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끝나지 않은 비극
죽은 줄 알았던 켈빈 부인이 살아있었다.
이카니엘 대공과 손을 잡으면서 그에게 부탁했던 것은, 칼라일이 독을 먹고 쓰러진 로젤리아를 치료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아예 죽어가게끔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카니엘 대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는데……하지만 상황은 수습할 수 없이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칼라일이 폭로를 하면서, 그렇게 숨기고자 했던 것이 모두에게 까발려지자, 로젤리아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독을 먹일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독을 마신거야?
독한 년,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다니!
하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을 아예 예상 못 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죽었던 켈빈 부인이 살아있었다. 루아 남작부인이 아니었다.
루아 남작부인이 배신을 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라비란느를 납치해서 데리고 있는 건데. 어떻게 살아있던 거지? 칼라일의 주장과 켈빈 부인의 증언에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했다. 아이가 있다지만 이 아이로는 내 자리에 보전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로젤리아가 했던 말……아이를 빼앗고 나를 노예 신분으로 내쫓겠다니. 역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였어! 나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갈 궁리 따위를 하고 있었다니. 어떻게든 버티자, 배가 아프다고 하고 쓰러지든, 증거가 없다며 억지로 우기든 간에 시간을 벌자. 그랬는데, 그랬는데….
“왜 네가 살아있는 거야!”
샤를로테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루치아노가 살아있었다.
루치아노가, 내 앞에. 이 연회장에, 나와 꼭 닮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그 순간, 대공저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로브를 쓰고 있었지, 에르비앙 왕국에서 온 아메 티스트라며, 오랜 친우라고 말했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태도에 의심이 간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루치아노였다고? 심장이 따끔거리다 못해 아려오기 시작했다.
베논 제국은 신전을 가장 먼저 공격했을 텐데.
너는 분명 죽었을 텐데. 그렇게 믿고 살아왔는데.
네가, 살아있었다니…….
***
루치아노가 나설 거라고,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면서까지 사람들의 앞으로 나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법으로 나와 칼라일을 구속한 것을 보면 그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예 샤를로테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목적으로….
그 순간 마법이 풀렸다. 아직 다 빠지지 않은 독기에 비틀거리자 칼라일이 나를 부축했다.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루치아노인가?”
그때 페르소나가 나섰다. 한참을 방관만 하던 그는 샤를로테의 부름을 무시하고는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다. 더 이상 샤를로테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인가.
“샤를로테가 그러더군. 쌍둥이 동생이 있다고, 네가 그 루치아노인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안케도니아 황실의 11번째 황자, 루치아노 안케도니아라고 합니다.”
“11번째 황자……왜 가넷 대공의 호위로 있는 것이지?”
“저는 황자이지만 일찍이 황실에서 버려져 칼라일님의 도움으로 거둬졌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칼라일님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가넷 대공을 만나게 되었고,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예 모든 걸 말할 작정이었는지 루치아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했지만 어쩐지 칼라일이 나를 막았다. 고개를 젓는 모습이,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모습을 숨긴 것이 아닌가, 왜 이제 와서 정체를 밝히는 거지?”
“우스워서요.”
“뭐?”
“13황녀가 스스로 1황녀라고 하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꽤 재밌었어, 누님.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네. 황궁에서도 그랬지. 이름뿐인 그 황녀자리를 지키겠다고 나를 내쫓을 때를, 아직 기억하고 있어.”
샤를로테는 아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아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증인이기 때문일까. 샤를로테는 드레스 자락만을 꽉 쥔 채 땅바닥만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금빛 눈동자에서 눈물 두어 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샤를로테는 크게 비틀거렸다. 마치 내가 독을 먹었을 때처럼, 배를 두 팔로 감싸 안은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로 아파하고 있었다.
“배가, 배가……!”
살짝 부른 배를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샤를로테는 이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페르소나를 향해 있었지만, 페르소나는 샤를로테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세츠가 기사들을 불러 샤를로테를 부축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일어날 힘조차 없었는지 샤를로테는 몇 걸음 걷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샤를로테를 침실에 가둬놔라. 궁의를 보내고.”
페르소나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눈을 질끈 감은 모습이 당장이라도 샤를로테처럼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겨우 버티고 있었다. 샤를로테의 악행과 거짓말이 모두 까발려졌으니까. 황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책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뭐가 되었든 나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못할 것 같았다.
“로젤리아!”
그토록 바라왔던 샤를로테의 몰락, 페르소나를 향한 복수.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내 아기를 죽이고 칼라일을 괴롭게 만든 샤를로테가 처참하게 끌어내려지는 순간을, 페르소나에게 복수를 한 이 순간을.
모든 게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독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내 이름을 부르는 칼라일의 목소리가 점점 귓가에서 멀어져갔다.
죽는 건가 싶었지만 칼라일이 곁에 있으니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심한 정신 소모에 독으로 인한 피해까지,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힘없이 손을 들어 나를 끌어안고 있는 칼라일의 뺨을 쓰다듬었다.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치고 또 겹쳐졌다.
이내 귓가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
세츠는 이 일을 어서 수습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황실의 이미지가 추락하지 않도록 샤를로테를 내쫓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페르소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더 가까웠다.
“샤를로테에 대한 처분은 내일 회의를 통해 진행하도록 하겠다.”
“내일이라니요, 지금 당장 처분을……!”
“내가 지시할 때까지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라.”
이후 상황을 정리하게끔 지휘권을 세츠에게 넘기고는 곧장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황제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상황을 정리시켜야 했다. 관리들을 모아 회의를 진행해야 했다. 샤를로테의 처분과 별개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하필 건국제 때 이런 일이 벌어진 탓에 황실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제국 이미지가 얼마나 추락할 수 있었다.
이러면 기존에 협정이나 협약을 맺으러 왔던 사절단 측에서 제안을 철회할 수 있었다. 해결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로젤리아.”
그저 로젤리아가 보고 싶었다.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입가를 꾹 눌렀다. 손끝에는 피가 묻어나 있었다. 로젤리아의 피였다. 독을 마시고 쓰러지던 그 순간이 다시 눈앞에서 그려졌다.
그때 로젤리아는 자신이 들고 있는 잔에 독이 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도 마셨다. 손을 떨어가며, 분명 두려워하고 있었으면서 기꺼이 목숨을 걸어가면서.
그러니 칼라일이 샤를로테를 보며 범인을 색출해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샤를로테가 로젤리아에게 독을 먹인 범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로젤리아가 독을 먹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죠, 폐하께서 샤를로테를 황궁으로 데려오지 않고 의사만 보내줬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로젤리아가 했던 말이 전부 맞았다. 샤를로테를 황궁으로만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샤를로테의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었다. 내 탓이었다. 알면서도 부정했다. 내 탓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세뇌 마법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더더욱 그랬다.
다 샤를로테 때문이야, 일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마법을 건 샤를로테 때문이야.
나로 인해서 로젤리아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반려로 맞이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샤를로테의 죄라고만 생각하시나요?’
‘로, 젤리아.’
‘이건 폐하와 샤를로테의 잘못이지요.’
샤를로테를 데려오지 않았으면, 그날 샤를로테를 바로 내보냈다면…….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폐하와 샤를로테의 탓입니다.’
칼날에 베일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을 텐데.
‘로젤리아!’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모습, 입을 막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던 붉은 피. 새하얀 드레스가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장미꽃처럼 쓰러지던 그 모습!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너를 끌어안은 것은 내가 아닌 그놈이었다. 내가 아니었다. 나는 로젤리아의 곁으로 갈 자격이 없었다. 그 자격을 스스로 박탈시켰다.
“내가 잘못했어.”
그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다 잘못했다. 네 말이 맞아, 다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결국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돌아와 달라고, 무릎을 꿇어서라도 빌고 싶었다.
그렇지만 로젤리아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더 절망스러웠다.
한참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 몰려오는 두통보다는 심장의 통증이 더 심해 가슴 부근을 압박하며 벽을 짚었다.
그때 문밖으로 세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여기서 더 큰 일 날 일이 있나? 이미 벌어질 만한 일은 다 벌어지지 않았나.
설마 샤를로테가 또 발악이라도 하나. 정말 끝이 없군. 이미 밝혀질 때로 다 밝혀졌는데, 언제까지 죄를 부정할 생각이지?
그러나 세츠가 전한 큰일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폐하, 침실에 가둬두었던 샤를로테 황후가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