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전부 다 기억났어.
그의 뒤로 전멸한 레이몬드 제국의 기사들이 보였다. 아니다. 그중에는 베논 제국의 기사도 있었다. 베논 제국의 기사들은 왜 다 죽어있는 거지?
죽어있는 기사들에게서 이카니엘 대공과 똑같은 마력이 느껴졌다.
설마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인 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이카니엘 대공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당신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았어. 어떻게든 접근하면서 당신을 조종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지…….”
나에게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고? 문득 이카니엘 대공이 나에게 접근할 때마다 그의 눈이 기이할 정도로 붉게 빛나는 것이 떠올랐다. 역시 마법을 쓰면 눈이 붉게 빛나는 거였어. 그때마다 마법을 쓴 거야.
“하지만 납치해서 고문한다거나 의도적으로 정신을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어.”
그가, 죽은 마법사의 목을 들어 올린 순간, 그의 마력은 순식간에 거대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력을 빼앗았구나.’
이카니엘 대공은 마법사의 시체를 바닥으로 내던지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평범한 기사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내가 이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마력부터 차이가 날뿐더러, 내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미 질 것을 짐작하고 있는 건가,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그렇다면 마법이 아니라 물리적인 공격이 통할지도 모른다.
들고 있던 검을 떨어트리고 소매 안쪽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이카니엘 대공의 눈을 베었다.
눈을 공격할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잠시 주춤하던 이카니엘 대공의 팔다리를 구속한 채 그의 몸을 불길로 휘감았다. 내 팔마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아까처럼 불길과 함께 터트리기 위해. 아니면 쉽게 움직이지 못할 부상이라도……!
하지만 분명 구속을 했음에도 이카니엘 대공은 내 팔을 꽉 움켜쥔 채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불길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 눈을 베어냈는데?
그리고 그의 몸을 휘감던 붉은 불길이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분명 다른 마법사였다면 공격할 생각조차 못 했을 텐데…….”
잡힌 팔이 순식간에 그에게 끌어 당겨졌다. 마법을 쓰려고 해도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 안쪽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서늘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지만,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죽여야 하겠지. 칼라일만큼은 아니지만 거슬리는 존재니까.”
……마력을 빼앗기고 있어.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레이몬드 제국의 대공, 로젤리아 가넷.”
이카니엘 대공은 내 턱을 들어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뒤에서 트리벨 경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덩달아 기사들의 날카로운 비명도.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했다. 몸이 저절로 떨릴 정도로, 거대한 두려움이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떨지 마, 무서워하지 마.’
이를 악문 채 이카니엘 대공의 눈을 베었던 단검으로 내 팔을 부러트릴 듯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푹 찔렀다.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검이 깊숙이 박혔음에도 이카니엘 대공은 여전히 수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이라도 베논 제국 쪽으로 넘어와라.”
“……뭐?”
“그렇다면 네가 사랑하는 그놈과 네 목숨만큼은 살려주지.”
내가 사랑하는……설마 칼라일을 말하는 건가?
“그 우스운 사랑, 꽤나 각별한 듯 보이던데. 참으로 우습지. 어떻게 제 가족들을 모두 죽인 자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그 순간 모든 사고가 멈췄다.
“역시, 네가 그 모든 일을!”
“맞아. 전부 내가 주도했다. 미엘르가 로웬 경에게 세뇌마법을 걸도록 지시한 것도, 헬리오도르 저택을 공격하라 지시한 것도.”
모든 비극의 시작이, 바로…….
“모두 네 놈 때문에!”
너만 아니었다면 그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어!
검 손잡이를 으스러트릴 듯 쥐고는 가슴 안쪽으로 찔러 넣었다. 심장 부근을 찔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심장을 비껴나간 듯 비스듬히 들어간 검을 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 곧바로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등이 아팠다. 세게 내던져진 탓에 어깨가 바닥과 부딪히면서 금이 간 것 같았다. 어깨를 부여잡은 채 겨우 바닥을 짚었다.
물리적인 공격도,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이대로라면 침공을 막아낼 수 없다. 마력을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마법을 쓰리란 불가능했다. 현재 레이몬드 제국의 기사들이 베논 제국의 기사들보다 훨씬 강했지만, 이러다간 이카니엘 대공에 의해 모두 전멸할 것이다.
모두, 전멸…….
‘!’
아팠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괴로웠다. 그러나 이카니엘 대공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고통 따위 그 비열하고 소름끼치는 미소로 지워버리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처음으로 이카니엘 대공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바닥으로 내던져지기 전, 자신의 심장 부근에 박아 넣은 검을 빼 바닥으로 던졌다.
그러자 그 상처 사이로 검은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마수처럼……마수를 죽일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터져버린 기사의 시체도, 심장 쪽에서 강제적으로 불어 넣어진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카니엘 대공도……현재 마수처럼 되어버렸다는 건가? 마력을 너무 많이 흡수해서?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죽여야겠어. 어쩌면 칼라일보다 더, 성가신 존재일지도 모르겠군.”
중얼거리는 듯한 말과 함께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이카니엘 대공의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선명한 눈을 마주친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단순한 호흡 곤란이 아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손틉으로 바닥을 긁으며,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하다못해 이카니엘 대공의 약점이 심장일지 모른다고, 거의 마수가 되어버렸을지 모르니, 심장을 공격하라고. 그렇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목을 부여잡은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다 막힌 숨이 터져 나온 순간, 내 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로젤리아!”
목이 따가울 정도의 마른기침과 함께 누군가 나를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트리벨 경인가? 다른 기사들인가? 하지만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과 함께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 위로 은빛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칼, 라일.”
네스 영지에 있다던 칼라일이 왜 여기에 있을까. 분명 칼라일은 네스 영지에…….
“잘 버텨줘서 고마워. 내가 너무 늦었지.”
살짝 이마를 맞대자 느껴지는 온기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정말 칼라일이구나. 다치면 어떡할까. 다치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하지. 걱정하고 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의 상태는 양호해 보였다.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뺨을 조심히 쓸어내렸다.
“……더 늦게 와도 괜찮았을 거야.”
살짝 농담이 섞인 어조로 말하자 칼라일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카니엘 대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핏빛으로 변해버린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오랜만이군, 칼라일 헬리오도르.”
“….”
“간만에 오랜 친우를 만나니까, 기분이 어때?”
……친우?
힘겹게 고개를 들자 딱딱하게 굳은 칼라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친우인가 싶었지만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칼라일에게 마수와 비슷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니야, 칼라일의 몸에 마수의 마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누군지 모르겠군. 이카니엘……이라는 성은 처음 들어보는데.”
“……나를 모른다고?”
“너처럼 변변치 않은 마력을 가진 자의 이름은 내 기억 속에 없다.”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칼라일은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기침이 수그러졌다. 타들어 갔던 팔도 나아졌다.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칼라일의 옷깃을 꽉 움켜쥔 채 상체를 반쯤 일으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심장이 약점이야.”
작게 기침하자 손바닥에 피가 묻어났다.
“심장……설마 마수가 되어버린 건가.”
“그런 것 같아. 죽어있는 마법사들의 마력을 모두 흡수했어. 내 마력도 흡수했고. 내가 심장을 찌르니까 그 자리에서 마력이 흘러나왔어.”
칼라일은 그의 눈앞에서 터져버린 기사의 시체를 떠올리는지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손 위로 마법진 여러 개를 띄웠다. 그의 입으로 변변히 않은 마력이라 말했지만, 그래도 다른 마법사들보다는 월등히 강한 것인지, 그의 얼굴에서 평소와 다르게 긴장한 기색이 보였다.
“나를 모르다니.”
“!”
“이것 참 섭섭하군. 그렇게 친했는데.”
그 순간 눈앞으로 내가 떨어트린 검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칼라일을 옆으로 밀쳐 날아오는 검을 피했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기사의 몸이 검에 의해 꿰뚫렸다. 그리고 그 검이 레이몬드 제국의 기사를 모두 베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안 돼!”
쓰러지는 기사들에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죽은 기사들이 떨어트린 검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나와 칼라일의 주변을 에워쌌고, 베논 제국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나와 칼라일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검 날에 묻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내가 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했나, 가넷 대공?”
이카니엘 대공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너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설마 본인의 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아니, 이미 그의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죄책감 하나 없이, 비극의 시작이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만 아니었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악문 채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저주 어린 말을 내뱉었다.
비록 칼라일은 만나지 못했겠지. 나를 진정 사랑해준 이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 페르소나는 샤를로테가 아닌, 다른 정부를 데리고 왔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랬을지도 몰라. 그럼 나는 홀로 배신의 상처를 안고 살아갔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칼라일이 친척들이 눈앞에서 끔찍하게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부모님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고.
저 놈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의 죄도 모른 채 살아가는 자가 베논 제국의 대공이라고? 너 같은 자를 강한 마법사니, 뛰어난 책사이니 지껄이는 꼴을 보아하니 그 제국도 별 것 없군.”
가엾을 지경이야.
“이 비극의 시작은 내가 아니다.”
“….”
“그건 알고 죽도록 해.”
이카니엘 대공이 서늘한 미소를 흘리자, 허공으로 떠올랐던 수많은 검이 동시와 나와 칼라일에게로 날아왔다. 눈앞으로 검이 번쩍이며 날아왔지만, 칼라일은 마법을 쓰지 않고 나를 끌어안은 채 이카니엘 대공을 응시했다.
“심장이 약점이다.”
칼라일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나와 칼라일을 향해 날아오던 수많은 검이 바로 눈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바닥으로 비 오듯 떨어졌다.
검날과 검날이 맞부딪히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쿨럭이는 소리가 귓가를 헤집었다.
“……심장이 약점인지 아닌지는, 시험해보면 되겠지.”
이카니엘 대공의 심장 위로 검이 박혀있었다. 뒤에서 던진 건가? 누가?
그때 이카니엘 대공의 어깨너머로 익숙한 잔상이 눈에 들어왔다.
“전부 기억났어, 갑자기 기습당한 것도. 끔찍한 고문을 당한 것도, 그 잔혹하게 학살의 모습도…….”
이카니엘 대공에게 세뇌 당했다던 로웬과 그의 기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