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전부 빼앗아버리면.
잠에 들 때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기억은, 칼라일과 비슷한 외향의 남자가 내 검에 찔려 죽은 모습이었다. 그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함께 잠들었던 릴리의 말에 의하면,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고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는 횟수가 점점 빈번히 늘어났다.
밤새 고문당하던 기억, 의지와 상관없이 고위 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죽이는 것. 무언가 편지를 작성해, 전서구를 통해 날려 보내는 것. 그리고 가장 괴로운 기억은 릴리를 공격하던 기억이었다.
이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기억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내 기억에는 없는 것들만 떠올랐는데, 왜 갑자기 릴리를 공격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그리고 점점, 괴로워졌다.
사랑하는 이가 눈앞에서 내 검에 찔리고 베여, 아파하고 있다.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물론 릴리는 내가 휘두르는 검을 잘 피했고, 맞받아쳤지만 버거워 보였다. 이대로라면, 검에 베일 지도 모른다. 상처를 부여잡으면서 쓰러지겠지. 손은 미친 듯이 떨리는데 내 의지에 다르게 손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깨어나자.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깨어나자, 깨어나자. 깨어나자.
제발
제발
제발
그리고 그 순간 흐릿한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이, 온몸의 신경이 되돌아오면서, 감각이 점점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지? 정신을 차린 듯했지만 기억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릴리가 벽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깨어난 것이 아닌가? 그럼 왜…….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그때 나는 릴리의 눈을 공격했다. 주변에 칼라일도 있었고, 아니. 여기는 어디지? 대공저가 아니잖아.
뭐지? 어떻게 된 거야.
기분 나쁜 바람이 팔을 스쳤다. 깨어난 것 같은데, 그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릴리는…….
“로웬!”
손을 뻗은 순간 릴리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릴리를 끌어안으며,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진짜 릴리다, 기억이 아니야. 정말로, 살아있는 릴리다.
기억 따위가 아니야.
떨리기 시작하는 손으로 릴리의 두 뺨을 감쌌다. 자잘한 상처 하나하나가 전부 다 만져졌다. 그 순간 손끝이 눈가에 닿았다. 지워지지 않을 선명한 흉터. 호흡이 멈췄다. 생각도 멈춰버렸다. 내가 또 릴리를, 다시는 공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나는 또 왜 릴리를. 공격한 거지?
혼란스럽다 못해 괴로워 죽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누군가 이유라도 알려줬으면 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이 상황을 멈춰줬으면 했다.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릴리를 세게 끌어안은 채 떨었다. 무서웠다. 나로 인해 릴리가 이렇게 다친 것도 두려웠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언제 또 이성을 잃고 릴리를 공격할지 몰라서.
“세뇌가 풀려서 다행이군. 지나쳤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 순간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올라왔다. 칼라일이었다. 이 자가 왜 여기에 있지?
그런데, 세뇌라니?
“괜찮아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세뇌가 모두 풀렸으니까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세뇌를 당했다고, 내가?
그리고 릴리가 마침내 꺼낸 그 이야기, 칼라일이 말하는 이 상황의 원인들, 그리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짓을 전해들은 순간, 머릿속이 거칠게 헤집어지는 감각과 함께 잠들 때마다 떠올랐던 기억들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모든 것이 전부 기억났다.
***
“커헉.”
칼라일이 일부러 마법을 쓰지 않고 날아오는 검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방심시키기 위함이었나. 로웬이 뒤에서 공격하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카니엘 대공은 자신의 가슴팍을 꿰뚫은 검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심장이 관통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꿰뚫린 상처에서 아까처럼 많은 양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베논 제국의 기사들을 모두 죽여라. 포로 따위 필요 없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로웬의 붉은 눈동자는 이카니엘 대공을 향해 있었다. 세뇌가 풀린 건가? 설마……세뇌 당했을 당시의 기억도 찾은 건가.
로웬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나와 칼라일을 둘러싸고 있던 베논 제국의 기사들과 레이몬드 제국의 기사들은 다시금 검을 맞부딪히며 싸우기 시작했다. 죽은 레이몬드 제국의 기사들은 본 이들은 더 맹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하, 하하……!”
이카니엘 대공은 밀리기 시작하는 베논 제국의 기사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소름끼치는 웃음에, 피가 울컥 치솟았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는 검은색이었다. 심지어 피가 닿은 부분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마수의 피는 검은색이었다. 이카니엘 대공이 정말로 마수가 되어버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다를 바가 없어……너는 아카데미 시절에도, 그랬었지.”
이카니엘 대공이 자신의 가슴팍에 꽂혀있던 검을 꽉 움켜쥐자 산산조각이 나며 부러졌다. 하지만 공격은 통했는지 마력은 계속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키데미 시절?”
“그래. 이제야 기억나나?”
칼라일의 움직임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서늘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니, 기억나지 않아.”
“…….”
“기억력 문제가 아닌, 아마 기억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겠지.”
말이 끝나자마자 이카니엘 대공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칼라일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칼라일을 뒤로 끌어당기려 했지만, 오히려 칼라일에 의해 뒤로 밀쳐진 것은 나였다.
이카니엘 대공의 검을 손으로 움켜쥔 칼라일의 눈동자가 기이한 붉은빛으로 빛나더니 이내 쾅, 소리가 나면서 이카니엘 대공과 칼라일 사이로 굉음에 가까운 폭발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 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열두 마리의 정도의 마수가 나에게로 달려들었으니까. 아까 다 죽였다고 생각했던 마수가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이빨을 들이밀며.
재빨리 검을 주워들어 턱 아래로 검을 박아 넣었다.
귓가에서 피가 흐를 것만 같은 울음소리가 허공으로 퍼지고, 마수는 축 늘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심장 쪽에 검을 찔러 넣었다. 마치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마수는 뼈만 남고 전부 녹아버렸다.
그래……뼈만 남고.
비록 눈앞에 있는 것은 사람 뼈였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마수가 너무 많았다. 일일이 하나씩 처리하기는 버거웠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한 번에 터트리는 건데, 이카니엘 대공에게 마력을 모두 빼앗겨버려서 불가능했다. 물론 마력이 희미하게 남기는 했지만……여기서 이 마력을 써버리면 몸에 큰 무리가 가겠지.
이러다가는 또 마수들한테 제국의 기사들이 당할 텐데.
로웬 혼자서 마수 둘을 죽이는 것이 보였지만, 그도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다. 그때 바로 옆으로 마수가 울부짖으며 기사들에게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막아야 했다. 더 이상의 사상자가 나오게 둘 수는 없어.
그때 기사들에게 달려 나가려는 나를 누군가 붙잡았다. 그리고 마수의 움직임이 멈추면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내 마력을 줄게.”
손끝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마력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샤를로테, 네가 왜 여기에.”
나를 막은 이는 샤를로테였다. 샤를로테의 몸에는 각기 다른 마력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참을 비틀거리던 샤를로테는 나에게 모든 마력을 넘기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샤를로테!”
붙잡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아이는, 살아있나?
배 위로 손을 뻗었다. 치유 마법이 아이에게까지 통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아이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마력이 다시 처음 상태로 돌아왔다. 얼마나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몸에 돌고 있는 마력의 대부분은 마수의 마력이었다. 재빨리 허공에 워프를 띄웠다. 마법진을 통과하자마자 지하궁으로 갈 수 있었다.
내가 허공에서 샤를로테를 품에 안고 나타나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라며 나에게 다가왔다.
“황궁의! 황궁의는 어디에 있느냐!”
지하궁에서 다친 이들을 돌보고 있던 황궁의가 황급히 달려왔다.
“샤를로테를 살펴라. 어떻게든 아이를 구해. 마법으로 손을 써놨지만 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구해라. 무조건.”
황궁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구급용품을 가지러 뛰어갔다. 샤를로테의 몸이 차가웠다. 마력이 모두 빠져나가며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만, 정말로 이대로 차갑게 굳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한이 들었다.
“미안, 해.”
“……살고서나 그런 말 해. 너는 모든 죗값을 모두 받아야 해. 너로 인해 비극적인 삶 속으로 빠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살아.”
냉랭한 내 말에 샤를로테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마……루치아노를 위해서라도, 살 테니까. 죗값도, 다 받을 거야. 도망치기에, 이제는 지쳤어…….”
루치아노? 루치아노를 위해 살겠다고?
“너는 루치아노를 싫어했잖아, 아닌가?”
“싫어했지……어떻게든 싫어하려 했지. 아니면 내가 죽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아닌가 봐, 루치아노가 나한테 정을 못 뗀 것처럼, 나도 루치아노에게…….”
싫어했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괴로운 얼굴이었다. 샤를로테는 작게 신음을 내뱉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나 아름답던 금빛 눈동자가 먼지가 가득 낀 것처럼 탁했다.
“그럼 황궁에서는 왜 내쫓은 거야.”
“…….”
“내쫓은 이유가 있어?”
내 물음에 샤를로테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다 늙어빠진 아버지, 황제라는 작자는 남색을 즐겼지.”
그리고 말라붙고 찢어진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토해내듯 말했다.
상처가 가득한 뺨 위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루치아노가 성인이 되자마자 자기 하렘에 넣으려고 했어. 그래서 내쫓았어…….”
***
다시 워프를 통해 전장으로 나왔을 때는 베논 제국의 기사들이 모두 전멸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경계를 풀지 않고 오로지 한 곳을 바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칼라일과 이카니엘 대공이 있었다.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들 칼라일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간 순간 알 수 있었다.
마력의 기운이, 다리가 얼어붙을 정도로, 오싹한……마른침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어떻게 싸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둘은 피에 흠뻑 젖어있었고, 상처가 심했다. 멀리서 본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칼라일의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마법을 과도하게 써서 그런가, 더 이상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이카니엘 대공이었다. 그의 얼굴은 기괴하게 변해, 마수가 되기 바로 직전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칼라일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며 이카니엘 대공의 한쪽 팔을 잘라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이 떨어졌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자리에 새 팔이 돋아났다.
“샤를로테, 그 패전국의 황녀가 너에게 마력을 더 넘겨준 건가?”
“넘겨받아봤자, 겨우 마법을 하나 쓸까 말까한 마력인데. 그럼에도 네 놈은 나를 이기지 못하는 군. 싸워보니 실력도 생각 이하고, 그 잘난 기세는 다 어디로 간 거지?”
꿈틀거리며 자라나는 팔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을 거라고.
그때 칼라일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지고 피로 뒤엉킨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마주치자, 그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나를 사랑스런 표정으로 바라볼 때마다 짓던 표정이었다. 저 순간에, 왜 웃는 걸까.
그러나 나는 칼라일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카니엘 대공이 칼라일의 목을 잡고 바닥으로 내던졌다.
“모든 마수와 마법사의 마력을 흡수해도, 결코 네 마력만큼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녹슨 쇠가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침묵을 가로질렀다.
“전부 빼앗아버리면, 끝날 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