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어째서.
안케도니아 황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슬리가 미엘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당연히 안케도니아 제국이 침공 당했을 때 1황녀이자 황태녀인 그녀가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왜 시슬리, 아니 미엘르가 이카니엘 대공의 보좌관을 하고 있었지?
“당신이 정말로 미엘르…….”
하지만 쉽사리 믿을 수는 없었다. 이미 샤를로테가 1황녀라며 거짓을 말하지 않았었나. 게다가 미엘르는 이카니엘 대공이 무척이나 총애하는 보좌관이라고 했었다. 일부러 혼란을 주기 위해 이카니엘 대공이 보낸 거라면?
당장이라도 잡아서 감옥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미엘르의 발에서는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마력이 굉장히 불규칙하게 흐르고 있었다. 더불어 어딘가에 묶여있기라도 한 것인지, 새하얗고 가느다란 말 위에는 묶여있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폐하, 이 자는 이카니엘 대공이 데리고 있던 보좌관입니다. 믿으시면 안 됩니다. 일부러 혼동을 주기 위해……!”
“아닙니다! 대공 각하! 각하께서 절 찾으신 이유가 무엇이죠? 제가 안케도니아 황족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셨기 때문에 절 찾으신 것 아닌가요?”
눈을 가린 천 위로 선명하게 새어나오던 금빛 눈동자. 그래, 그것 때문에 일부러 찾아다닌 것이 맞았다. 안케도니아 제국의 황족이라고 생각한 것도 맞았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말을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마법으로 모습을 바꿀 수도 있는 상황이고, 얘기를 들어보자고 해도……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이미 샤를로테가 한 거짓말로 인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마수와 언제 터질지 모를 전쟁에 바짝 긴장을 한 분위기였다. 더더욱 페르소나가 저렇게 의심 가득한 눈을 하고 있는데…….
“미엘르 안케도니아는 죽었다. 안케도니아 황궁에 1황녀의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걸려 있었다지.”
“그 시신은 제 시신이 아닙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각하만이라도 대화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페르소나는 나와 미엘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기사들은 페르소나의 신호가 내려오자 곧장 미엘르를 제압하고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새하얀 피부 위로 피가 맺히더니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하지만 미엘르는 목에 검이 들어왔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외쳤다.
“각하! 이카니엘 대공이 루치아노를 데려갔습니다.”
그 순간 덜컥 내려앉았던 심장에 비수가 날아와 박힌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크게 휘청거렸다. 그럼 그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피가, 초록빛 수풀을 검붉게 물든 이가, 바로…….
“샤를로테를 이용해 루치아노의 마력을 모두 흡수시키고 그 마력으로 마수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 마수를 모두 네스 영지에 보내고요! 각하, 각하께서 지금 당장 그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그러다간 샤를로테와 루치아노가 모두 죽을 겁니다!”
루치아노가 죽는다고? 샤를로테도? 이카니엘 대공 때문에?
“똑바로 말하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미엘르는 살갗이 검날에 베이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은 채 내 어깨를 콱 붙들어 맸다.
“마력을 흡수하게 되면 커다란 부작용도 함께 뒤따라옵니다.”
“!”
“마력을 흡수하는 연구를 성공했다면 진작에 마수들을 생성해, 다른 나라를 하나하나 침공했을 겁니다. 하지만 왜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큰 부작용, 설마 부작용 때문에 샤를로테를 데려간 건가? 그래,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베논 제국이 무슨 이유로 샤를로테를 데려갔을까, 이미 마력을 흡수하는 연구를 성공시키지 않았나. 마력을 불어넣는 것을 못해서? 그건 마력석을 만들어 먹이면 되는 일 아닌가?
설마 그 부작용이라는 게…….
“샤를로테는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 능력을 쓰면 쓸수록……죽어간다는 사실을요. 지금 당장 그 둘을 데려와야 합니다. 지금 당장이요!”
생각이 멈췄다. 호흡도 멈췄다. 정말 이 말이 사실이라면, 루치아노는 죽게 된다는 소리였다. 마력을 모두 빼앗겨서, 아니면 마수가 되어버리겠지. 그런 기괴한 모습으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학살하고……만약 이미 마수가 되어버렸다면? 그렇게 네스 영지로 보내졌다면?
지금 칼라일이 상대하고 있는 마수가, 사실은 루치아노라면?
가장 최악의 가정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굳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죽었을 리 없다. 죽지 않았을 거다. 주먹을 쥔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손톱이 점점 살갗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 사실을 왜 알려주는 거지?”
상념을 깨트린 목소리의 주인은 페르소나였다.
“이카니엘 대공의 보좌관이라는 자가 왜,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인가, 애초에 보좌관으로 있었다는 것은 안케도니아 제국을 배신하고 베논 제국 쪽으로 붙었다는 소리 아닌가?”
페르소나는 아직 완전히 미엘르를 신뢰하지 못한 듯 보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내 어깨를 부여잡은 채 다급하게 외치는 미엘르의 손은 말하는 내내 계속 떨리고 있었다. 로웬에게 세뇌마법을 걸었다고 말하던 그때처럼.
“저는 1황녀이며 황태녀지만, 단 한 번도 제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저는 다른 나라와의 협상을 위한 도구로서 팔려갈 예정이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다 늙어 죽어가는 왕국의 왕비로요.”
미엘르는 입술을 꾹 문 채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케도니아 제국이 미엘르를 황태녀로 만들었다고 했을 때 놀라움보다는 의문이 먼저 들기는 했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하다 못해 뿌리가 내린 그 제국에서 황태녀라니. 하지만 사실은 황태녀인 척, 후계자 교육시키는 척 타국의 왕비로서 일할 수 있도록 교육하려 했던 목적이었을까.
“침공당했을 때 저는 어떻게든 그 자리에 있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공이 먼저 말하더군요. 제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겠다고요. 제가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말입니다.”
미엘르는 찢어지고 피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꾹 누르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마수를 만들고, 마력을 흡수하는 연구랍시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끔찍한 짓을 도모할 거라고는, 만약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순순히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와서 알리지 않았지요? 그때 나와 만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그때 로웬 경이 납치되어 오는 바람에, 세뇌 마법을 걸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방에 가둬졌어요. 전서구를 보냈으니 망정이지…….”
전서구? 로웬이 납치되었다고?
“나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어요.”
“……네?”
“전서구라니, 로웬이 납치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로웬은 지금 네스 영지에 있는데!”
트리벨 경이 다급하게 기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로웬이 납치되었다고? 주변이 점점 소란스러워지는데 모든 소리는 귓가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럼 로웬은 어떻게 네스 영지로 간 거지? 분명 칼라일과 합류한다고 말했잖아?
“제가 분명 전서구를 통해 로웬 경은 지금 세뇌 상태에 걸렸으니, 어딘가에 가둬두라고, 속박이라도……! 그런데 네스 영지에 있다니요!”
미엘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설마 창문 틈 사이가 벌어져 있던 것이 일부러…….”
함정에 빠졌다.
로웬은 세뇌마법에 걸렸지만 칼라일과 합류한다면서 그 사실을 모르게 한 거야.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려 했지만,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지금 당장 네스 영지로 전서구를 보내거나 사람을 보내 상황을 확인하게 하라! 마지막으로 로웬 경과 함께 있던 자가 누구지?”
지금 당장 칼라일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전서구를 보내면 늦을 것 같았다. 이미 세뇌당한 로웬이 칼라일과 합류한다는 쪽지를 보내왔으니까.
“제가 가야 합니다, 폐하.”
“네스 영지로? 대공, 지금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알고 하는 말인가!”
“여기서 로웬 경에게 네스 영지로 가라고 지시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로웬 경이 네스 영지로 간 거란 말입니까!”
얼굴에 혼란이 가득한 페르소나를 밀쳐냈다.
네스 영지에 간 기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 내가 직접 워프를 통해 네스 영지로 가야 해. 생각이 정리된 순간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설령 칼라일이 알아차리더라도 로웬을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법을 써야 할지 말지 망설여지겠지.
“칼라일 그놈은 강하지 않느냐!”
“폐하!”
“왜 자꾸 가려는 것이냐, 너는 기사도 아니다. 네가 할 일은 이곳에서 지휘해야 하는 일인데, 왜 자꾸 그 위험한 곳으로……!”
허공에 마법진이 떠올랐지만 페르소나는 워프를 사용하려는 나를 막아섰다. 마법진 너머로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페르소나는 내 팔을 움켜쥔 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군사들을 더 보내면 된다. 너는 이곳에 있어라.”
“제가 가야 합니다. 비켜주십시오, 폐하.”
그러나 페르소나의 말을 따를 생각은 없었다. 잡힌 팔에 힘을 주자 페르소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로젤리아, 제발…….”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그 목소리는.
“제발 가지 마.”
거의 죽어가는 사람처럼 들렸다.
정말로 그가 죽어갈 정도로 괴로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티가 나지 않을 뿐이지 나 또한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또다시 반복되는 상황, 칼라일은 강하지만 상대는 로웬. 칼라일이 제대로 상대할 리가 없다.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겠지. 나의 혈육이니까.
만약 그러다 칼라일이 다치면, 큰 부상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로웬은 이미 헬리오도르 가문을……칼라일의 친척들을 모두 죽이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폐하.”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마법진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런 비극이 다시 벌어지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칼라일만큼은 로웬과 대치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진을 통과할 수 없었다. 페르소나 때문이 아니었다.
마법진이 막혀있었다. 워프가 되지 않았다.
***
방금 그 괴물들은 뭐지?
릴리는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다급하게 닦아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뭐야, 설마 마수인가?
만약 그 지하실에서 빠져나올 때 검을 챙겨 나오지 않았다면 죽었을지 모른다. 대공저에서 보았던 마수, 물론 그건 카렐리아가 변신한 모습이었지만 그와 흡사한 마수와 도망치던 도중 마주쳤다.
죽이려 했지만 죽지 않았고, 다시 살아났다. 심장에 먼저 타격을 준 후에야 겨우 그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릴리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드레스 자락을 찢어 팔에 생긴 상처를 압박했다. 루치아노가 겨우 치료했는데……이러다가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가던 도중 쓰러질 게 뻔했다.
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지하실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왔지만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거리를 한참이나 돌아다니다가 아까처럼 마수들과 마주치기만 했다.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바닥에 흩뿌려져있는 피와, 무너진 건물들. 이런 곳이 있었나? 그때 릴리의 발걸음이 익숙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심하게 손상된, 로젤리아가 세운 무역 상단 건물…….
설마 방금 그 폐허 같은 곳이 네스 영지 바로 옆에 있는 상단 거리?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폐허가 되어버린 거지?
릴리는 검을 더 꽉 쥔 채 얼어붙었던 다리를 겨우 움직여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상단 거리라면 이 근처에 네스 영지가 있다. 네스 영지는 수도와 직결되니까, 황궁으로 갈 수 있겠지.
하지만 릴리의 걸음은 얼마 못 가 다시 멈췄다. 로웬이 앞에 있었다. 군사들과 함께.
“로웬님?”
그가 왜 여기에?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인데,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낀 붉은 눈동자가 텅 비어있었다. 짙은 먼지가 깔린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로웬이 눈앞으로 다가와 검을 높이 들었다.
다급하게 쥐고 있던 검을 들어 그의 검을 막았다.
“로웬님! 로웬님, 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그의 뒤에 있는 기사들은 말없이 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었다.
마수를 상대하고 그 과정에서 다치다 보니 로웬의 검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게다가 많은 마수를 베다 보니 무뎌질 때로 무뎌진 검날은 순식간에 부러져 버렸다.
“로웬……!”
부러진 검으로는 로웬을 막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뺨을 베였다.
피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