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내가 원하던 풍경
손이 덜덜 떨리다 보니 자수가 제대로 놓이지 않았다. 환청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몸의 충격은 가라앉지 않은 것인지, 실크 위에 새겨진 새하얀 토끼 자수는 삐뚤빼뚤한 것도 모자라 눈이 쭉 찢어진 토끼가 되어버렸다.
생각보다 실력이 없는 건가, 아니면 진정이 안 돼서 이러는 건가.
배를 몇 번 쓰다듬은 샤를로테는 자수를 내려놓고 몸을 숙인 채 두 팔을 배를 감싸 안았다. 배가 어느 정도 불렀다. 이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
내 아이, 나의 아이. 아가야, 엄마 힘낼게. 그러니까 아가도 힘내자.
그 끔찍한 광경을 몇 번 더 겪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와 아이는 좀 더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곳, 그렇게 원했던 권력과 지위…….
‘제, 제발, 살려주세요, 죽기 싫어요, 아악, 죽기 싫어요, 제발!’
젠장, 진정한 게 아니었나? 마치 경련이 온 듯 떨리는 손을 꽉 눌렀다. 피가 통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멈춰, 멈추라고, 죄책감에 눌리지 마. 그런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니까 이런 꼴이 된 거잖아, 네 불쌍한 아이를 생각해!
한참을 손목을 꽉 붙든 채 얼마나 있었을까, 떨림이 멈추고 손에 마비가 온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때쯤 이카니엘 대공을 호위하던 기사가 문을 두드렸다. 뭐지? 마수 생성은 분명 내일부터 한다고 말했을 텐데?
“지금 기사들 몇 명이 네스 영지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샤를로테님도 함께 모시고 가라는 각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네스 영지? 항구와 직결된 곳 말인가? 그곳에는 왜?”
“가보시면 압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네스 영지는 항구와 연결된 영지다. 뭘까, 설마 침공을 그곳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걸까. 샤를로테는 벽 위에 떠오른 커다란 마법진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기사들과 함께 침공작전을 시작할 곳을 미리 둘러보고 오라, 뭐 이런 건가?
가고 싶지 않다. 곧 폐허가 될 곳일 텐데. 굳이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침공 작전에 가담하기로 했으니, 여기서 거부해봤자 득 될 것은 없겠지. 샤를로테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법진 속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쩐지 흐릿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이 마법진 안쪽으로 떠밀렸다. 그리고 약간의 어지러움과 함께 순식간에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워프를 쓴 건가? 샤를로테는 눈가를 문지르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했다. 항구니까 바람이 부는 것은 이해하는데, 왜 이렇게 비릿한 냄새가 나지? 단순히 바다 내음이 아니었다. 피비린내, 그래. 피비린내였다.
그 순간 귓가를 날카롭게 베는 듯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흐릿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또렷해지면서, 지금 서 있는 곳이 한 저택의 지붕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항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리고…….
“이, 이게, 이게 무슨….”
왜 항구가 붉은빛인 걸까. 저거, 피야? 저 바닥에 널려있는 것들이 설마, 시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샤를로테는 크게 비틀거리다 털썩 주저앉았다. 지붕을 짚은 손 위로 질척한 액체가 만져졌다. 피였다. 피에 섞인 살점이 손바닥에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우윽!”
속 안의 것들이 전부 올라오는 듯했다. 샤를로테는 입을 틀어막은 채 눈 앞에 펼쳐진 잔혹한 광경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도대체 왜?
그때 저 멀리서 인간 형체의 마수가 거친 소리를 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기괴한 마수가 소리를 지르자 다른 마수들이 모여들었다. 마수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그 마수들이,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낯익었다. 샤를로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만든 마수야, 마력을 불어넣어서 인위적으로 만든 마수……그 마수가 이 영지를 이렇게 만든 건가? 저 사람들을 죽였다고?
침공 작전에 사용될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이렇게 전부 죽인다는 말도 못 들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네스 영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렇게 죽일 필요가 있나? 아니야, 이건 거의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이카니엘 대공이 왜 나를 이곳으로……!”
그러나 기사들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일제히 그들의 검을 꽉 움켜쥐었다. 거의 기계처럼 텅 비고 차가운 시선의 끝에는 수많은 마법진이 있었다. 마법진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군사가 있었다. 워프인가? 그리고 가장 거대한 마법진에서, 칼라일이 나타났다. 그리고 칼라일은 모두가 끔찍한 학살의 광경에 비명을 지르고 패닉에 빠지는 상황에서 홀로 샤를로테와 기사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칼라일의 눈동자가, 핏빛이었다.
은빛이 섞인 눈동자가 아니다, 선명한 핏빛이었다.
피해야 했다. 지금 당장 워프를 열어, 돌아가야 했다. 마수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칼라일인 것을 샤를로테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늦어있었다. 머리와 드레스 위로 뜨거운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자신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 중 두어 명을 남기고 전부 죽어있었다. 살아남은 기사들도 피를 쏟아내며 크게 비틀거리다 이내 쓰러졌다.
새하얀 드레스가 피로 적셔갔다. 칼라일을 이곳에서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움직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칼라일이 샤를로테의 목을 꽉 움켜쥔 채 지붕 아래로 떨어트릴 듯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난간에 겨우 발을 걸친 샤를로테는 극한의 공포에 숨을 몰아쉬며 칼라일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끄윽……!”
“도대체 왜.”
칼라일은 순식간에 사람 여럿을 죽인 것에 비해 굉장히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게 뭐지?”
아니, 정확히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하……얻는, 거? 많지. 아주, 많다고!”
“뭐가 많은 건데, 작위? 권력? 다른 사람들의 피를 쌓아가며 만든 이 권력이 진정 네가 바라는 건가? 그게 그렇게 탐이 났나?”
탐이 나냐고? 당연한 거 아닌가, 어떻게 탐이 나지 않을 수 있겠어.
샤를로테는 손톱으로 칼라일의 팔을 쥐어뜯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모습에 칼라일은 혀를 차며 샤를로테의 목을 세게 압박하다 내던지듯 놓았다. 목을 부여잡은 샤를로테는 그대로 주저앉은 채 지붕 아래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칼라일이 좀 더 힘을 주었거나, 아래로 밀쳤으면……그대로 아기와 함께 죽었겠지. 그런데 왜 살려준 거지?
숨을 가다듬은 샤를로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칼라일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늘진 얼굴 위로 선명하게 빛나는 핏빛 눈동자. 그 눈동자는 샤를로테의 배를 향해 있었다.
자신을 살려준 게 아니었다. 뱃속에 있는 아기를 살려준 거였다.
아기만 아니었다면 곧바로 죽였을 거야.
몸이 절로 떨렸다. 하지만 입은 통제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실과 얽힌 마법사 가문, 대마법사 수준의 마력을 타고난 네가, 무엇을 알겠어.”
게다가 내가 가진 능력을 숨기고 일부러 말하지 않은 주제에, 그때 네가 그것만 알려줬다면 내가 좀 더 나은 황녀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다들 말하더라. 노력하라고, 출신이라도 천하면 노력을 하라고. 그래서 노력했어. 그렇게 배운 게 이거야, 살아남는 방법! 아득바득 살아남으면서 배운 게 이거라고! 지식? 예법? 예절? 그런 거 배웠으면 내가 지금 살아있을 것 같아? 아니. 진작에 죽었겠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샤를로테는 재빨리 손을 뻗어 죽어있는 기사 중 한 명이 차고 있던 검을 들어 칼라일에게 겨누었다.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하지만, 그래서?”
“당장 검 내려놔, 샤를로테.”
“난 살고 싶었고,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어.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것뿐이야. 너는 몰라, 순탄하게 살아온 네가 뭘 알아.
“마지막 경고다.“
“네가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걸?”
샤를로테는 검을 꽉 움켜쥔 채 비소를 흘렸다.
“내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아니, 내가 너였어도 나는 다른 선택을 했겠지.”
“그게 바로 자만이라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이거야?”
칼라일은 날카로운 검날을 잡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처럼 붉고 선명한 피가 손목을 따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네가 원하는 풍경인가?”
“!”
“이게 네가 원하던 모습인가?”
내가 원하던 모습? 내가 원하는 모습, 풍경은…….
고개가 저절로 바다를 향해 돌아갔다. 예전에 살던 곳도 바다가 있었다. 푸르른 바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밤에는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던 바다. 그렇기에 모든 일이 끝나 베논 제국으로 가서 살게 된다면, 바다 쪽으로 가서 지낼 생각이었다. 거기서 어머니와 루치아노와 함께 지냈던 것처럼 나도 아이에게 똑같이, 해주려고. 저런 음산하고 어두운 바다가 아니라. 이렇게 피와 시체가 가득한 마을이 아니라, 내 행복했던 기억 속 그때 그 마을 같은…….
“칼라일님, 피하십시오!”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커다란 진동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마수가 저택 담벼락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 섬뜩한 두 개의 눈동자가 자신과 칼라일을 향해 있었다. 칼라일은 뒤늦게 마수와 대치 중인 기사들을 돕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샤를로테는 그대로 검을 뿌리쳤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마력을 모두 써, 겨우 허공에 워프 마법진을 띄웠다.
그대로 샤를로테는 마법진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자신을 잡지 않고 가만히 응시만 하는 칼라일을 뒤로 한 채. 그리고 워프된 순간, 샤를로테는 배를 꽉 감싸 안은 채 피를 토했다.
워프가 마력이 많이 든다는 것은 알았는데, 이 정도라고?
샤를로테는 재빨리 주변을 살피며 지하실 쪽으로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마수를 생성해 낸 그 지하실.
‘그곳에서 이카니엘 대공이 잡아온 마법사로부터 마력을 빼앗자. 빼앗아서 치유 마법인지 그걸로 몸부터 치료하면, 아이도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샤를로테는 다급하게 지하실 문을 열며 겨우 벽을 짚고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까와는 다른 지하실인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마력을 빼앗을 개체만 있다면……!
배를 꽉 부여잡은 채 쇠창살로 막힌 감옥 앞에 멈추어 섰다. 이곳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그것도 상당한 마력. 저걸 빼앗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다시 마수를 만들자, 더 많은 마수를 만들어서, 칼라일이 있는 쪽으로 보내는 거야…….
하지만 손을 뻗기도 전에 안쪽에서 먼저 손이 뻗어져 나왔다. 그리고 샤를로테의 팔을 꽉 움켜쥔 채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신의 팔을 움켜쥔 사람을 마주한 순간, 샤를로테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사라졌나……했더니……결국, 이쪽에…붙은 거였어…….”
온몸은 멍투성이에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은 상당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다친 거지? 왜 당장이라도 죽을 꼴을 하고있는 거냐고.
“얼마나, 더, 악랄해져야……마음이, 편해지겠어……?”
루치아노, 네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