰디쓴 탄약 냄새, 그 사이로 느끼지는 싱그러운 풀냄새……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를 숨기려 일부러 더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끝났어.”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인지 칼라일은 작게 속삭이며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이 질긴 악연이 전부 끝났어.”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칼라일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나에게 확인이라도 하듯 재차 말하며 입을 맞췄다.
그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이제 돌아가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