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점점 좁혀오기 시작하는.
몸이 욱신거렸다. 이미 독을 두 번이나 먹은 적이 있었지만, 내성이 생기기는커녕 몸만 더 아플 뿐이었다. 몸을 겨우 일으켰다.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몸도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연회장에서 정신을 잃은 뒤로, 어떻게 된 걸까. 연회는 어떻게 되었지, 샤를로테는 어떤 처분을 받았을까……. 두통이 몰려오는 이마를 짚은 채 머리를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그렇게 바라왔던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종종, 복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끔은, 샤를로테와 페르소나에게 복수하면 나도 그럴까 싶었다.
하지만 달랐다. 샤를로테가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모습. 정신적으로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힘겨워하는 모습. 나름 속 시원하다고 느꼈다. 드디어 죄값을 치르겠구나, 하고….
나는 예상외로 성격이 안 좋았던 건가. 물론 좋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눈을 감은 채 손등을 꾹꾹 누르며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고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루치아노가 앉아있었다.
“언제 온 건가요, 기척을 못 느꼈는데.”
“기척을 숨기는 게 제 특기죠. 통증을 줄여주는 차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농담에 살짝 웃으며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대었다. 그러나 기껏 가져다 준 차를 마시지는 못했다. 독을 먹었던 순간, 딱 한 모금 삼켰을 뿐인데 살갗에 불이 붙은 듯한 그 통증. 분명 이 차 안에 독이 들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아는데도, 손이 덜덜 떨렸다. 마실 수가 없었다.
천천히 찻잔을 내리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선물로 들어오는 샴페인이나, 차는 전부 거절해야겠네요.”
그 모습을 본 루치아노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그가 미안해할 게 아닌데도. 루치아노는 잠시 입을 꾹 다물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이 점점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샤를로테를 닮은 얼굴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릴 필요 없어요.”
“!”
“지금의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려요, 가장 자연스럽고요. 더 이상 숨기지 말아요.”
이제 루치아노에게서 샤를로테를 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제는 마법으로 모습을 가리지 않고 편히 있었으면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지만 머리카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칼라일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칼라일도 그렇게 말했군요.”
“네, 칼라일님과 로젤리아님의 말이 맞아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요. 모습을 모두에게 드러냈으니까….”
루치아노는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숨길 필요가 없다. 그래, 샤를로테와 모두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제 숨길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11황자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샤를로테가 어떻게 나올지도 불안했다. 이제 루치아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루치아노를 싫어하고.
“불안하십니까?”
“!”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원해서 한 일이고, 샤를로테는 제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제 샤를로테는 죄수의 신분이 될 테니까요.”
“내가 불안해하는 건 샤를로테가 아니라 그대예요.”
몸을 일으켜 루치아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워낙 속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괴롭다면 괴롭다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루치아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쓰러진 후, 샤를로테는 침실에 가둬졌다는데, 그걸 들은 루치아노는 무슨 심정일까.
괜찮다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루치아노의 뺨 부근에 손을 댄 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그렇게 미워해도, 유일한 혈육이잖아. 네 누나잖아.
루치아노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천천히 내 손을 감쌌다. 마치 온기를 느끼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루치아노는 그렇게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살갗이 맞닿자 루치아노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불규칙한 그의 호흡도.
‘……괜찮지 않았구나.’
샤를로태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추락하는 모습을 보는 게, 괜찮지 않았던 거야.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면서 원망 어린 말을 내뱉었음에도….
말없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자, 문득 궁금해졌다.
루치아노는 나와 칼라일의 계획을 도우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그였다.
정말 샤를로테를 싫어해서 그런 걸까.
샤를로테를 싫어하기는 할까.
샤를로테에 대해 하던 말들 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가짜였을까.
그는 한동안 그렇게 내 손을 감싸 쥔 채 마치 잠든 사람처럼 고요히, 흐릿한 숨결만을 내뱉었다. 진정이라도 한 것인지 몸의 떨림이 점점 잦아졌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하얀 속눈썹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거면 되었습니다.”
“!”
“이걸로 충분합니다.”
루치아노는 환하게 웃었지만, 도저히 웃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루치아노…….”
그때 문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로이가 전해준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샤를로테가 사라졌다고?”
나와 함께 그 소식을 들은 루치아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침실에 가둬놨는데 샤를로테가 사라졌다고? 어떻게 된 거지? 마법을 쓴 건가? 아니야, 샤를로테는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마력도 얼마 없는데, 마법을 쓰면 아이에게 무리가 간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도망쳤지? 누군가 도와줬나?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로젤리아님, 혹시 모르니 대공저로 자리를 옮기시는 게….”
“나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루치아노?”
그때 루치아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쉬고 계세요. 독기가 아직 다 안 빠졌으니까요.”
“……샤를로테를 찾으러 가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켈빈 부인을 루아 남작부인이 머물고 있는 별장으로 데려다 줄 생각입니다. 로젤리아님께는 해를 못 끼치겠지만 켈빈 부인한테는 해를 입히려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켈빈 부인이 아직 황궁에 있었지. 확실히 샤를로테라면 도망치더라도 자신을 수렁에 몰아넣은 이들에게 복수하려고 할 수 있었다. 샤를로테까지 사라진 마당에, 켈빈 부인을 보호하려는 기사는 없겠지. 루아 남작부인이 지내는 별장에 데려다주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까. 어쩐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루치아노가 저 문을 나선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독을 먹은 것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졌다고만 생각했다. 단지 켈빈 부인을 데려다주는 것뿐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니,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만약 그때…루치아노에게 가지 말라고 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
그 사이, 릴리 또한 샤를로테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해 듣게 되었다. 하지만 릴리에게는 샤를로테가 어디로 사라졌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로웬이 베논 제국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몰랐다, 로웬이 헬리오도르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것을, 그때 그 발작이 베논 제국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이 흉터도 로웬이 만든 것이 아닌 베논 제국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릴리는 흉터 부근을 꾹 누르며 이를 갈았다. 로웬이 자책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싶지만……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로웬이 사라졌다. 그것도 베논 제국의 기사들과 함께.
그날, 이카니엘 대공을 만나고 돌아온 로웬은 멀쩡했다. 세뇌를 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루치아노가, 말해준 대로 혹시 가슴 부근의 흉터를 만져보았지만, 그때마다 통증은커녕 얼굴이 빨개질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연회 때도 제대로 참석을 했다. 샤를로테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로웬은 샤를로테가 기사들에게 거의 끌려 나가듯 하는 것을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어쩐지 복잡해 보이는 표정에,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었다. 로젤리아가 독을 먹었기 때문일까. 로웬도 로젤리아가 독을 먹는 것에 무척 반대했었지.
그렇게 말없이 로웬의 곁에 있었는데, 문득 이카니엘 대공이 눈에 들어왔다. 루치아노가 말한 그 남자. 로웬에게 세뇌 마법을 걸었을지 모를 가장 유력한 남자. 릴리는 아주 잠깐, 이카니엘 대공을 응시했다. 만약 정말로 로웬에게 세뇌 마법을 걸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면…….
몇 분 바라보지도 않았다. 이카니엘 대공은 곧바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고개를 드니, 로웬이 사라지고 없었다.
릴리는 재빨리 로웬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클로이에게 로웬이 베논 제국 기사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는 것을 봤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루치아노에게 모든 일을 전해 들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언니가 죽어서 돌아온 날 느꼈던, 깊은 늪에 빠지는 듯한 두려움 때문인지.
‘만약 로웬님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면 곧바로 저에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분명 로웬은 말없이 갑자기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모를 마음에 릴리는 로웬을 찾아다니던 발걸음을 루치아노에게로 옮겼다. 루치아노는 마법사이니, 훨씬 더 빠르게 로웬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릴리는 재빨리 황궁 후문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샤를로테에 대한 것을 모두 폭로한 뒤 켈빈 부인을 루아 남작부인이 머무는 거처에 옮긴다고 했었다. 아마 샤를로테가 사라졌으니 지금 바로 옮기려 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릴리의 예상대로, 구석진 황궁 후문 쪽에 켈빈 부인과 루치아노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루아 남작부인이 머무는 거처로 옮겨드리겠습니다.”
“……샤를로테가 쫓아오거나 하지는 않겠죠?”
“기사를 따로 배치해두었고, 구석진 시골 영지 쪽이니 쫓아오지는 못할 겁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인.”
루치아노는 켈빈 부인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허공에 커다란 마법진을 띄웠다. 저게 로젤리아가 말한 워프라는 건가? 켈빈 부인이 마법진 안으로 손을 뻗자, 마법진과 함께 켈빈 부인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으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릴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황궁 후문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안 쓰는 쪽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오고 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애초에 아무도 오지 않으니 켈빈 부인을 이곳으로 불러내 마법으로 켈빈 부인을 피신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법진과 함께 나타난 저 기사들은 뭐지?
무장을 한 채, 마법으로 루치아노를 구속하는 저 기사들은 도대체 뭐야.
“으윽, 으…….”
순식간에 제압당한 채 검에 베인 루치아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루치아노는 자세를 고쳐 잡고 검을 빼어내어 기사들의 공격에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큰 부상에 많은 수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릴리는 루치아노의 머리 위로 검을 높게 들어 올린 기사의 등을 향해 검을 던졌다. 두 명이서 상대할 수 있을까 다른 검을 쥔 손이 떨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알겠다, 온몸을 뒤덮은 검은 복장에 가슴팍에 달린 저 문양. 베논 제국의 기사들…….
“루치아노, 괜찮아요?”
“릴리님! 당장 피하십시오, 어서 로젤리아님께 가서……!”
루치아노는 깊게 베인 상처를 압박하며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다른 기사들의 공격이 훨씬 더 빨랐다.
‘평범한 기사가 아니야.’
릴리는 어떻게든 기사들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드레스가 찢어지고,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그리고 가빠오는 숨, 점점 몸을 움직이기가 버거워진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칼날에 베이는 듯한 통증……검에 독이 발라져 있구나.
베인 상처를 통해 독이 퍼지고 있었다. 시야가 흔들려 제대로 막아낼 수가 없었다.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린 기사 중 한 명이 루치아노의 복부를 향해 검을 깊게 찔러 넣었다. 미처 막을 새도 없었다. 그 순간 몸이 꿰뚫리는 고통과 함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역시 가넷 대공의 호위기사라 이건가. 대공께서 말씀하신 것보다 강했군.”
“이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데려가도록 하지. 오랫동안 일해 온 시녀라는데, 차마 공격은 못 하겠지. 뭣하면 방패로 내세우자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독이 너무 심하게 퍼졌다. 독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하지만 점점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어떻게든 로젤리아에게 알려야 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