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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폐하의 이혼사유-144화 (144/170)

#144화, 점령

건국제는 생각보다 일찍 종결되었다. 아니, 일찍 끝낼 수밖에 없는 건가.

외국 귀빈들도 더 이상 머무는 것이 애매하다고 판단했는지 하나둘 예정보다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협정이나 동맹을 맺으러 온 사절단은 대부분 남아있다는 것일까.

손해라고는 황실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뿐일까. 샤를로테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아벨리는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네트도 아벨리가 쓰러진 충격 때문인지 고열에 시달렸다.

칼라일이 아침 일찍 아벨리와 아네트에게 찾아가기는 했지만, 괜찮을까.

“혹시 황후 폐하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각하?”

앞에 놓인 찻잔이나 쿠키는 거들떠보지 않고 멍하니 있던 탓인지, 리엘 공작부인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죄송해요. 공작부인. 뭐라고 하셨죠?”

“황후 폐하……라고 불러야 할지도 잘 모르겠네요.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그 샤를로테라는 여자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의 결정에 따라야겠죠. 저도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답니다. 여론도 안 좋고, 비난도 점점 거세지고. 나서서 해결하자니 이 일을 벌인 사람이 저니까요.”

그러나 그걸 다 감수하고 저지른 일이었다. 몇몇 귀족들은 샤를로테를 비난하고, 몇몇 귀족들은 나를 비난했다. 샤를로테가 13황녀인 것을 알면 안 즉시 알렸어야지, 일부러 건국제 때를 노려 터트린 거라며 계획적이라고, 국가적 망신은 샤를로테가 아니라 내가 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그렇게 말한 놈들은 전부 칼라일과 짧은 대화 후 곧바로 나에게 와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사과를 해댔지. 뭐라고 말했길래 그러는 걸까.

“그럼 다른 것이 신경 쓰이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그런 거겠죠?”

리엘 공작부인의 말대로 지금 내가 지금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혹시 레이디 시슬리 때문인가요?”

“……역시 헤레이스 왕궁 사교계를 꽉 쥐고 있는 분답군요.”

그래, 시슬리.

시슬리는 분명 어젯밤에 님프 궁 근처로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정작 시슬리는 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도록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분명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계속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결국 시슬리는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나를 속이려 했던 건지.

만나러 가려고 해도 이카니엘 대공은 찾을 수 없었고, 그들이 머물던 저택은 이미 비워진 상태였다. 제국에 더 머물기로 한 것이 아니었나?

“그건 아니에요. 혹시 이카니엘 대공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나요?”

“설마요. 아직 협정이 남았으니까요. 베논 제국과 관련된 일인 건가요? 레이디 시슬리 양이 무례라도 저질렀나요?”

“그건 아니고, 시슬리 양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어서…….”

겨우 실마리를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가?

“각하.”

그때 리엘 공작부인이 천천히 내 손을 감싸 쥐며 미소를 지었다.

“만약 베논 제국에 관한 것이 궁금하시다면 제게 꼭 말씀해주셔요, 사정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이곳에서 베논 제국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와 제 남편일 테니까요.”

“그래요.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할게……요…….”

잠깐만,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분명 기사 보고서에는 헤레이스 왕국에 대한 내용도 적혀있었다. 헤레이스 왕국으로 군사지원을 나갔다가 베논 제국의 군사 요청을 받아들여서 안케도니아 제국을 침공시킨 거야. 그때 로웬이 귀환하고 나서 뭐라고 말했더라?

분명 로웬은 귀환하자마자 곧장 페르소나의 집무실로 왔고, 갑작스러운 전쟁 발발에 경계 태세에 관한 것을 논의하던 나와 페르소나가…….

‘헤레이스 왕국의 군사지원은 무사히 끝냈습니다만, 오는 길에 사고가 생겨 예정일보다 늦게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군대를 재정비하고 베논 제국의 침공에 대응할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헤레이스 왕국에서의 군사지원을 무사히 마쳤다고 말했어.

“리엘 공작부인, 혹시 안케도니아 제국의 침공 당시, 레이몬드 제국에서 군사지원을 보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네? 그럼요. 아무래도 헤레이스 왕국은 베논 제국과 거의 붙어있다시피 있으니까요. 그때 아마 레이몬드 제국의 군사들을 예정보다 일찍 돌려보내고, 곧바로 경계 태세로 돌아갔죠.”

예정보다 일찍 돌려보냈다고?

“예정보다 일찍 돌려보냈다고요?”

“네, 아무래도 베논 제국이니 레이몬드 제국도 경계 태세를 갖추어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각하?”

아니야, 로웬은 귀환 예정일보다 늦게 도착했어.

분명 기억해, 로웬이 예정일보다 늦어지니까, 혹여 베논 제국 기사들과 마주쳐 마찰이 생겼나,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던 걸 똑똑히 기억해. 이틀이나 일찍 출발했다면 분명 빨리 도착했을 텐데….

“리엘 공작부인, 혹시……헤레이스 왕국에는 피해 주지 않는다고 약속드린다는 전제하에서……방금 말한 이야기를, 폐하께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리엘 공작부인의 눈동자가 잠시 커다랗게 변했다가 다시 작아졌다.

“헤레이스 왕국에 피해가 가지 않는다고 약속해드릴 수 있습니다. 설령 피해가 가더라도, 온전히 제가 안고 갈 테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리엘 공작부인은 귀환 도중이던 로웬이 다시 지시를 받고 헤레이스 왕국으로 온 거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리엘 공작은 물론 헤레이스 왕국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군사지원을 해왔으니, 헤레이스 왕국 측에서도 별다른 확인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레이디 시슬리가 아니라 베논 제국과 관련된 일이로군요.”

“부탁드립니다, 부인.”

“헤레이스 왕국에 피해가 오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약조하실 수 있으신가요?”

“약조할 수 있습니다. 피해가 생긴다면 그건 저 혼자 할 겁니다.”

리엘 공작부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 보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였다.

“……베논 제국과 관련된 일이라면 피해와 별개로, 민감한 문제라 잘 모르겠습니다. 남편과 상의를 한 후에 대답을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피해가지 않도록 해준다고 해도, 베논 제국과 관련된 일이면 당연히 망설이는 게 정상이었다. 이해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하는데…….

로웬은 헤레이스 왕국으로 군사지원을 나갔고, 귀환 예정이었다.

안케도니아 제국과 베논 제국의 전쟁이 발발하자, 로웬은 예정보다 일찍 귀환하려 했다.

추측이지만, 귀환 도중 베논 제국의 마법사가 세뇌 마법을 걸어, 안케도니아 제국과 헬리오도르 가문의 멸문을 주도했다.

이후, 베논 제국이 로웬을 조종해 안케도니아 제국을 침공을 도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기사 보고서를 위조하고,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만약 ‘헤레이스 왕국에 군사지원을 마쳤다, 오는 길에 사고가 생겨 예정일보다 늦어졌다.’ 이 말조차 세뇌라면?

하, 아예 베논 제국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군.

이건 단순히 칼라일과 내가 해결할 일이 아니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력연구소로 향했다. 칼라일에게 모든 사실을 전하고, 어떻게든 리엘 공작부인을 설득해 페르소나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했다. 헤레이스 왕국과, 로웬과, 레이몬드 제국이 한꺼번에 얽힌 중대한 문제니까. 헬리오도르 가문의 문제도, 좀 더 빨리 해결되겠지.

‘칼라일은 반대하려고 하겠지.’

기사 보고서도 언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 가넷 가문도 피해를 받겠지.

하지만 계속 이 일을 질질 끌 수는 없어. 이카니엘 대공이 머물던 궁이 비워진 이 시점에서, 이카니엘 대공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을 해결해야 해.

그렇게 머릿속을 생각으로 꽉 채운 채 황궁 복도를 거닐던 도중, 뒤늦게 황궁이 이상하게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 벌어졌나? 샤를로테가 잡히기라도 한 건가?

그때 복도 저 끝에서 황궁의 여럿과 마력연구원들이 마력연구소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때 서던이 온몸에 검은 액체를 가득 묻힌 채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각하, 지금 당장 연구소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연구소에는 왜?”

“지금 네스 영지가 다수의 마수에게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네스 영지가 마수에게 점령당해?

“언제부터? 점령이라니, 그 쪽은 항구와 직결된 곳이라 마수가 나타나려면 바다를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을 텐데?”

“저희도 지금 경위를 파악 중입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마수가 출몰한 거지? 그 소식을 언제 들었나?”

“마수의 공격에 겨우 살아남은 기사가 전하기를, 마을 사람들은 물론 기사들마저 모두 몰살당해 이를 알릴 수단이 없어서……마수가 출몰한 것은 어제 밤부터였다고 합니다.”

어젯밤? 마을 사람이랑 기사가 모두 몰살당했다고……?

네스 영지는 항구와 연결된 것뿐만 아니라 무역으로 활발한 곳이라 기사단을 배치해두는 게 원칙이었다. 각종 사고가 잘 일어날뿐더러 불법 밀수입은 없는지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되도록 훈련을 잘 받은 정식 기사들을 배치해놓았다. 그런데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몰살당하고, 죄 없는 네스 영지 사람들이…….

젠장, 어젯밤부터 시작되었다면 다른 영지들도 공격받고 있을 텐데!

“폐하!”

마력연구소에 들어서자 지시를 내리고 있는 페르소나가 보였다. 그도 마수에 소식을 전달받은 것인지 당황한 관리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침착하게 지휘하려고 하고 있었다.

“대공, 지금 당장 기사들을 네스 영지에 배치하도록 하시오.”

“마수들이 아직 네스 영지에 남아있습니까?”

“그렇다더군. 어젯밤에 네스 영지를 점령하고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때 연구실 안쪽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몇몇 연구원들이 입을 틀어막고 연구실을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시체가 썩는 듯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또다시 소름끼치는 굉음이 들려왔다.

“폐, 폐하, 마수들로부터 살아남은 그 기사가, 지금!”

그 순간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연구실 안은 참혹했다. 검은 액체를 한가득 뒤집어쓴 채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는 황궁의들과 입을 틀어막은 채 벽 쪽으로 기대 주저앉은 연구원들. 그리고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칼라일……그의 앞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람이 터졌구나.

“……마력연구관, 지금 이게 무슨….”

페르소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참혹한 광경에 그도 할 말을 잃었지만, 어떻게든 냉정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뭐?”

“분명 마수의 기운인데, 사람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생물입니다.”

칼라일에게 다가가자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치료마법을 쓰려고 했던 것인가? 가까이 다가가자 형체가 완전히 일그러진 시신이 보였다.

칼라일이 처음 보는 생물이라니. 천천히 손을 뻗어 시신 위로 손을 올리자 온몸이 얼어붙은 정도로 날카로운 마력이 흘러들어왔다. 주춤거리며 손을 떼자, 손끝이 까맣게 그을려진 것이 보였다. 마수다. 마수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형체 안에는 마력이 남아있었는데, 마치 분비물처럼 고여 있었다. 마치 마력을 강제로 집어넣은 것처럼.

“지금 이 자의 몸에 마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력을 강제로 불어넣은 듯 보입니다. 마력이 과도하게 많아 이런 일이 벌어진 듯한데……마력을 불어넣는 것은…….”

그 순간 리엘 공작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베논 제국이 마력을 흡수하는 연구를, 성공했다고.

칼라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무언가 기억이라도 난 것인지 입술을 꾹 다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마력을 불어넣은 것 같다는 칼라일의 말을 들은 바르셀민 백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폐하, 마력을 불어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한 마법사는 없습니다!”

“아뇨, 가능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습니다.”

그 순간 칼라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변했다.

“샤를로테를 지금 당장 잡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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