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후폐하의 이혼사유-141화 (141/170)

#141화, 가엾은 샤를로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큰일을 연달아 겪었으니, 아이의 상태가 안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하마터면 유산할 뻔했다니. 미처 아이마저 신경 쓰지 못한 내 탓이야.

샤를로테는 통증이 가라앉은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더 스트레스를 받거나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을 겪는다면 그때는 정말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하지만……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아가야, 미안해. 조금만 더 버텨줘. 그럼 우리는 무시당하지도 않아도 돼. 권력자로 살아갈 수 있어.

“이제 슬슬 말해주는 건 어때?”

“무엇을 말입니까?”

“베논 제국이 꾸미고 있는 침공 작전에 대해서.”

이카니엘 대공은 들고 있던 서류를 가볍게 펄럭이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에게 무리가 갈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샤를로테는 몸을 일으키며 이카니엘 대공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빼앗았다. 서류 위에는 웬 기괴한 동물 그림과 함께 종이 끝에는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손끝으로 소름이 끼쳤다. 호흡이 아주 잠깐 멈췄다. 아냐, 괜찮아. 진정해. 아무렇지 않아.

이보다 더한 짓도 저지르며 살았어. 이미 마음먹었잖아. 모두 나와 아기를 위해서야.

“왜 그렇게 작위에 집착하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뭐?”

“작위가 아니라 권력에 집착하는 거야.”

앞으로 태어날 아기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비참한 과거도 없기를 바라며, 남에게 빌붙어가며 살아가는 법 따위 배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서류를 넘겼다. 넘기면 넘길수록 점점 더 기괴한 그림이 나타났다.

“그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알고 싶지 않군요.”

“마수입니다. 베논 제국에서 인위적으로 생산하고 길들인 마수죠.”

마수라고? 마수라면 마력연구소를 공격했을 때 보았던 그 마수를 말하는 건가? 그럼 그 마수가 베논 제국이 길들인 그 마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베논 제국이 사절단으로 오기 한참 전이었잖아. 그런데……마수가 인위적으로 생산하고 길들이는 것이 가능하던가?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샤를로테님은 본인의 마력이 얼마나 드문지 모르시나 보군요.”

“그게 무슨 소리지?”

“타인의 마력을 빼앗는 게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십니까?”

타인의 마력을 빼앗는다. 문득 아벨리와 아네트가 떠오른 샤를로테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어리고, 마력의 흐름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었나? 그래서 아벨리의 마력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력을 빼앗을 수 있었다면 분명 마법사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겠죠. 하지만 마력을 빼앗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물론 극비로 연구를 거듭하고 거듭해서 마력을 빼앗는 마법 자체를 만들기는 했습니다만, 샤를로테님처럼 자연스럽게 마력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리고…….”

“그리고 또 뭐?”

“그 어린아이가 마력을 빼앗겼는데도 왜 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빼앗은 마력의 양을 보자면 이미 죽어도 한참 전에 죽어야 할 텐데.”

샤를로테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마력을 그렇게 많이 빼앗았단 말이야? 아니야, 분명 아벨리는 멀쩡했어. 멀쩡하니까, 좀 더 빼앗은 거였는데?

“그 이유는 직접 가서 알려드리죠.”

“어디를 가려는 건데?”

“일단 은빛 머리카락부터 가리시죠.”

이카니엘 대공은 샤를로테에게 검은색 로브를 건넸다. 로브에서는 피비린내가 그대로 느껴졌지만, 대공이 건넨 손을 잡은 순간 수도 쪽으로 워프를 한 탓에 급하게 로브를 쓸 수밖에 없었다. 샤를로테는 로브를 깊게 눌러쓴 채 골목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들이 수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얼핏 국경을 넘지 못하게 막으라는 소리도 들려왔다. 국경까지 막을 정도라니.

샤를로테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살짝 웅크렸다. 만약 거기서 이카니엘 대공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와 함께 감옥에 갇혀 있다가 타국으로 추방당했을까. 아니면 수도 한 가운데에서 처형을 당했을까.

“이쪽입니다, 샤를로테님.”

그때 벽에 그림자가 지더니 그 사이로 문이 나타났다. 이것도 마법인가? 짙은 검은색의 철문을 지나 계단을 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몇 분쯤 내려갔을까, 또다시 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자 끝없는 어둠 속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신경이 날카로워질 정도로 소름 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의 비명. 샤를로테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감싸 안은 채 문 바로 앞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무서웠다.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하지만 이내 이카니엘 대공이 샤를로테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이런, 겁을 먹었군요. 하지만 겁을 먹으면 되나요.”

“잠깐만….”

“당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저 어둠보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이 몇인데 고작 이런 것으로 두려워합니까. 하던 대로, 나아가세요.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짓밟고, 천천히. 앞으로.”

그러자 몸이 마치 조종당하는 것 마냥 앞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바닥이 질퍽거린다고 느꼈는데, 그게 고개를 내리니 바닥이 전부 피 웅덩이로 뒤덮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샤를로테의 금빛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그러나 뒤이어 따라온 말이 샤를로테가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가게 만들었다.

“지금 이 어둠에서 도망친다면 샤를로테님의 아이는 어떤 삶을 살까.”

“!”

“당신의 과거가 이보다 더 어둡지 않았나요?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당신 아이도 그렇게 살 텐데.”

비열한 자식.

자신과 자신의 자식을 욕보이는 말에 샤를로테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하나 없었기에, 샤를로테는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손을 붙든 채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다시 그 끔찍한 황녀 시절의 괴로운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러나 고개를 둔 순간, 샤를로테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 이게, 무슨…….”

마수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마수가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는 걸까. 철장을 붙든 채 살려달라며 괴롭게 울부짖고 있었다. 바닥을 기며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손톱이 빠지도록 바닥을 긁고 있었다. 그런 마수가 수십 마리였다. 소름 끼쳤다. 이게 뭐야, 이런 마수는 본 적이 없어. 내가 본 마수는, 마력연구소를 침입했던 마수는 분명……!

“이게 바로 당신이 해주어야 할 일입니다.”

“뭐라고……?”

“연구로 겨우 얻어낸 마력을 빼앗는 마법은 한 번에 많은 마력을 빼앗지 못합니다. 더불어 마력을 불어넣는 일도요.”

마력을 불어넣는다고?

“샤를로테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당신은 극소량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아주 특별한 재능이 있었죠. 바로 마력을 빼앗고 불어넣는 일이 가능했다는 겁니다.”

“무슨, 나는 마법에 재능이 없어! 정신계 마법도 겨우 익혔다고!”

“아벨리 양은 당신에게 빼앗긴 마력만 보자면 이미 죽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샤를로테님은 본인도 모르게 목숨을 겨우 유지할 정도의 마력을 다시 불어넣었겠죠. 그래서 아벨리 양이 살아있는 겁니다. 뭐 지금쯤……몸이 약해질 때로 약해져서 슬슬 마력을 빼앗긴 부작용이 나타나겠군요.”

그럴 리가 없다. 칼라일이……분명 칼라일이 자신에게는 마법적 재능이 없었으며, 마법을 배우더라도 모자란 마력 때문에 마법을 쓰지 못할 거라고 했다. 마력을 보충하더라도 금방 소진될 거라고……!

“칼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았나 보군요.”

“….”

“왜 가르쳐주지 않았을까요.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대마법사가 되었을 그가 정말 몰랐을까요.”

이카니엘 대공의 얼굴에는 가엾은 것을 바라보는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칼라일이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그래, 이카니엘 대공의 말대로 몸만 멀쩡했다면 대마법사가 되었을 그였다. 몰랐을 리가, 그런데 왜 나에게는 말해주지 않았지? 왜? 나에게……거짓말을 한 거야? 일부러 마법을 못 쓰게 하려고?

내가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게 하려고?

“만약 당신의 재능이 밝혀졌다면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당신의 재능을 키우려 나섰을 텐데, 당신은 분명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충격으로 얼어붙은 샤를로테는 이카니엘 대공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카니엘 대공은 붉은 눈을 형형히 빛냈다.

“샤를로테 당신은, 온전히 손에 쥔 것 없이 빼앗기기만 했군요.”

***

밤이 되었음에도 기사들은 계속 황궁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샤를로테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 없다는 보고를 들은 세츠는 이 사실을 페르소나에게 전했다.

눈 밑이 까맣게 질린 페르소나는 이마를 짚은 채 앓는 소리를 내었다.

샤를로테를 잡아들여야 했다. 샤를로테의 처분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였다.

여러 큰일을 겪은 샤를로테가 스트레스를 가득 받은 상태에서 계속 도망을 치고 숨는다면, 아이 또한 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받을 테니까.

“샤를로테가 도주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져라.”

아이를 위해서라도 샤를로테를 빨리 잡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도망친 샤를로테를 잡아들여야 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이 벌어졌다.

“폐하!”

자그마한 몸으로 겨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네트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페르소나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네트를 안아 들었다. 아네트는 페르소나를 끌어안은 채 펑펑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페르소나는 당황하며 아네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데 아네트의 옷이 이상하리만큼 축축했다. 아네트의 옷이 피로 젖어있었다.

“아네트,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아벨리가, 흐윽, 아벨리가, 말하지, 말라고오……근데 너무, 아파해서어……흐어어엉!”

“아프다니, 아네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네트!”

아벨리가 아프다니? 몰론 오늘 아침에 아벨리의 얼굴이 살짝 창백하기는 했지만 멀쩡해 보였기에, 건국제 같은 큰 행사 때문에 긴장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네트는 더 크게 엉엉 울었다. 페르소나는 곧바로 아네트를 끌어안고 아벨리와 아네트에게 내준 궁으로 달려갔다.

“아벨리!”

그리고 문을 연 순간, 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아벨리가 페르소나의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과, 고급 안감으로 만든 옷이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있었다.

“아벨리! 당장 황궁의를 불러와라! 아니, 황궁의를 전부 불러와라!”

샤를로테 때문에 아벨리와 아네트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탓일까. 그래서, 이런 일이……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저번에도, 흑, 피 토했는데, 아벨 리가 말하지 말라구우…….”

“저번에도? 이런 일이 또 있었단 말이냐?”

“황후 폐하가, 자꾸 아벨리 마력을 가져가서, 아벨리가……흐윽.”

샤를로테가 아벨리의 마력을 가져가? 샤를로테가, 샤를로테가…….

손댈 것이 없어서 아이들의 마력에까지 손을 대? 마력을 가져가? 그 순간 칼라일이 고아원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린아이는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하니, 아벨리가 아네트의 마력을 빼앗아 갈 수 있다고. 그런데 샤를로테가 아벨리의 마력을 빼앗아 가다니,

잔혹한 짓에 손이 덜덜 떨렸다. 샤를로테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았으니까 이 어리고 가엾은 아이들로부터 마력을 빼앗았겠지. 죽어가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하지? 그러면서 아이들과 잘 지낸다고 말한 거야?

도대체 샤를로테는 어디부터가 진실이지?

“기사들을 더 풀어라. 샤를로테를 잡아들여, 내 눈앞으로 데려와라!”

“폐하, 일단 진정부터…….”

“그리고 당장 추방 절차를 준비해라.”

페르소나는 미약하게 숨을 쉬는 아벨리와 아네트를 꽉, 끌어안은 채 울부짖듯 말했다.

“샤를로테가 아이를 낳는 즉시, 노예로 만들어 타국으로 추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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