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바닥으로 흩뿌려진 붉은 피
일부러 새하얀 드레스로 몸을 치장했다. 목걸이도 다이아몬드 목걸이로, 귀에도 새하얀 진주가 장식된 귀걸이로. 독을 마시고 쓰러졌을 때, 좀 더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거울을 보자 붉은 머리카락이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이 정도면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겠지……그런데 거울에 비친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독을 마신 적은 두 번, 황후가 되고 한 번. 그리고 샤를로테가 먹인 독으로 두 번. 그때 나는 아이를 잃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잃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마신 독은 검이 되어 샤를로테를 향할 것이니.
떨리는 손을 꾹 눌렀다. 그때 문을 열고 칼라일이 들어왔다. 그도 나처럼 새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안색도 창백했다. 나는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칼라일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다가가 뺨을 쓰다듬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나를 보자 이내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쓰러지면 바로 안아줘야 해.”
“걱정하지 마, 네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치료할 테니까. 네가 아플 일은 없을 거야.”
칼라일은 천천히 이마를 맞대더니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
“사랑해. 정말 사랑해. 네가 없는 것은 이제 생각할 수 없어.”
속삭이듯 들려오는 그의 말에 일부러 고개를 위로 들자 칼라일이 부드럽게 입을 맞춰왔다. 연신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그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준비는 다 끝났다. 로젤리아는 오늘, 피를 흘리며 스러질 것이다.
샤를로테는 배를 쓰다듬으며 루아 남작부인에게 독병을 건넸다. 처음에는 한 모금만 마셔도 즉사로 이어질 수 있는 독을 먹일까 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불법 경로를 이용하면 쉽게 흔히 구할 수 있는 독을 이용하기로.
그래야 루아 남작부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울 수 있을 테니까.
이카니엘 대공이 모든 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리고 범인으로 몰아갈 범인 또한. 그러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여론을 몰아가는 것, 이 한 가지였다.
‘아가야, 이제 모든 게 정리될 거야. 나는 황후가 되고, 너는 장차 이 제국을 이끌어나갈 후계자가 될 거야.’
로젤리아만 사라진다면, 과연 누가 칼라일의 말을 들으려 할까. 칼라일은 마력연구관이지만 그를 무시 못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로젤리아의 연인이기 때문이었다. 칼라일이 뒤늦게 내가 13황녀이니 약혼자였다느니 떠들어대도 함께 증언해줄 사람이 없으니, 나는 결국 안케도니아 1황녀로서 살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 후로는 정말 마음 놓고 지낼 수 있겠지.
황후로서 공부도 하고, 국무회의에도 참여하고. 태교도 하면서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평화롭게 지내는 거야. 아이가 태어나면 유모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돌봐야지. 신전에 가서 축복도 받고, 가장 좋은 옷에, 좋은 것만 먹여야지. 매일 같이 너는 고귀한 존재라며 속삭일 거야.
‘13황녀가 황녀로 취급받을 수는 있나. 거의 평민이나 다름없지.’
‘도대체 폐하께서는 저 거지를 왜 황녀로 들인 건지 모르겠어.’
‘어차피 황녀 취급도 못 받는데 뭐, 교류를 위해 타국 후궁으로 보내거나 하겠지. 신경 쓰지 말자고.’
……너는 나처럼 만들지 않아. 너는 이 제국을 이끌어나갈 아이야.
샤를로테는 주먹을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연회가 시작된다.
곧 모든 게 완벽해질 것이다.
***
베논 제국이 주최하는 연회는 생각보다 성대했다. 대연회장 한 곳을 가득 채울 정도의 화려한 보물과 각 귀빈들마다 앉는 자리에 놓여있는 크리스탈로 만든 식기와……작은 벨벳 케이스 안은 보석으로 채워있었다. 귀빈들에게 주는 선물인 건가. 이런 귀한 보석을?
“레이몬드 제국에 무한한 영광과 축복의 빛이 내려앉기를.”
그때 연회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간 이카니엘 대공은 축복의 말과 함께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자 연회장 천장 위로 떠오른 새하얀 빛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귀빈들 주변으로 반짝이는 가루를 뿌려댔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빛을 톡톡 두드렸다. 마치 연회장 안에 눈이 내리는 듯했다.
그때 시종들이 나에게 샴페인이 든 잔을 건넸다. 잔을 건넨 사람은 루아 남작부인이었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샤를로테가 주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이 잔 안에 든 독을 마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잔을 몇 번 돌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라일은 건네받은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자신의 팔을 걸었다.
샤를로테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왔다. 나는 일부러 잔을 든 채 세실리아와 아일라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칼라일과 나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틈에 섞였다. 독이 든 잔을 한 손에 든 채.
그리고 칼라일과 나는 곧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하지만 내가 독을 마시고 쓰러질 순간, 바로 나를 안아 치료할 수 있는 거리에서 머물렀다.
그때 연회장 기둥 바로 옆에서 루치아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샤를로테의 몰락을 지켜보겠다고 한다더니, 저기에 있었구나.
루치아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힘들어 보였다. 저번처럼 울까 걱정되기도 했고. 독을 마시기 전, 루치아노와 잠시 대화라도 나눌까 생각하던 찰나, 루치아노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 것이 보였다.
“대공.”
루치아노의 시선 끝에는 페르소나가 있었다. 페르소나와 내가 마주치자 귀족들 몇몇이 수근 대기 시작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것도 내가 두고 왔던 목걸이를, 그가 분수대에서 입을 맞추고 있던 그 목걸이를.
“이번 일에 그대의 공이 크다. 마력동맹국 협정이 무사히 성공되면 대공에게도 큰 상을 내리도록 하지.”
큰 상을 내린다라. 무슨 상?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 말을 하려고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다른 말을 하려고 나에게 왔겠지. 페르소나는 좀 더 나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업무와 관련된 얘기는 나누는 것처럼 보이게끔, 미소를 띤 얼굴로.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나.”
“무엇을 말씀이시죠.”
“다시 황후의 자리에 돌아오라는 내 말. 샤를로테가 나에게 세뇌 마법을 걸었다는 것. 전부 듣고, 알고 있지 않나.”
그제야 말아 올린 입꼬리와 달리 그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황후의 자리에 돌아와 달라니.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 관계를 어찌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 질기고도 질긴 인연이었다. 이혼만 하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페르소나가 세뇌를 당했든 뭐하든, 그가 나를 두고 샤를로테에게 관심을 표했다는 것. 이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샤를로테가 나에게 세뇌 마법을 걸었다는 것을 내세우며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분명 내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았을 텐데, 칼라일과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돌아오라 말하고 있었다.
정말 싫었다. 그와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과거에 페르소나를 사랑했던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 순간 내 시선이 잔으로 향했다.
독이 든 잔. 내가 이걸 손에 쥐게 만든 사람은….
“폐하. 아직도 모든 일이 샤를로테로 인해 생긴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샤를로테가 나에게 세뇌 마법만 안 걸었다면….”
“아니죠, 폐하께서 샤를로테를 황궁으로 데려오지 않고 의사만 보내줬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이혼 후, 처음으로 페르소나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 질긴 관계를 끊어내면서, 그에게 복수할 방법이 떠올랐다.
결심을 하자, 손이 덜덜 떨렸다. 예전에 느꼈던 목이 불타는 고통, 그 고통이 벌써부터 느껴지는 듯했다. 크게 흔들리는 그의 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뒤로 물러났던 걸음을 다시 페르소나에게로 옮겼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페르소나는 주춤거렸다.
“왜 샤를로테의 죄라고만 생각하시나요?”
“로, 젤리아.”
“이건 폐하와 샤를로테의 잘못이지요.”
차갑게 쏘아붙이자 페르소나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유지하고 있던 미소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붙잡고 아니라고 외치고 싶어 하는 듯이 보였다. 나와 이혼하게 된 이유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듯,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말라붙은 입술만 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폐하. 샤를로테가 세뇌 마법을 걸었죠. 그래서 샤를로테를 더 사랑하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샤를로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샤를로테 못지않게 너를 원망하고 있는 걸.
황실의 마차에 부딪혀 사고가 났으니 황궁으로 데려와 치료를 한다고? 그런 억지가 어딨어. 너는 그냥 샤를로테를 보자 관심이 생겼고, 옆에 두고 싶어서 데려온 것을.
문득 궁금해졌다. 샤를로테가 세뇌 마법을 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네가 정말로 샤를로테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나를 그리도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글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충격으로 일그러진 페르소나를 향해 웃으며 잔을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독을 바로 입술 가까이에 갖다 대었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폐하와 샤를로테로 인해 벌어진 것입니다.”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잔 안에 담긴 샴페인을 마셨다. 입안에 고인 액체를 삼킨 순간 목 안이 아려오더니 어마어마한 통증이 몰려왔다.
예전에 먹었던 독과는 전혀 달랐다.
순식간에 손에 힘이 빠지고 잔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칼로 목을 벤 듯한 통증, 이내 그 자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페르소나는 내가 잔을 떨어트리고 크게 비틀거리자 당황하며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차갑게 처냈다.
나도 모르게 목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렸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스스로 독을 먹게끔 만든, 모든 일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샤를로테가.
뒤늦게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페르소나가.
날 사랑한다고? 그럼 똑똑히 지켜봐. 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몰고 왔는지.
“커헉!”
그리고 무언가 입 밖으로 울컥, 쏟아졌다.
붉은 피가 바닥으로 흩뿌려졌다.