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죽어버릴 것만 같아
“뭐라고? 아벨리가 쓰러졌다고?”
칼라일이 전해준 소식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연달아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사라지고, 아벨리는 쓰러지고. 샤를로테가 아벨리의 마력을 빼앗고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다른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처 그것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내가 좀 더 빨리 파악하고, 마력연구원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면 아벨리가 쓰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확실하지 않아서 모든 일이 끝나고 제대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 어린아이가 쓰러졌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페르소나가 업무도 미뤄두고 아벨리를 직접 돌보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자 죄책감이 조금씩 몰려왔다. 모든 업무를 미뤄둘 정도라고? 그만큼 심각한 건가?
“가봐야겠어.”
“로젤리아. 지금 네 몸도 안 좋아, 누워있어.”
“아벨리가 쓰러졌다잖아, 샤를로테가 마력을 빼앗은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역시 그때 말하는 게 좋았을까…….”
“확실한 증거도 없었어. 그때 말해봤자 증명할 수 있는 물증도 없었고.”
칼라일은 내 어깨를 붙들고는 다시 침대에 앉혔다. 그의 얼굴에도 아벨리에 대한 걱정이 드러나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 몸을 더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창백하고 수척한 탓일까. 아니면 그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마력을 빼앗겨서 생긴 거라면, 다시 마력을 채워주면 되는 일이야. 서던을 통해 아벨리에게 내 마력석을 전했어. 그거면 아벨리도 다시 좋아질 거야.”
“정말 괜찮아지겠지?”
“그럼. 그러니 이제는 네가 쉴 차례야. 몸은 어때? 괜찮아?”
대답 대신 그의 손을 내 뺨에 가져다 대었다. 독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이 조금 뜨거웠는데 차가운 그의 손을 얼굴에 대자 그 열기가 가라앉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칼라일이 침대에 반쯤 걸쳐있던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를 품에 끌어안은 칼라일은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잊으려고 해도 잘 잊히지가 않네.”
“응?”
“네가 독을 마신 거 말이야. 안 잊혀져. 도저히 잊혀지지 앉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나도 칼라일의 기억을 본 이후 한동안 그때 그 참사를 불현듯 떠올리게 되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잉크나, 붉은 안감, 심지어 딸기 주스 같은 붉은 액체만 봐도 그때의 잔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내가 이런데 칼라일은 그 기억에 내가 독을 먹고 쓰러진 것까지 보았으니, 오죽할까.
이번에도 대답 대신 그를 끌어안았다. 대답 대신 위로가 필요할 테니까.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자 칼라일은 흐릿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괜찮아. 이제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이제 모든 게 끝이 났어. 샤를로테도, 로웬과 관련된 일도. 네 말대로 네가 만나기로 한 그 시슬리라는 여자가 정말 실마리라면 말이야.”
맞아. 시슬리가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말해준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어떤 사정 때문인지도 몰라도 정말 내가 그녀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시슬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일도 드디어 끝을 보이겠지.
“모든 것이 끝나면,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갈까.”
“응?”
“시종도 시녀도 아무도 데려가지 않고 우리 둘만 가는 거야.”
칼라일은 내 뺨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싼 채 조심히 입을 맞춰왔다.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 입술 사이로 불어오는 숨결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칼라일이 천천히 손을 얽혀오고 있었다. 부드럽게 손을 맞잡고, 손끝으로 손등을 살살 간지럽히면서.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어딘데?”
“글쎄, 네가 원하는 곳이면 나는 다 좋아.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칼라일은 말꼬리를 살짝 흘리며, 쪽쪽 입을 맞췄다.
“네가 아주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으면 좋겠어.”
“새하얀 드레스?”
“응, 그럼 나도 새하얀 제복을 입고, 네 손에 새하얀 꽃다발을 들려줄게. 하늘에는 눈처럼 반짝이는 꽃들이 펑펑 내릴 거고, 그 어느 것도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보석들을 네가 가는 길에 뿌려줄게.”
새하얀 드레스, 새하얀 꽃다발…….
……청혼하는 건가, 지금?
“그리고…….”
“그리고?”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자 칼라일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내 손만 꽉 움켜쥐고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귀 끝이 붉었다. 유난히 빛나는 은빛 눈동자는 오로지 나를 보고 있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스러웠다. 어느 때 보다 더.
“……사실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한 말이었어. 그런데 전부 잊어버렸네. 어떡하지, 네 얼굴을 보니까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칼라일은 멋쩍게 웃으며 볼을 붉혔다.
“정말 예쁜 말로 준비했는데.”
칼라일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에게 어울릴 법한 아름다운 단어들을 고르고, 네가 기뻐할 만한 것으로 네가 행복하도록. 그런데 실패했네. 준비했던 말 중에서 제대로 된 한마디도 못 했어.”
일부로 칼라일 쪽으로 몸을 기울며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칼라일은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였고, 이내 쓰러지듯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새하얀 침대 시트 위로 흩뿌려진 금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따로 있었다. 붉어진 눈가나, 나를 향해 손을 뻗어 입을 맞추려고 하는 칼라일…….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네가 행복했던 과거를 모두 잊을 만큼, 매 행복한 순간마다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칼라일은 몸을 반쯤 일으켜 애정 어린 말을 속삭이며 입을 맞춰왔다. 입술 사이로 흐릿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것이 끝나면, 그때 다시 제대로 말할게. 그러니까 지금 말고 그때 대답을 들려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렇게 속삭여오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상상조차 할 수 없어.”
이미 온몸으로 나를 사랑한다며 속삭이는 사람인데.
***
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무거운 돌덩어리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배 안쪽에 마치 달군 쇠라도 집어넣은 듯 계속 뜨거웠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던 릴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흐릿한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여전히 몸은 욱신거렸지만, 통증이 가라앉았다. 여기가 어디지? 몸을 일으킨 릴리는 바닥을 더듬으며 눈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쇠사슬이었다. 그 쇠사슬에는 루치아노의 손목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루치아노는…….
“깨어, 나셨군요.”
“……루치아노? 루치아노, 지금, 피, 피가!”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손목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검에 찔린 상처는 덜 아문 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놀란 릴리는 재빠르게 루치아노를 부축했다. 상태가 안 좋았다.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떡하지? 릴리는 다급하게 상처를 눌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딘지 모르는 이곳에서 탈출해야 했다. 아니면 루치아노가 죽을지도 몰랐다.
분명 그때 베논 제국 기사들과 대치 중에 쓰러졌다. 그대로 납치라도 당한 건가? 그때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기둥이 잡혔다. 철장 안에 갇혀 있구나. 지하실인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릴리, 양…….”
“루치아노, 조금만 참아요. 금방 출구를 찾을 테니까.”
“아니요, 여기서 탈출, 하는 것은, 으윽, 릴리 양, 뿐입니다.”
그 순간 뼈마디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사라졌다.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던 통증이……놀라 고개를 내리자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는 루치아노가 보였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설마 마법을…….
“역시, 다친 상태에서, 흐윽. 마법은, 무리인가 보군요….”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얼굴은 이미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마치 시체 같았다. 릴리는 다급하게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찢어, 루치아노의 상처부터 막았다. 침착하려고 해도 침착할 수가 없었다.
“당장 로젤리아님, 에게 가셔야, 합니다.”
“말하지 말아요, 상처가 벌어지잖아요.”
“가서, 당장 이 사실을 알리, 고, 아윽……!”
그 순간 허공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루치아노는 다시 각혈하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로, 그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릴리는 손을 덜덜 떨며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저게 로젤리아가 말하던 그 워프라는 마법이겠지. 루치아노가 몸을 혹사하면서 자신을 치료해준 것은 로젤리아에게 이 사실을 당장이라도 알려야 하기 때문일 테고.
‘로젤리아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을 누가 몰라?’
릴리는 천으로 어떻게든 상처를 눌러서 막았다. 피라도 흐르지 않게 막아야 했다. 과다출혈로 죽어도 무방할 정도의 출혈량.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탈출하더라도 밖에 기사들이 가득 있을지 모른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누구 한 명이라도 필사적으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지.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지. 하지만, 하지만…….
이대로 두고 가면, 정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
“각하의 지시로 지하실에 가둬둔 릴리 마가렛트가 방금 탈출했습니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이카니엘 대공은 기사가 전해온 소식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일부러 루치아노의 손에 채워둔 구속구를 느슨하게 채워두도록 지시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기회를 노리다 곧바로 탈출시키다니. 그래도 손목이 잘려 나갈 것 같은 고통이었을 텐데. 상처도 심할 테고……예상은 했지만, 놀라울 정도군.
“어떻게 할까요. 다시 잡아 오라고 명령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마수를 풀어놓으라 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내일 아침이면 황궁으로 소식이 갈 겁니다. 일부러 기사들은 다 죽이지 않고 일부만 남겨놓도록 했습니다.”
일이 차차 진행되는군. 드디어 오랫동안 계획해온 침공 작전을 이뤄낼 수 있겠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걸이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던 이카니엘 대공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슬리는 어떻게 되었지?”
“가넷 대공을 만나러 가려는 것처럼 보입니다.……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니, 죽일까요?”
흐릿한 미소가 떠오른 입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아니, 죽이지는 말고 가둬놔. 그리고 탈출할 수 있도록 일부러 창문이라던가, 문고리를 느슨하게 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