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반역
기사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을 통해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도망칠 방법은 딱 하나였다.
침대 시트를 모아 단단하게 묶어 연결했다. 드레스도 코르셋이 없고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달리지 않은 심플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득한 높이에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유난히 거친 바람이 뺨을 때렸다.
창틀에 이걸 묶어, 줄을 타고 내려가듯 내려가자. 그리고 어디로든 도망가는 거야.
몸에 흐르는 마력의 기운을 느끼며 침대 시트를 이어 만든 끈을 꽉 움켜쥐었다. 모습을 바꾸는 마법은 그렇게 많은 마력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이 정도 마력이면 분명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만 있다면, 아이를 낳고,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때 다시 황궁으로…….
‘샤를로테. 불쌍한 내 아가. 이럴 줄 알았다면 너를 낳지 않는 건데.’
머릿속을 스친 목소리에, 배를 감싸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왜 하필 지금,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이 급한 상황에, 왜 이럴 때 그 불행하고도 끔찍한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덕분에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발도, 손도, 아예 머릿속마저 굳어버린 것 같았다.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 도대체 왜 지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잖아!
덜덜 떨리는 손을 꾹 누른 채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그저 살려고 했을 뿐이었다. 남들이 잔혹하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게 욕해도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발악했을 뿐이었다.
……내 행동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위해 마법을 쓰고, 본보기로 애꿎은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넣고 독살을 시도하고, 용병단을 고용하고, 유일하게 내 편이었던 칼라일의 부모님을 죽이고……정부가 되었을 때, 로젤리아가 어마어마한 양의 보물을 선물해 준 것, 나에게 최대한 잘해주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부 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내가 한 행위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알고 있으면 뭐해?
페르소나가 나를 황궁으로 데려왔을 때, 그가 나에게 보인 관심이 얼마 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짧으면 삼일, 길어봤자 일주일?
그럼에도 나는 그 기회를 붙잡아야 했다. 비 인륜적인 짓을 해서라도 페르소나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했다. 설령 목숨이 달린 일이라도 좋았다. 피를 토하고, 온몸이 불타는 고통쯤이야 참을 수 있었다. 폐하의 정부 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언젠가 한 번 로젤리아가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네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무엇이 있지?’
얻는 거야 많지 않은가.
황제의 총애만 있다면 정부의 자리는 황후의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쥐어주니까. 쉽사리 무시당하지 않고 모두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비참했던 황녀 시절처럼 지내지 않아도 되겠지.
그때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어머니.’
아름다운 무희 출신의 어머니.
황궁의 연회에 초대되어 춤을 추게 된 어머니는 안케도니아 황제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어머니는 그 더러운 놈과 억지로 하룻밤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를 함께 한 어머니는 나와 루치아노를 가졌고, 황제가 자신을 황궁에 가둔 채 후궁에 두려 하자 도망쳤다. 미친 듯이 도망쳤다. 그렇게 간 곳이 구석진 시골의 영지. 어머니는 거기서 나와 루치아노를 낳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방인에, 아이까지 가진 어머니를 마을 사람으로 받아주었다.
그래……그때는 행복했다. 그때가 살아있던 시절 가장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루치아노가 병에 걸렸을 때부터였다. 어머니는 일을 했지만 약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돈이 모자랐다. 약초를 먹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린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도중 어머니가 사고를 당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어머니는 이틀을 넘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장례도 겨우 치른 나는, 어머니를 잃은 나는, 루치아노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했던 말.
‘내가 그날 춤을 추지 않았다면, 그 더러운 황제놈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럼 너희가 이리 불행하게 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불쌍한 내 아가…….’
황제, 그렇다면 나와 루치아노는 황제의 핏줄이라는 것.
그렇게 죽은 어머니 대신 나를 돌보아주었던 노인의 도움을 받아 황제의 알현을 신청했다. 그리고 그 알현식 날, 황제에게 나와 루치아노가 황제의 핏줄임을 알렸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때부터 모든 게 망가졌다.
황제가 나와 루치아노를 부정하기에는 그때의 알현이 공개 알현이었고, 모든 이들이 나와 루치아노의 은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를 보았다. 황제는 사교계 뿐만 아니라 제국민들 사이에서 나와 루치아노에 대한 말이 오고 가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나를 13황녀로, 루치아노를 11황자로 만들었다. 암살자들로 인해 잃어버린 쌍둥이 황족,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수식어를 덧붙여가면서.
그리고 나는 무사히 루치아노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일어날 비극을 몰랐기에 그저 좋아하기만 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나를 알현식에 데려다준 노인이 황제의 지시로 살해당하고, 황족들에게 멸시당하고, 나에게 잘해준 하녀가 손톱이 모두 뽑힌 채 쫓겨나고 교사를 구해와 나와 루치아노에게 공부를 시키려 한 유모는 독살당하고…….
‘이게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구나. 그럼 밖에서 굴러먹다 온 평민 출신의 황녀가 좋은 대우라도 받을 줄 알았나?’
찢어 죽여도 모자랄 1황자에게 비웃음당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 전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마을에 남을걸.
황궁으로 간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죽도록 싫은 루치아노 너도…….
시트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울 시간에 어서 여기서 탈출해야 하는데,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했지? 어머니마저 잃은 어린 내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 동생은 아파서 죽어가고 의지할 곳은 황실뿐이었는데, 그 끔찍하고 잔인한 황실에서 내가 배운 것은 살아남는 방법뿐이었는데!
황녀의 예법? 사교술? 지식?
나를 가르쳐 한 교사와 유모는 독살당해 죽었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누가 도와줬지? 누가 가르쳐줬지?
나는 나름대로 살아가려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고, 그 결과가 이것일 뿐이었다. 처참하다. 처참했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상냥하게, 고분고분하게? 웃기지 마. 그렇게 살 바에야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는 게 낫지.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행복하게 사랑받으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페르소나는 나에게서 아기를 빼앗고 노예로 만들어 타국으로 추방시킨다고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나는 다시 황녀 시절처럼 비굴하고 비참하게 살 생각 따위 없었다. 순순히 갇혀 처벌을 기다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거칠게 눈가를 문지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아파왔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언제 기사들이 들이닥쳐 나를 끌고 갈지 모르니까.
하지만 창틀에 끈을 묶고, 올라선 순간, 바로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벌써 기사들이 들어왔나 싶어 다급하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니었다.
“설마 스스로 목숨을 끊으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샤를로테 양.”
이카니엘 대공……이 배신자가, 왜 여기에……!
“생각보다 나약하신 분이군요. 겨우 이 정도 일에 이리도 무너지시다니.”
나약해? 무너져? 이게 전부 누구 때문인데!
분명 이카니엘 대공은 도와준다고 말했었다. 칼라일이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막고, 안케도니아 제국 침공 작전에 참전했던 그가 내가 1황녀라고 증언해주기로 약속했었다. 분명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정작 방관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지. 감히 배신을 해?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런 말을 지껄이는 거야!”
분노가 치밀었다. 너만 제대로 약속을 지켰다면 로젤리아는 죽고, 나는 무사히 황후의 자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신다면, 진정하시는 게 좋을 듯싶군요. 물론 도와드리지 않았던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 모든 게 끝났는데 사과라고?”
심지어 그는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도와주지 못한 게 아니라! 역시 일부러 방관만 하고 있던 거였어!
“내려오시지요. 지금부터 제가 설명하는 것을 잘 들으셔야 그렇게 원하시는 권력을 손에 넣으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뭐?”
“저는 지금부터 레이몬드 제국을 침공할 생각이거든요.”
이카니엘 대공이 내민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이몬드 제국을 침공해? 그게 무슨 소리지? 침공이라니.
“샤를로테 양은 정말로 황후의 자리에 만족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나서서 샤를로테 양이 1황녀다, 이리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황후가 된다 한들 주변 사람들은 끝없이 샤를로테 양을 깎아내릴 테고, 그 피해가 아이에게까지 갈 겁니다. 그럴 바에야, 작위를 얻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잠깐, 설마……내 독살 계획을 돕지 않은 게 일부러 이런 상황을 조장하기 위해서 그런 건가?
이미 밖은 내 거짓말과 악행으로 인해 크게 혼란이 일어난 상태. 제국 밖으로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관리들과 보좌관들이 온갖 힘을 쓰고 있겠지. 페르소나도 마찬가지고. 이런 상황에 보통 침공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지.
만약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노리고 계획된 침공이라면 레이몬드 제국은 대응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 나에게 독살 계획을 시행하도록 부추기고, 일부러 로젤리아가 마법사가 된 것을 얘기하고, 마법사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접근한 게 모두….
“너……나를 이용한 거구나.”
“생각보다 똑똑하시군요. 제 계획대로 충실히 잘 따라주셨기에 이번에는 정말로 제안을 할까 합니다.”
애초에 이카니엘 대공은 레이몬드 제국을 축하할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었다. 안케도니아 제국을 침공한 것처럼 기회를 노리고 사절단인 척 온 것이었다.
“이미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
“레이몬드 제국의 침공을 도와주신다면 베논 황제에게 말을 해, 샤를로테 양에게 작위를 내리게끔 손을 써드리겠습니다. 백작 자리면 만족하실까요.”
“내가 왜 도울 거라 생각하지?”
“샤를로테 양은 제가 본 인물 중에 가장 욕망으로 가득한 자이니까요.”
지금 이 남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가? 나에게 제안한 것은 즉, 반역이었다. 반역이 실패한다면 정말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노예가 되어 추방당하는 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처형대에 올라 그 어느 때보다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것이야 여기서 뛰어내려서 도망치는 것뿐, 아닌가요? 그럴 바에야 반역이 낫죠. 샤를로테 양은 그저 침공을 도울 무기들을 운반하는 작업만 하면 되는 것일 텐데.”
반역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이 자를 돕게 된다면, 이 황실은 안케도니아 제국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고,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오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던 안케도니아 제국처럼. 그렇게 원망스럽던 제국이지만 비명과 피가 난사하던 그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레이몬드 제국이 그렇게 변한다고? 아니야, 그 정도로 이 제국을 미워하지 않아, 나는 전쟁을 도울 생각은….
하지만, 차라리 베논 제국으로 넘어가 새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거기서는 정말로 온전한 작위와, 나를 사랑해줄 사람과 날 닮은 아이와 함께.
‘아가, 너는 나처럼 살지 마. 너는 꼭 행복해야 해. 엄마처럼 살지 마….’
배를 꽉, 감싸 안았다. 배가 아팠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계속 아팠다.
이 상태로 이카니엘 대공의 제안을 거부하고 도망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돕지 않겠어.”
그의 말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였다.
“백작이 아닌 공작 작위를 준다고 약조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